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3
(언약을 따르는 믿음)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루터의 칭의가 완전구원으로 이해되어, 믿음의 건강성을 해치는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졌슴을 살펴 보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일으키는 또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약했다는 언약사상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언약하셨으니 구원은 따논 당상이라는 겁니다. 이 언약사상에서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십일조 헌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3 천여 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땅을 분배받지 않은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의 몫으로 납부하던 제도 입니다. 우리가 고대인의 신앙태도를 따라야 할 이유도 없고, 그 헌금이 부자교회를 만들어서 교회를 부패 시킵니다. 교회에 돈이 넘쳐나서 교회가 부동산, 주식, 대부업은 일상이고 의료, 교육, 언론 사업 등을 하며 그 대표를 성직자가 맡으므로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근대가 오기 전까지 성직자가 국가의 관리가 되어 부패하던 시절을 방불케 합니다. 미자립교회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히 헌금하고 싶으면 교회 말고, 구호단체나 선교단체에 직접 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보다 필자의 권고는 그 돈으로 자녀를 위한 적금을 들으세요. 가정을 구하는 것이 구원받음이고 믿음 입니다. 이 생소한 이야기를 지금 시작 합니다.
1. 아브라함 언약
학자들은 인류의 출현을 약 4 백만 년 전으로 생각합니다. 인류가 창세와 노아, 에녹 등의 시대를 거치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성서에서 이 시대를 언제인지 모른다고 해서 원역사라고 합니다.
BC 1,750 년 경에 이라크 북부의 우르 지방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계약이 문서로 되지 않고 말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언약(言約) 입니다. 그 계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내용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입니다. 필자의 열쇠구절이므로 잊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 계약내용을 처음 들으실 겁니다.
필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했다는 언약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어느 학자나 설교자로부터 그 계약내용을 듣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과 계약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기로 한 내용만 알고, 정작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내용은 말도 안한다는 게 황당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계약 내용의 중심은,
하나님이 악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구출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입니다.(아브라함의 선택)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는데 예수시대에 가서 그 저주가 사라집니다.
2. 모세 언약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과 12 아들이 이집트에 살게 되는데 자손이 번창하자 두려움을 느낀 파라오 왕은 그들을 노예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어 그를 인도자로 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룰 탈출하게 하시고 그 여정에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법을 주시며 계약을 맺습니다. 시내산 언약 입니다.(이스라엘의 선택)
출애급기 19 장 5 - 6 절 인데, 주요부분만 발췌합니다.
5 절 :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6 절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애급기 4 장 22 절 :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라
이스라엘은 전체 하나님 백성의 일부분 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의 하나님 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법이 수여된 목적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세상을 돌보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것은 열방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기 위함 입니다.(사42:1 이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754p)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 입니다. 저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천 여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어록 제 1 장 제 1 절은 '법에 울타리를 처라 울타리를 처라' 입니다.
거룩을 세상과 분리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세상을 돌보라고 준 법으로 세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세계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지 않고 세상과 적대하고 불화 합니다.
오늘날도 경건을 세상과 분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3. 예수그리스도 언약
선지자 에레미아와 이사야는 새 언약이 이루어지리라 예언 합니다.(렘31:31 사59:21)
그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판단)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판단)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이제 신의 저주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의 궁극적 목적은 나를 구원하려 하심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 입니다.(그리스도인의 선택)
죄인(악인)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신의 구원 사역(使役)에서 이탈하여 유대인들과 같이 실패의 길을 가게 됩니다.
신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 현실에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음이 구원받음이고, 이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믿음 입니다.
이제 십일조 헌금을 교회에 내지 말고 적금 들으라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아직도 황당합니까? 왜 성서에 세상을 돌보라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요한복음 3 장 17 절은 빼고 16 절만 읽으면서 자기 영혼구원에만 집중하고 세상을 돌보라는 말씀은 황당하게 들릴까요?
노벨상 수상자인 프랑스 생화학자 자크 모노의 말을 들어 봅니다.
"중추신경계가 의식에 전달하는 외부정보는 분명히 암호와 되고 변형된 것이며, 이미 자신에게 수립된 규범에 맞게 틀지워진 것이다. 즉 외부정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자신의 주관의 조건에 맞게 그 정보를 변형하는 것이지 그 정보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궁리출판, 2010, 62p)
정보가 곧 바로 의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중추신경계가 자기의 주관에 따라 정보를 오염시켜서 의식으로 보내고, 의식에서 그 오염된 정보를 재생산 합니다. 우리가 책을 한 번 읽어서 그 저자의 독특한 주장의 10 % 도 얻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읽어도 자신의 신학에 맞게 변형시킵니다.
믿음은 공인된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거나 종교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주님이 어떤 분인지 그려내기 위함이지 이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끊임 없이 사유하며 탐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 입니다.
4. 믿음이란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믿음을 먼저 알아 봅니다.
ㄱ. 종교개혁으로 인해 믿음이 개인화, 관념화, 심령화 되어 지금의 삶과 유리되었습니다.
ㄴ. 믿음이 도덕화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유입된 결과 입니다.(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신학과 철학, 77- 78p)
개신교만 그런게 아니라 서로 닮아가서 가톨릭도 같습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죄론과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에 대한 교리는 기독교 계시 종교의 본질적 내용으로 등장하고 이러한 교리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 되었습니다.(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의 조직신학 1 은성출판사 159-171)
이로인해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실종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 구원이 있음이 실종되었다는 말 입니다.
루터의 행위와 대립되는 믿음은 믿음이 우리의 현재 삶과는 상관 없는 영혼구원으로 내면화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주권신학에 의한 소명은 업적과 성취, 성과로 나타나서 자본주의 정신에 편승하여, 아니 오히려 주도하여 교회 확장과 사업이 곧 교회 성장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부패한 교회 입니다.
웨슬리의 성화는 도덕, 경건과 같은 의미가 되어 세상과 분리하려는 바리새적 믿음이 되었습니다. 감리교 교단의 성소수자 반대 공식 입장은 이것 때문 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이고 유대교와 이슬람은 순종이며(이스라엘엔 믿음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습니다) 기독교는 믿음 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오해하여 종교에 탐닉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종교 중독 입니다. 유사 기독교가 5 백만 명이나 됩니다. 실은 기성교회도 이에 준합니다.
재물 뿐만아니라 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탐닉은 존재의 퇴락 입니다.(존 맥커리 하이데거와 기독교 83p)
믿음은 이성을 포기하거나 지식체계를 등한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과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법에 대항하여 주체성을 복원하라는 신의 요청 입니다.(토니 킴,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 176p)
기독교는 삶에 무한한 가치가 있으며 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종교 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나에게 오는 가치에 대한 삶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결단 입니다. 자본주의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번영과 성취에 있지 않고 삶의 변화를 위한 결단에 있습니다.
정규직보다 많은 수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신음하고 있고,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에서 뒤처진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최고 권력이 되어서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 생산하며 소비를 홍보 합니다. 이 끊임 없는 소비지향 문화에 의해 훼손된 지구 환경으로 인해 매 년 24,000 여 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습니다.(한스 페터 뒤르, 신 인간 과학 128p)
이렇한 세상을 구원하시는 신의 사역(使役)에 나의 생명이 합일되는 것이 구원이고 이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믿음 입니다.
그동안 긴 글에 함께 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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