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왜 박해를 받아야 했나?최초의 박해는 64년에 있었던 로마시의 대화재에 대한 누명 때문이었다.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네로는 제국차원의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로 박해를 했고, 박해지역도 로마시내에 국한되었고 또 일시적이었다.그러나 곧 이어서 박해는 제국전체로 확산되었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의 질투
사도행전과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바울이 당하는 시련은 대부분 유대인의 훼방 때문이었던 것을 알수 있다.유대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사적으로 방해했다.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여 박멸하려고 했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박해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다 바울 자신이 박해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바울 이후에도 계속 되었으며,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다음에는 더 거세졌다.
사도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 70~155)이 경기장에서 화형을 당할 때 “폴리캅을 잡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군종을 선동하고, 장작을 나르는 등 가장 극성을 부린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폴리캅이 순교를 당하던 155년 2월 23일은 안식일이었다.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안식일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팔레스틴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도 기독교에 최초로 박해를 가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안식일 준수와 우상숭배 거부, 병역 거부 등으로 골머리를 앓던 로마 당국은 유대인들에게 예외적인 관용을 베풀었다. 초기에는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유대교와 같은 것으로 여겨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또 로마제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2) 정치적인 이유
그리스와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대 제국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문화적인 포용 정책을 썼다.
세금 납부와 내란 문제는 엄격하게 다루었지만 각 나라와 민족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생활에는 간섭하지 않았다.수많은 식민지 국가로 구성된 대 제국을 다스리는 로마의 고민은 제국의 어떤 통일성과 일체감을 유지하는 일이었다.이런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 황제숭배라는 국가예식이었다.
각 지역에 신전과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놓고 사제를 파송하여 정기적으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제사의식을 치르게 했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증명서를 발부했다.다신(多神)을섬기는 다른 이교도들에게는 이것이 국가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유일신(唯一神)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신앙의 핵심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황제의 신상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황제는 주님이시다”(Caesar is Lord)라고 고백하는 황제예배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신으로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황제를 정치적인 지도자로는 인정하지만
신으로는 인정하지 않자 그들은 로마 제국을 부정하는 반역자나 혁명가로 몰려서 철저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대부분의 황제들은 자신이 곧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섬겨 제사를 드리는 일을 정치적으로 시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간혹 스스로를 신이라고 실제로 착각하는 황제들이 있었다. 도미시안은 자신의 공식적인 칭호를 ‘주 하나님’(kurios kai theos)으로사용했으며 공문에도 그 칭호를 썼다.
이런 부류의 황제들은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감을 가졌고 또 혹독한 박해를 가했다. 박해의 정도는 황제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었다.
기독교가 공인될 당시까지 10여 차례의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고(10대 박해사건)18) 그 외에도 많은 산발적인 박해들이 릴레이식으로 이어졌다.
3) 구별된 행동
당시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과 결단을 요구했다.
황제숭배 이외에도 모든 사교적인 모임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교도들의 명절이나 친교의 자리는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의식과 더불어 진행이 되었으며 대부분 신전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노예들과 전쟁포로들을 죽을 때 까지 싸우게 하는 경기장 출입도 그리스도인들은 하지 않았다.
당시의 석공이 하는 일은 대부분 이교도 신전을 짓는 일이었고, 양복 재단사는 이교도 사제의 옷을 만들었으며, 교사는 이교도(異敎徒)신화(神話)가 들어있는 교재를 가르쳐야 했다.
또 공직자는 달력에 명시된 이교도의 절기를 지켜야 했고, 향은 대부분 이교신전에 쓰였고, 병원에서의 치료는 이교신(異敎神)에 대한 제사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는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신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자세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자연히 증오심을 유발하게 되었다.
노예제도하에서 노예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일, 여자 아이를 낳으면 내다버리는 관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르는 모습, 성(性)의 순결성을 강조하는 태도 등은
기독교인들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없는 구별된 행동이었기에 자연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와 제도, 풍습을 부정하는 위험한 사람들로 보였다.
4) 선교지상주의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와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율법의 형식을 준수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안식일, 할례, 먹거리 구별 등을 지키는 데에 생명을 걸었다. 이런 자세는 가나안 본토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한결 같았다.본토에 사는 사람들 보다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당시 지중해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유일신 신앙과 안식일 준수와 음식구별은 군대생활을 불가능하게 했다.
온갖 박해를 동원했지만 유대인들이 죽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자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로마당국은 결국 유대인들을 특별하게 취급을 하여 유대인들에게는 병역과 황제숭배 등을 면제해주었다.
유대인에 대한 이런 관용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한 대반란(66~70년)이전 까지 지속되다가 반란 이후 중단되었으나 클라디우스(Cladius)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기독교가 선교를 시작한 초기에는 로마당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범주에서 취급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는데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 두드러진 차이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며 선교에 대하여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전 세계의 모든 이방 종교들을 부정했고,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를 개종시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겼으며, 또 실제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소아지역과 그리스 지역, 이탈리아 본토는 물론 이집트, 아프리가 북단, 스페인, 프랑스, 영국 지역까지 무서운 속도로 기독교는 퍼져나갔다. 250년경에는 이탈리아 지역에만 100개의 감독구가 있었다. 유명한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 160~225) “우리는 비록 어제 시작했으나 당신들이 가진 모든 장소 즉 도시, 섬, 요새, 촌락, 시의회, 궁중, 원로원과 재판소들을 채웠다.당신들에게는 단지 신전만이 남아있다”19)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조차 급속한 선교의 속도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기독교가 이토록 급속도로 퍼져나가자 첫 번째로는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박해를 부추겼고, 그 다음으로는 로마당국이 긴장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정책과 마찰을 빚자 박해의 손길을 뻗게 되었다.
5) 헛된 소문들
기독교가 복잡한 문화를 지닌 지중해 세계로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이런 괴상한 소문들은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그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근친상간자들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은 밤에 비밀의 장소에서 남녀가 같이 만났으며,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부부간에도 이런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것이 빌미가 되어 기독교인들은 남녀가 같이 모여서 혼음을 일삼는 음란한 무리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② 인육을 먹는 자들
지하 무덤과 같은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밤에 모인 교인들이 예배와 더불어 성만찬을 같이 진행하면서, 이는 내 살이니 받아먹어라 또 이는 내 피니 받아마셔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살리라”라는 등의 예문을 사용했다. 이를 듣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인육제(人肉祭)를 거행한다고 생각을 했다.이런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모여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생겨났다.
③ 무신론자들
당시의 사람들은 형상이 없는신(神)을 생각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고대의 우상종교를 믿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유독 형상이 없는 신을 믿고 있었고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은 모든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로 보였다.
④ 무정부주의자들
로마제국의 국가종교인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은 황제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무정부주의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특히 당시의 사회 체제는 우상제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이런 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행사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보였고, 다른 종교와 우상숭배를 인정하지 않고, 노예를 형제로 여기며 종말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⑤ 불행을 몰고 오는 사람들
전쟁이나 전염병, 기근과 같은 재앙이나 천재지변들이 닥치면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이런 불행이 생긴다고 덮어 씌웠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었는데, 로마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그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는 지식인들의 비판들이 나왔다.어거스틴의 「신의도성」이라는 책도 이런 비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네로 황제에게서 로마시내의 방화자로 지목되기도 했다.기독교인들은 불행한 일이 생길 때마다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⑥ 방화범들
네로치하에서 로마시의 화재범으로 지목되던 것과 유사한 일은 계속 이어졌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종말에 있을 ‘불의 심판’을 말하기 때문이었다.원인 모를 화재가 나면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의심을 받았다.
⑦ 무식한 자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죽은 유대 갈릴리 출신의 한 젊은이가 3일만에 다시 육체적으로 부활했으며,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온 인류의 구세주이다. 이것은 어떤 신화(神話)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당시의 사람들, 특히 식자층에서는 어떻게 들었을까?재고할 여지가 없는 허황된 것으로 단정했다.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교리는 희랍의 철학과 사상적인 배경을 가진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원론에 근거한 희랍의 신관(神觀)은 절대적인 초월성이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
인간이 되신 하나님 등은 상식 이하의 것이었다.스스로 엘리트라고 자부하며 희랍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교육이 없는 노예들과 변두리 사람들이 중심인 기독교인들을 무식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초대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고, 이런 잘못된 소문들은 기독교를 잔혹하게 박해하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이에대하여 기독교인들은 삶으로 그릇된 소문을 바로잡는 것과 동시에 기독교의 실상을 알리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을‘호교론자’(護敎論者) 또는 변증가’(辨證家)라고 한다.변증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변증을 했다.
희랍철학에 익숙한 이들은 철학적인 변증을 했고, 법률에 숙달한 이들은 법적인 논증을 동원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이 공통적으로 의존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이었다.유명한 변증가 중의 한 사람인 저스틴20)은 자신이 기독교로 귀의한 동기가 기독교인들의 고결한 삶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옳다는 것을 그들의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변증가들은 주장했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인이 아닌 총독의 글에서도 확인이 된다. 111년비두니아 (Bithynia, 터키북부 해안)의 총독으로 임명된 플리니(Pliny)는 황제신상에 절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새벽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신으로 찬양하며, 절도와 간음을 비롯한 부정한 일을 하지 않기로 맹세한다.”라고 트라얀 황제에게 보고했다.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삶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변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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