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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아모스 5:21-27)

by 【고동엽】 2021. 11. 21.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아모스 5:21-27)

선지자 아모스는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에 있는 드고아 고원에서 양을 치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체를 살펴보면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갖추었음을 느낄 수 있어 아모스가 단순한 농부가 아니라 초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떼를 돌보는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7:14,15) 북왕국 이스라엘로 들어가 우상의 중심지인 벧엘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다시 유다에 돌아와서 자신이 받은 예언을 글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호세아와 거의 같은 시대의 예언자로 남쪽 유다는 웃시야가,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당시는 아모스가 “시온에서 안일”하고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6:1)라고 표현한 대로 남쪽이나 북쪽 모두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람이 앗수르에 의해 패배했기 때문에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여로보암2세는 주변국가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풍요와 번영을 누리게 되자 이에 비례하여 사치와 타락이 심해갔습니다.

왕은 상아로 장식한 호화로운 궁전만으로도 부족하여 여름궁과 겨울궁을 세웠고(3:15) 백성들 또한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먹고 마시며 취하여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온갖 향락에 젖어 있었습니다(6:4-6). 그뿐 아니라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는 등(2:6-7)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자연히 상업윤리나 성윤리도 문란하여 저울을 속이며 쭉정이를 알곡에 섞어서 팔아 부당 이득을 취하는 현상이 다반사였고(7:3-5),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닌다(2:7)는 말 한마디만을 가지고도 그 당시 사회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비로소 여호와의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세력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단호히 꺾으시고 고난받던 이스라엘에게는 평화와 기쁨의 날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를 보내셔서 강한 바로의 군대를 물리치고 해방과 구원을 주셨던 것처럼 여호와의 날이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경제적으로는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에 모두 18회 등장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시작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악을 행하는 자나 교만한자들을 직접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날이 진실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이요, 이를 위해 핍박과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날입니다. 그렇지만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고 두려운 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이 사실은 요엘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욜 2:2)이며, 크고 심히 두려운 날(욜 2:11)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오셔서 이방과 악의 세력을 심판해 줄 것으로 희망했지만 부패한 이스라엘에게 이 날은 오히려 어두움(즉 심판)이요 빛(즉 구원)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즉 재림의 날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문제는 과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이 회복의 날, 구원의 날, 기쁨의 날이겠는가? 아니면 심판과 두려운 날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날이 그들이 기다리는 것처럼 회복과 구원, 기쁨과 위로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이루어짐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회복이란 바른 제사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가 외치는 바는 예배의 회복을 위한 촉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형식적인 예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키는 절기나 성회를 미워하며, 그들이 드리는 번제나 소제, 화목제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각종 악기를 총동원하여 노래를 부르지만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21-23)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만 되면 전국 각처에서 모여 거창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렸습니다. 특히 유월절 끝날인 제7일이나 초막절 끝날에는 대대적인 성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여 소란을 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 절기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양과 소를 잡아 불태워 번제로 드리고 고운가루를 만들어 소제를 드렸지만 헛수고였습니다. 헌신의 마음이 없는 번제,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소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인가 보다 하고 살찐 짐승을 잡아 화목제를 드려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 드려지는 제물을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2:6,7, 5:11,12).

예배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요 4:21). 예배 순서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순서에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 들어있어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교회를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드럼이나 기타를 사용하느냐 안 하느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드려진 헌금과 제물의 양이 얼마였느냐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도 예배의 요소가 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사람이 상한심령으로(시 51:17),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께 나와 예배하는 것을 멸시치 아니하시며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시 51:19).

2. 공법과 정의에 기초한 예배라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형식적인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십니다. 가나안의 혼합종교에 물든 이스라엘은 선민의식과 그 특권만을 강조할 뿐 그에 부합하는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신앙 없이, 그리고 신앙에 합당한 삶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헛된 제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로운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의로운 제사란 종교적 형식의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인자를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샤머니즘적, 관습적인 예배에 참여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헌신과 경배를 자기 위로의 수단으로 삼고 바친 제물의 양과 정성만을 강조하는 기복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첫 사랑을 찾으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고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에의 결단과 깨끗한 예물을 드리기에 힘쓰는 삶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물이 수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공법과 정의도 자유롭게 시행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공법은 율법의 공평한 적용을, 정의는 정직한 판단의 기준을 의미합니다. 재판관이나 통치자들은 뇌물에 눈이 어두워 의인을 정죄하고 악인을 감쌀 것이 아니라 위에 더 큰 재판장이 계신 줄 알아 정직한 사회, 공정한 법질서가 세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정직히 살고 법질서를 바르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어지러워진 사회의 도덕을 회복하고 공의를 세우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입니다. 불법과 불의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사람들이 삶의 보람을 찾는 사회를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공직과 직장에서 각자 변화와 개혁의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지 말고 부정부패의 구조를 척결하는데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나라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도록 기도로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선하고 바른 마음씨와 정의로운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날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마 5:13,14)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우상과 연합한 혼합주의 신앙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숭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절기와 성회를 지켰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국가들의 우상숭배에 점점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방신을 인정하고 지역마다 다른 신을 두었던 가나안의 영향을 점점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조의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농사와 풍요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비가오지 않을 때는 이방인들의 제사 풍습을 따라 기우제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작물에 비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26절에 말하는 식굿과 기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무튼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우상이 올무가 되어 결국 이스라엘이 망할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25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동안 제사나 예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의식은 하나님께 드렸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향한 것이 아니라 우상(자신을 위해 만든 너희 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선를 추구하지 않았던 것은 너희 삶 자체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 이방과 방불해진 이스라엘의 예배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배를 내가 받지 아니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니냐? 광적인 종교적 열심, 외적 경건, 3일마다 드리는 십일조, 수많은 제물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이었느냐?”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구체적 심판 내용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세상과 같아졌으니 세상에 가서 살아보아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서 당신을 가장 최우선의 자리에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신으로 섬기면 둘째, 셋째는 어떤 신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고 사랑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엡 4:22)합니다. 아직도 예수 믿기 전의 미신행위나 풍습을 벗어버리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의 예배 역시 하나님 앞에 가증된 것입니다.


출처/황의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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