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웃 좋은 관계
딤후 4:9-18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가정은 서로 관계를 이루어 형성된 집단입니다. 가정은 가족과의 관계가 건강해야 진정한 가정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그 가정은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안식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가족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으면 그 가정은 안식처도 아닌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우리교회 납골공원이 있는 메모리얼 파크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이다음에 갈 납골함이 있습니다. 그곳에 이미 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엊그제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생각된 것은 “나도 언젠가 저 단지 속에 가루가 되어 넣어져 저렇게 놓여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것은 한편 재미도 있지만 또 한편 씁쓸한 마음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생각되기를 “결국 인생은 저렇게 결말나는 거야”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모두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옹다옹하며 다투며 더 가지려고 더 안달하며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자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납골함 옆에는 가족사진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그래 결국은 가족이 최고야”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가족은 생존 시에도 사후에도 변치 않는 관계입니다. 끝까지 지켜주고 사모하고 염려하고 애달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족들뿐입니다. 이 가족이 최고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가족의 중요성을 모르고 불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불행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지면 다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관계에 성숙미를 보여야 합니다. 가족과 교우와 이웃들이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제가 들어갈 납골함 오른편 옆에는 원로목사님이 들어가실 자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와 원로목사님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떨어질 수 없는 질긴 인연을 가진 관계입니다. 제 옆에 이종활 집사님 부부가, 제 바로 위 칸은 최종진 목사님 부부가 위치해 있어 지금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계속 같이 붙어 있어야 하는 관계들입니다. 살아서도 좋은 분들과 함께 하지만 사후에도 좋은 분들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좋은 관계의 삶을 중시해야 합니다. 좋은 관계유지는 삶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기쁨을 부여합니다. 그리움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마침내 삶의 역동성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관계가 악화된다면 이상의 내용들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까지 상실하게 됩니다. 여기서 삶의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하는 웃음까지 잃게 됩니다.
이 시대의 불행한 것은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책을 보니까 일주일 내내 웃으며 살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원래 웃는 날로, 화요일에는 화사하게 웃는 날로, 수요일에는 수수하게 웃는 날로, 목요일에는 목숨 걸고 웃는 날로, 금요일에는 금방 웃고 또 웃는 날로, 토요일에는 토실토실 웃는 날로, 일요일에는 일없이 웃는 날로 웃으며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웃으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중 인간만이 웃음의 삶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웃음의 삶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 웃음은 성공자의 삶입니다. 실패자는 웃음이 없습니다. 슬픔자도 웃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음은 성공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웃음이 있어야 할 이유 중에는 웃음의 삶은 치유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웃음의 삶에는 소화기능을 활발하게 해 줍니다. 웃음의 삶은 질병이 고침 받게 해 주고 질병퇴치도 이루어지게 하며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작용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이 웃음이 자꾸만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웃음소리는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의학자가 우리나라 남성들이 얼마나 웃으며 살아가는가를 조사했더니 하루에 한번 웃는다는 조사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데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이유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의 어려움이나 실패 그리고 아픔과 삶의 고달픔 등의 원인들이 모두 웃음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들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마음의 상처들이 더 큰 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관계의 악화에서 기인되는 요인들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만함은 그런 요인들을 얼마든지 상쇄하고 극복하며 더 행복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문제는 관계가 악화되면 궁궐 같은 집안에서도 지옥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은 눈만 뜨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그 관계에서 불가불 많은 상처들을 받게 되고 그 상한 마음들이 마침내 웃음을 잃게 만들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상처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목회자요 사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였고 많은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니까 교회는 참 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슨 소문이 돌면 “그럴 것이다”하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말이 말이되어 뭉쳐져서 나중에는 엉뚱한 말로 둔갑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 때는 참아내기가 참 힘들어 집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종말이 다가옴으로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너는 속히 오라”(9) 고 부릅니다. 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느니라(10). 그 말은 다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가만 남았느니라.”(11) 누가는 주치의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입니다. 누가는 2차전도 때부터 바울을 수행하여 끝까지 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밖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고 안의 소식을 밖에 전하였습니다. 본 서신도 누가가 전한 내용입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14). 알렉산더는 우리나라 김 씨와 같이 많은 성입니다. 그래서 앞에 구리 세공업자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는 초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이단에 빠져 배교하여 치리를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알렉산더는 바울이 재판받을 때 불리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내게 해를 많이 입혔느니라,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 사도바울이 그로 인하여 많은 심적으로 고난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소심자였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사실을 잊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복수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너도 그를 조심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다”(15)고 환기를 시킵니다. 사역을 인계할 때 그를 요주의 인물로 인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불행합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특히 조심할 사람이야” 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인생이 참 비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된 사연들을 고백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느니라.”(16) 사도바울이 1차 투옥 때 한사람도 도와주지 않고 다 나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알렉산더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때 누구도 개입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마음에 상처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바울을 괴롭히고 떠난 것은 아닙니다. 19절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인 부부로 황제신앙 숭배강요를 거절하여 추방당한 후 사도바울과 합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에 충성을 다합니다. 그래서 롬 16장4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그들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 놓았던 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감정표현이 아주 분명한 사람입니다. 도움을 준 사람과 상처를 준 사람들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처 중에서 가장 큰 상처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다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히브리어로 “라짜즈”라고 말합니다. “산산 조각나다.” “타박상을 입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블랍토”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방해하다”, “해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상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사건이 큰 상처를 입힌다는 점입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남깁니다. 부부싸움의 원인을 보면 세계평화의 문제로 부부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경제문제로 싸우지도 않습니다. “반찬이 왜이래”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월급이 얼마인데” 이렇게 나옵니다. 갈등과 상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하나는 가장 가까운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서 기인된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멀리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에게서 기인되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형제와 시부모와 친구와 교우와 구역식구에게서 기인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 한마디는 상처가 안 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크게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어느 7순을 넘긴 노 할머니가 이혼을 신청했습니다. 영감님과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격적으로 상처를 주는 할아버지와 더 이상 부부로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마음의 상처가 크면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이혼을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이 마음의 상처는 점점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암과 같습니다. 초기에 방치하면 치유가 어려워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이지만 놔두면 커지기 때문에 빨리 치유해야 합니다. 이 마음의 상처는 외부상처와 다릅니다. 외부 상처는 약으로 수술로 쉽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고 약으로 수술로도 고치기가 힘듭니다.
본문서 고백하는 바울의 마음의 상처가 그런 것입니다. 그는 배가 파선하여 두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여러 번 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외부적인 핍박이나 고난은 모두 기쁘게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그레스게는 .... 디도도 떠났다” 이 배신감이 오래갔습니다. 배신감은 마음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예수께 베드로와 유다와 도마의 배신은 오래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을 보면 가장 무서운 죄인으로 배신자를 꼽아 가룟유다와 같은 죄인을 모두 지옥 9층에 집어넣습니다.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느니라.”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를 심히 대적 하였느니라.”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끼리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우와의 관계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여야 할 관계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안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복잡한데 교회에 와서까지 갈등하는 일은 아주 큰 과오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공동체로 하여금 건강하도록 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성숙이 이루어지고 할 일을 다 하게 됩니다. 또한 부부와의 관계는 가장 조화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조화를 이루는 데는 남편들의 말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가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깰 수도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는 기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답지 못하고 옹졸하면 아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무시하고 핀잔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사업이 안 되어 위축되는 때인데 그런 때 말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고 자괴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 결과 기쁨을 잃게 되고 행복감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신앙이 퇴색되고 웃음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는 원래 남남끼리 만난 관계임으로 처음부터 성격이나 마음이 서로 잘 맞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부의 관계는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관계이고 서로 존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특별히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주어진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은 좋은 위로를 만나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위로자를 만나게 되면 깊은 마음의 상처도 쉽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방법이 가장 궁극적인 해답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알렉산더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고 주님을 쳐다보고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서 나를 강건케 하셨고 사자의 입에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상처를 고쳐주실 분은 주님뿐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상처를 준 사람만 쳐다보게 되면 마음의 감정이 더 깊이 흔들립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진해질 것입니다. 더 미운 생각만 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매사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력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배려할 만큼 아량도 이해력도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같이 어렵고 짜증날 때에는 아주 사소한 작은 말 한마디도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우리에게는 그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넓고 깊고 크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적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영적은혜가 나로 하여금 그런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뭄 때에는 모든 식물들이 다 말라 죽습니다. 그러나 오직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늘 푸름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냇가라는 물 곁에 나무가 심겨져 있기에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안에 내주하시는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불가능 하지만 그런데 주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해 하십니다.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의 안내와 임재하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오늘 현대인들은 누구나 이 마음의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상처는 제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아니면 우울증으로 발전됩니다. 그리고 웃음의 상실로, 기쁨도 잃게 되고 마침내 삶의 의욕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소명은커녕 자신의 삶도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암흑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성숙한 삶은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삶입니다. 거기에서 기쁨이, 행복이 발견 됩니다. 우리들은 그 힘으로 세상에서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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