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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농담 예화모음 6편

by 【고동엽】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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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농담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시냇물 위로 외나무다리가 놓여있고 한 여인이 이 다리를 걷게되었다. 그런데 다리가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호흡을 길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이 다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신다면 전 재산을 바쳐 하나님 사업에 쓰겠나이다.” 다리 중간쯤 갔다. ‘이제 절반이나 왔는데 전 재산을 바친다?’ 이 여인은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다리를 지나가게 되면 저는 땡전 한푼 없는 알거지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되는걸 원치는 않으시겠죠? 제가 재산의 절반만 바친다 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실 거예요 그것도 저는 엄청나게 큰 것이랍니다.”
이래서 다리를 다 건너게 되자 이 여인은 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재산의 반을 바친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이 다리가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 딱잘라 5만원만 헌금하더라도 이해하시겠죠?”
마지막 다리가 흔들거리며 여인의 중심도 흔들거렸습니다. 다급해진 여인은 얼른 고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맨 나중에 지껄인 제 말을 정말이지 농담이었습니다. 그걸 진심으로 받아드리다니 너무 하십니다.”라고 했다.
탈무드의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 단적으로 들어내 보여준다.
“여호와께 서원 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신23:21)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도서5:4-5)
한태완 목사<예화포커스>

 

 

 
 
 

 

 

농 담

 
1968년, 저 유명한 "6일 전쟁"후, 승리감에 도취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농담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얀 장군과 라빈 장군이 심심해졌습니다. 그러자 다얀 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슬슬 전쟁이나 시작해 볼까?" 그러자 라빈 장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오전에 전쟁이 끝나면, 오후에는 또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우리는 흔히 "농담"을 생활의 활력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농담"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농담이 매우 위험합니다. 때로는 사람을 실족케 하고 때로는 멸망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이 멸망 받는 비극을 성경은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타락과 향락으로 오염된 소돔성의 하루가 기울어갈 무렵,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롯이 문득 천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쉬어가기를 간청했습니다.


천사들은 롯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소돔성의 완악한 백성들이 몰려와 천사들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미 이성을 잃은 백성들은 문을 부수고 천사와 롯의 가족들을 해칠 태세였습니다. 롯은 흥분한 소돔성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에게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이 있는데 그 딸들을 대신 주겠다" 그러나 광기에 찬 백성들은 문을 부수고 롯과 가족과 천가들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롯을 안으로 잡아끌며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밖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멀어 버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천사는 롯에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 땅을 멸하러 왔다. 이 성중에 네게 속한 자가 있느냐.사위나 자녀들을 모두 성밖으로 이끌어 내라" 롯은 즉각 정혼한 딸들과 사위들을 찾아가 성밖으로 나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성은 곧 멸망 당한다.나와 함께 성밖으로 나가자" 그런데 롯의 사위들은 여기에서 결정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맙니다. 롯의 충고를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세상상이가 이렇게 재미있고 즐거운데 무슨 멸망이냐는 투였습니다. 그들은 롯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소돔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유황과 불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롯의 아내는 소돔성이 불탈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겨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롯의 사위들은 어쩌면 멸망을 피할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교만을 저질렀습니다. 농담은 때로는 멸망의 지름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에 매우 부끄러운 실수를 곧잘 하고 있는데 그중 보통 흔한 것이 야비한 농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아는 성도로서는 도저히 취할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끊임없는 결단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다본 롯의 아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용감한 결단은 아름답습니다. 진리를 선택하는 용기는 위대합니다.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신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롯의 아내처럼 멸망당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의 소리"를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언젠가 환란을 당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용기입니다. 신앙이란 생사가 달린 중요한 것입니다. 결코 농담을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생사가 달린 문제를 놓고 농담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진리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사위"는 아닌지요.
어느 극장에 코미디를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만 화재가 났습니다. 그때 코미디안이 나와서 침착하게 알리기를 "여러분, 이 극장에서 지금 화재가 발생했으니 빨리 질서 있게 나가 주십시요"라고 말하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참 우습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자 코미디언이 다시 나와 "아니 여러분, 정말 이 극장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하고 심각하게 말해도 여전히 농담으로만 듣고 좋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농담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도 농담을 삼가야 합니다. 즉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롯은 평소에 사위에게 농담을 한 적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 농담을 좋아하거나, 진실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전해도 농담으로 여기거나 거짓말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외감을 갖고 성경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성경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 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하였습니다. 신앙이란 진지한 것이고 목숨이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무의식중에 또는 고의로 부끄러운 말이나 거짓말 그리고 농담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 같은 행동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생활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건이란 예배시뿐 아니라, 일상생활 어디서든지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맹자어머니는 가정교육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이웃에서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맹자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저들이 왜 돼지를 잡지요?" 그는 무심코 "응 그건 너에게 주려고 잡는 거란다"고 대답했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곧 이 농담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 날부터 무의미한 농담을 그쳤습니다. 녹은 모르는 사이에 쇠를 갉아먹습니다. 거짓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지은 죄들을 간절히 회개하고 앞으로는 더러운 말이나 농담과 거짓말을 삼가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 
 

 

 
 
 

호머의 자살

 

그리스의 시인 호머의 자살동기는 지금도 안 밝혀졌다. 그에 대한 얘기는 많지만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호머는 낚시를 다녀오는 서너 명의 소년을 만났다. ]

시인은 물었다.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 한 소년이 대답했다. "잡은 것은 버렸고 잡지 않은 고기는 바구니에 넣어왔습니다."
시인 호머는 밤새도록 소년의 말뜻을 생각해봤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우둔함에 실망해 자살했다.
그러나 소년의 말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뜻의 농담에 불과했다.

 

 
 
 

 

 

 

소설
 
"만약에 말이야. 어떤 사람이 평생을 저 앞산이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다가 죽었단 말이야.
물론 그 산은 실제로 그 사람의 것이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 그 산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일까."
이 말은 영화 '약속' 의 한 장면에서 나온 대사이다.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를 토대로 재구성하면 이러한 말이었던 것 같다. 비록 주인공이 한 말도 아니고 스토리의 전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대사였지만, 이 말은 영화를 본 후 박신양이 혼자 두고 떠나야하는 신부에게 남기는 비디오 테잎에서 북받쳐 울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하던 대사도 젖히고 내 머리에 깊이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산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만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 <농담>의 주인공인 루드비크가 애인에게 보냈던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믿고 따라왔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궁과 같던 당으로부터 버림받은 후에 다시 희망으로 찾은 것은 바로 루체라는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이었다. 왜 하필이면 루체일까. 어느 오랜만에 받은 외출 날에 우연히 폐허와 같은 한 무너져 가는 도시에서 만난 여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혹은 여자가 궁해서 아니면 전번에 창녀를 만나서 느낀 자신이 한계를 느껴버린 답답함 때문에 사랑스러워 보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분명 루체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루드비크를 끌었다. 그것은 순수함이다. 다 해지고 바랜 옷과 신발, 헝클어진 머리는, 그 정돈되지 않은 순수함은 아주 오랫동안 루드비크를 질식시킬 듯이 몰아쳐 온 당과 이념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농담으로 여긴 자들
 
창 19:12-14

몇 년 전에 우리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사건이 있습니다. 여러 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머릿속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기억이 있는데 바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일시에 잃어버리게 한 또 국가적으로도 큰 망신을 하게 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입니다. 어떻게 그 큰 건물이 일시에 무너졌을까? 수 백 명이 일시에 죽을 수 있을까? 가득이나 백화점이라고 하면 많은 돈을 들여 지은 최고의 건물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건물이 붕괴될 때 어느 순간에 와지끈 하고 무너진 것 같지만 어떤 경고적인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령 천장이나 바닥에 금이 간다던가, 그 금이 점점 커져가는 정도의 경고들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로 그 건물의 책임자들도 그와 같은 조짐들을 미리 보고 어떻게 해야 할까 대책 회의를 세웠는데 백화점 운영 시간 중에 손님들을 나가라고 하면 백화점 이미지에 큰 손실이 올까봐 ‘괜찮겠지’하고 미루다가 결국 수많은 사람의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어려운 일들은 반드시 그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경고성의 조짐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징계를 통해서 백성을 바로 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징계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징계하시기 전에 반드시 어떤 경고를 보여주시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경고를 줌으로 그 삶을 돌이키고 은혜 속에 새로운 삶을 일구는 사람들은 징계 없이 다시 회복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내용을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지만 의인 50명에서 10명까지 반복되는 실랑이 속에 아브라함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본 뜻을 하나님은 알아 차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소돔성에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롯이라고 하는 조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어 소돔성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살려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롯의 모든 사정을 알고 그의 식구 까지도 사랑하여 하나님을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 하나님은 소돔성의 멸망 중에서도 롯과 그의 가정을 구원하시기로 작정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말씀합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경고하시고 롯으로부터 그의 식구들과 더불어 소돔성을 탈출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롯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그 남을 식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딸에게도 말하고 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도 말합니다. 안타깝게 딸들은 말을 들었지만 사위들은 그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롯에게 전한 말씀, 하나님께서 전한 말씀을 롯의 딸들과 정혼한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김으로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때때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구원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농담으로 여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가는 역사를 생각해 볼 때가 있음을 봅니다.

이제 오늘 이러한 본문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 내용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징계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징계 전에 구원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소돔성이 극심한 죄악으로 멸망할 지경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를 구조하기 위한 경고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 12, 13절에 말씀합니다. 천사를 보내어 구원 받을 길을 알려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이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경고조차 않으시고 이런 어려움을 베푸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경고하셨다면 나는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경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네가 그 경고를 듣지 않았느니라.’ 라고 우리들에게 말씀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가 있지요. 신호등을 보면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다른 생각을 해요. 그럼 신호등이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꿨으면 출발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딴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까 깜빡 잊어버리고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럼 뒤에서 ‘빵빵’하면 ‘아! 파란 불이구나’하고 가게 되는 경우 있지요. 아마도 설교 시간에도 멍하니 있다가 다른 사람이 ‘아멘’ 하는 것 보고 ‘끝났구나’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겠지요.
살아가면서 한 눈팔고 있다보면 멍하니 생각할 때가 있어요. 분명히 목사님을 향해서 눈길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리 속에서는 휑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신호등을 향해서 눈길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딴 생각을 잠깐 하고 있으니까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어도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어떤 경고를 주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를 놓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심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성군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에게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실수를 통하여 다윗은 멸망의 지경에 있었지만 선지나 나단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하셨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 회개하고 통곡함으로 그에게 후반기의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의 꼬임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땅으로 가던 발람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길을 막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모압 왕 발락 앞에서 손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백성을 내가 어찌 저주하리요.’ 담대히 모압 왕 발락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통하여 알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돌아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징계의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귀하게 돌이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세의 의인이었습니다. 노아가 당세의 의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노아는 들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비를 내린다고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은 듣지 않았지만 노아는 그 말을 듣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다 받으며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이 더 중요히 여겨졌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아 인류의 다른 시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경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구원을 확대하기 원하십니다.
롯뿐이 아니라 롯 때문에 롯의 식구 까지도 구원 하십니다. 롯을 사랑하고 롯 때문에 그의 식구까지 구원의 방주에 들이시기를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노아 때문에 노아의 식구도 구원하시고, 아브라함 때문에 롯도 구원 하시고, 롯 때문에 그의 식구도 구원 하시는 ‘확장형의 구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었으면 여러분의 주변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너에게 속한 자를 다 끌어내라고 11절에 말씀합니다. 사도행전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부피를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깨끗한 백성을 구원하기 원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들에게 정결케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와 병 고침을 받습니다. 한 사람은 중풍병 환자인데 자신이 못 나오고 자신의 백부장이 대신 나와서 병 고침을 간구하여 병을 고칩니다. 본인이 나오고, 대리인이 나와서 기도하니 두 가지가 다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확장성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우리 힘이 연약하여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셔서 우리들에게 주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은 딸들이 참 예뻐요.’ 그런 얘기를 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해석을 합니다. 목사님 딸이 예쁘겠습니까? 목사님이 좋겠습니까? 목사가 은혜롭다고 생각하면 그 딸은 예뻐 보이겠지요.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는데 은혜가 하나도 안돼요. 그럼 그 딸이 예쁘겠습니까? 안 예쁘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 자녀를 보면 너무너무 예뻐요. 여기서 애들 데리고 나가시잖아요. 그 애들이 너무너무 예뻐요. 제가 얼굴이라도 한번 만져주려고 하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고해요.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면 우리 주변 사람까지도 다 챙겨 주시기 원하는 거예요.


성가대에 있는 사람으로 예를 듭시다. 우리 성가대에 계신 분들 다 결혼 하셨지요? 결혼하실 때 처남 될 사람, 처제 될 사람을 볼 때 좋아 보여요, 안 좋아 보여요. ‘내가 저 사람하고 결혼 할 텐데, 저 사람의 처남이고 처제인데 참 씩씩해 보이고, 참 고아보이네.’ 그런 마음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그런데 결혼해서 싸움도하다 보니까 좋아 보여요, 안 좋아 보여요.
사람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주변 사람까지 달라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우면 우리 주변 사람까지도 다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걷고 있었어요. 그날 차를 안 가져가서 걷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차를 세우더라고요. 그러더니 저보고 타라고 하는 거예요. 보니까 남자 혼자더라고요. 그래서 차에 탔어요. 그런데 저보고 ‘목사님 저 모르시지요?’ 그래서 ‘죄송합니다.’그랬더니 ‘저는 교회 안 다녀요.’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의 어머님이 분당중앙교회 나가십니다. 제가 교회는 안 가지만 그래도 목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오시면 매일 목사님 얘기하시고 때때로 어머님을 교회까지 태워 드리기 때문에 제가 목사님을 압니다. 목사님 가시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분이 태워주셔서 잘 왔습니다. 그 분이 왜 태워다 주었겠어요. 그분의 어머님이 목사님을 좋아 하니까 그분이 목사가 고아 보여서 거기가지 태워다 주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귀함을 받게되면 그 주변 사람까지 축복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시면 여러분의 자녀도 축복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관련이 있으면 관심이 있고, 사랑하면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 사람까지 관심이 있는 것이 우리의 인지상정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 주변까지도 사랑하시는 확장의 역사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니까 롯을 사랑해요. 롯을 사랑 하니까 롯의 식구까지 사랑해요.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축복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축복 주시려면 누구를 축복해야 돼요? 자녀를 축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여러분 가정을 축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여러분의 직장을 축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믿음 좋은 사람이 다니는 직장의 주인은 참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을 세우시려면 여러분 다니는 직장도 잘 되어야지요. 저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이 직장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기회를 농담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위하여 마지막 기회까지도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또 다시 경고하시며 우리를 구원할 기회를 삼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도와 계획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의 관영했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모두 악했습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선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한탄하셨다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6장 22절을 보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도대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무시할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세상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에 빠져있으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세상에 빠져있으면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한 가지에 빠져있으면 다른 것이 들립니까? 다른 것 보여요? 여러분 소리 질러 보세요. 다른 소리 들립니까? ‘소리가 잘 들리네요.’ 얘기해 보세요. 다른 사람의 소리 들려요? 자기가 말 하고 있는 동안엔 다른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한 가지 빠져있으면 다른 것은 안 보여요. 그러니까 세상에 빠져있으면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구 떠들고 있으면 우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다른 데 빠져있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그 소리를 골라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 지역이 전부 더운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아주 더운 지역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에게 ‘북극에 가면 얼음도 있고 추위도 있데’라고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빠져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경고를 들었다고 그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절연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에 그들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그것은 참 맛있더라’라고 압니다. 재미있는 책을 읽어본 사람은 ‘그책 참 좋은 책이야’라고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 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죄악이 하나님의 의의 법을 덮어 버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우리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주최는 누구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예민하여 하나님의 어떠한 작은 음성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집중되어 있을 땐 하나님의 음성이 나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웃기지 말아 하나님이 무엇이냐’ 농담처럼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뭔데 이 성을 멸망시킬 수 있어. 농담하지 마라. 여호와가 누군데 이 성을 뒤엎을 수 있어. 농담하지 마라. 여호와가 누군데 내 삶을 지배해. 농담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농담으로 여겼을 때 이들에게 주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24절과 25절을 보니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모든 백성과 땅의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 받을 기회까지 놓치고 멸망하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애써 하나님께 간구한 아브라함의 구조 노력이 무의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볼 때 너무너무 안타까워요. 아브라함은 자기의 조카 롯을 생각하며 소돔성의 멸망을 유보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애간장이 끓는 기도와 더불어 마음에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의 모든 기도가 무의로 돌아가도록 롯의 사위들은 엉뚱하게 이러한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었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롯이 얼마나 안타까웠습니까? 그래서 결국 구원의 기회를 얻은 롯의 사위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말았어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목사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의 기대와 기도, 그리고 애쓰는 섬김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목사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데 제가 목사로서 바로서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적어도 인간적으로라도 기대하시는 분들을 실망 시키지는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또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적어도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내가 어떻게 바로서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대하고 소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대와 많은 분들의 기도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애써준 분들의 기도의 대가로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귀한 은혜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들에게 이와 같은 어려움이 없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들이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농담으로 여긴 결과는 그들에게는 이제 영원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끝나도 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끝내버리면 모든 것은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결정은 단호합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회개의 기회조차 우리에게 단절되었을 때 우리는 또 다시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요구하고 또 유보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면 우리에게는 전혀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이 센 분이에요. 누가 하나님의 고집을 꺾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꺾을 때 까지 나는 기다릴 것이야’라고 고집하는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집을 꺾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아프고 괴로워요.
이런 사람이 있어요. ‘나는 갈 때까지 갈 거야. 한번 맞을 때까지 가 볼 거야.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하나님께 꺾어질 때 그때 갈거야.’ 이런 사람도 꾀 있다고요.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합니다. 하나님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제가 고집에 대해서 얘길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의인화 된 얘기인데 토끼가 한 마리 있었는데 어느 날 약국에 가더니 홍당무를 하나 달라고 얘길 하더래요. 약국에 가서 ‘홍당무 하나 주세요.’ 그랬더니 ‘약국에 무슨 홍당무가 있습니까? 홍당무 없어요.’그랬더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홍당무 하나 주세요.’그러더래요. ‘홍당무 없다니까?’그랬더니 또 나갔다가 들어와서 ‘홍당무 하나 주세요’그랬더니 ‘홍당무 없단 말이야. 다음에 오면 가위로 네 귀를 잘를거야’ 얘기 했데요. 그런데 다음에 또 들어오더니‘가위하나 주세요.’그래서 ‘약국에서는 가위는 안팝니다’그랬더니 ‘그럼 홍당무 하나 주세요.’ 토끼의 고집이 아주 세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고집은 토끼보다 더 세요.
우리가 아무리 버텨도 하나님 앞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버티다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경고하실 때 돌아오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바른 모습이란 말입니다.
오늘은 짧게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해 전의 일입니다. 어느 한 곳을 방문하고서 참 은혜를 많이 받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뭐냐 하면 바로 제임스 돕슨이라고하는 사람이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는 포커스 온 더 패밀리라는 가정 사역 전문 사역 기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벌써 세 가정 중에 한 가정이 깨진다고 얘기하지요. 미국에서는 자기의 삶의 히스토리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몇 살 때 결혼했고, 나를 언제 낳았고, 그리고 언제 이혼을 했고, 언제 재혼을 했고, 재혼을 해서 우리 집의 식구는 몇 명이 됐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기해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삶에 있어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만큼 가정이 많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임스 도슨이라는 사람은 소아과 의사였어요. 소아과 의사로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정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가정 사역을 위해서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직원 한 사람과 더불어 둘이 시작했어요. 그런데 20년 정도가 지나 제가 방문했을 때는 천 3백명의 상근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4백명 정도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어요. 하루에 만 3천 건 정도의 상담 편지와 상담전화, 상담을 해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5천 곳에서 텔레비전이 방송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지역방송 중에서 5천 곳에서 포커스 온 더 패밀리의 가정 사역에 대한 방송이 나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대통령은 몰라도 제임스 돕슨 포커스 온 더 패밀리는 다 안다고 하는 얘기들을 하지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꿈이 결국 수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아무 일도 안하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 어려운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내게 주어진 삶의 여건을 가지고 얼마든지 내 삶을 즐기고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이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소원을 주십니다. 소위 말하는 비전을 주십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려움도 없고 비난도 없고 고통도 없고 문제도 없을 텐데 우리들에게 어느 날 꿈을 위하여 달려가야 할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이 생기는 순간 우리에게는 고통과 아픔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원대한 꿈을 향하여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달려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가 비록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못한 것은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지 않아요. 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징계 받지 않을 죄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살려 두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모세에게서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백성에게 남은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사람입니다. 출애굽 시켜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인도했어요. 그런데 모세는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일을 했지요? 므리바의 반석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모세가 백성들에게 그만 혈기가 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내리쳤어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꾸짖었습니다. ‘모세야, 너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네 마음에 있는 혈기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구나.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원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자리에서 쳐 죽였습니까? 살리셨습니까? 모세가 왜 살았을까요? 모세에게는 아직까지도 그에게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에요. 모세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구 까지는 모세의 능력을 발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아직도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서 잘 지내야 되겠다.’ 이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적어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시기 원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나를 살려 주시고 계시구나.’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꿈이 있는 사람, 마음에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달라요. 마음에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에 꿈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비전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아요. 그러나 마음에 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농담으로 여겨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제외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꿈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는 분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모세에게 생명의 기회가 연장 되었듯이 하나님의 기회가 우리들에게 연장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아직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나에게 이것을 하라고 나에게 생명의 기호를 주셨구나 라고 믿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과의 농담
 
화란의 한 여인이 흔들거리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만일 무사히 이 다리를 건너게 해주시면 50만원을 헌금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리를 거의 다 건너게 되었을 때, 이 여인은 생각이 달라져서 '50만원은 너무 많으니까 그 반만, 아니 그런 것 안 내도 되겠죠 뭐'라고 하자 그 순간 다리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하나님 농담 입니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앞에서 이와같은 자세를 취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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