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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예화모음 15편

by 【고동엽】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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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주제별 예화모음)

 

▣ 비유에서 배우라

 

본문: 마 13;10∼18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절)

 

한 시각장애 청년과 피아니스트 자매의 결혼식에서 들었던 감동적인 축가가 있습니다. “세상의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는 신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시각장애 남편을 위해 사랑의 종이 되어 낮은 자리지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부분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 탕자의 비유, 포도나무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 등이 대표적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11절)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그 뜻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를 통해 진리를 알면 감동이 일어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하나는 모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열린 사람만이 알게 하고 완악한 사람은 모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마 13:13). 비유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함에 이르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마 13:16,시 1:1∼2).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각권 어디에서든 그리스도가 발견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되고 있습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성경은 마치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장 중요한 진리, 그리스도 자신과 천국에 대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비유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예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비유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나는 일입니다. 사건, 고난, 교회, 말씀…. 그 무엇을 통해서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모든 지식은 허무한 것이었다.”(임어당) 지식뿐만 아니라 예수 없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혼돈과 어둠, 공허일 뿐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달 착륙자 중 한 사람인 어윈 대령은 그 업적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 역사의 최고의 날은 인간이 달에 도착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오늘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 주 하나님으로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로소 인생의 문제가 하나둘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런즉…비유를 들으라!”

* 기도: 주님, 우리 마음이 옥토와 같은 좋은 밭이 되어 말씀의 풍성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인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석년 목사(서초교회)

 

 

 
 
 

 

 

▣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예수님의 비유를 묵상할 때 다음의 내용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경우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비유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표현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그 뜻을 어려워하며 예수님에게 비유의 뜻과 함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물었다(마 13:10). 그때 예수님은 비유의 두 가지 기능을 말씀하셨는데(마 13:11-15)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의 기능과 ‘저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닉의 기능’이었다. 비유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길 바라셨지만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도전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유를 통하여 주어지는 천국의 계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비밀을 아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하시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심판의 수단이 됨을 보여 주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은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마 13:14-15)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쉽고 바르게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마 13:16-17; 막 4:33).

또한 예수님의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도래했음을 알리셨으며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셨으며 회개와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셨다."

- 비전성경사전 중에서

 

 

 
 
 

 

 

▣ 용기에 대한 비유

 

세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한다. “얘야, 펄쩍 뛰어. 겁내지 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한다. 마음 한쪽에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외친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하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결국 위험해지는 건 그녀의 작은 몸이다. 하지만 아빠가 물 속에 계신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인다. 이것이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이다. 신뢰는 말한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한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다. 결국 결정해야 한다. 만일 뛰어 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이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두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는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두려움을 포함하는 결정들을 직면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한다.

- 「물 위를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 존 오트버그

 

 

 
 
 

 

 

▣ 값진 진주의 비유

 

값진 진주의 비유는 감추인 보화 및 쌍둥이의 비유로 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에는 진주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진주는 귀한 보화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인들은 홍해를 건너 페르시아만이나 심지어 인도까지 진주를 찾으러 갔던 것이다.

홍해의 진주는 품질이 낮았지만 페르시아만이나 실론 해변,인도의 진주는 좋은 품질이었다. 본문의 비유를 보면 진주 장사꾼은 좀더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는 우연히,진주의 비유에서는 찾고 있는 과정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다르다. 진주 장사꾼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을 얻기까지 장사꾼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를 한 것이다. 자신의 소유가 얼마나 되며 그것을 팔았을 때 값진 진주를 살 수 있는지를 계산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장사꾼의 결단력이다. 이 결단력은 천국을 소유하려는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찾고 구하는 자에게만 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주목할 것은 그의 생각이 일편단심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믿음이 이시대 성도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 비유에 대해 이레니우스와 다른 교부들은 보화와 진주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 물론 비유의 내용을 보면 문자적으로는 천국을 지적한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간증 가운데 “나는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두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히 혹은 찾는 과정에서 발견했던지 그 후의 자세는 헌신적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주를 문자적으로 천국(교회)을 뜻하는 것으로 봐도 좋고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진주를 찾는 과정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장사꾼은 의욕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이란 이 진주를 찾기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만족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성종목사 <대전 월평동산교회 담임목사>

 

 

 
 
 

 

 

▣ 겨자씨 비유의 교훈

 

본문: 마13: 31-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 한 알 가지고 비유하셨는데 과연 이 겨자씨의 비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1. 겨자씨 모양(마13:32)

씨 중에 가장 작은 씨 입니다(마13:32, 막4:31)

그러나 소중한 생명체 입니다(마13:32, 막4:31, 눅13:19)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밭은 우리를 말함(눅8:11, 고전3:9, 마13:38)

2. 겨자씨 심은 밭(마13:31)

심은 밭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마13:20, 눅8:13), (마13:19, 눅8:12), (마13:22, 눅8:14)

심은 밭이 옥토이면 많이 결실함(마13:23, 눅8:15, 막4:20)

각자 자신이 옥토이어야 함(약5:7-8, 골1:6, 빌1:10-11, 마13:31)

3. 겨자씨의 결국(마13:32)

겨자씨 같은 믿음가진 우리들임(골3:25, 롬2:11, 골2:6-7)

장성하면 큰 나무가 되어 결실 맺음(고전13;11, 요15:5, 16, 엡4:13, 갈5:22-23)

겨자씨 같은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장성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마13:31-32, (눅17:20-21, 마12:28), 고전3:6-9, 엡4:13)

한알의 겨자씨 같은 믿음가진 우리들도 주안에서 성장하여 성령으로 열매맺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게 됨을 믿고 항상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거하실 처소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속에 건설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눅17:20-21, 마12:28

 

 

 
 
 

 

 

▣ 기름을 준비한 자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 25:1-13

 

1.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면 어떤 자들이 되겠습니까? (마25:2)

2. 이러한 처녀들은 무엇 때문에 미련하다고 했으며 슬기있는 처녀들은 무엇 때문에 슬기있다고 했습니까? (마25:3-4)

* 슬기있고 미련한 것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차이인데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였고 미련한 처녀는 준비해야 될 것을 갖추지 않아 봉변을 당했습니다.

3.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신랑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했습니까? (마25:5)

4. 왜 주님께서는 아직까지 오시지 않으시고 더디 오시려는 것 같습니까? (벧후3:3-9)

5. 오랫동안 기다리던 신랑은 결국 언제 왔습니까? (마25:10)

6.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왔으나 기름이 부족한 처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25:8)

7. 결국 혼인잔치에 참예한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마25:10)

8. 신랑은 누구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까?(고후11:2)

* 교회와 신부- 예수님과 교회 관계는 성경에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되었습니다.(고후 11:2) 이는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서 정절을 지켜야 되고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교회가 더불어 영원히 동거하기 때문입니다.

9.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언제 오실 것 같습니까?(마24:36-39)

* 재림의 시기-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있거나, 그 날을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10.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은 슬기있는 처녀와 같이 어떻게 재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마24:42-44)

11. 이 비유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25:13)

 

* 묵상: 주님은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더디 오신다고 생각해서 신앙적으로 나태해지고 게을러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은 예고없이 도적이 찾아오는 것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불시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 혼인잔치에 참예하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깨어서 신앙의 준비를 잘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하며 두 팔 벌려 맞이 할 수 있는 준비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태완 목사

 

 

 
 
 

 

 

▣ 누룩 비유

 

본문: 마 13:33,눅13:20∼21

 

겨자씨 비유와 쌍둥이 비유다. 놀라운 것은 마가복음에는 누룩 비유가 없다. 우리는 누룩 비유에서 예수님의 시청각적 교육 방법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일상생활 에서의 예를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자랄 때 어머니 마리아의 빵 굽는 것을 많이 봤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누룩 비유는 예수님이 일상생활에서 얻은 이야기를 메시지에 적용한 것이다. 본문에서 누룩이란 말은 원어에 보면 주메(zume)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누룩과 유사한 것이다. 주스와 함께 사용돼 발효작용을 촉진시킨다. 박테리아를 배양,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룩은 일단 밀가루에 반죽되면 보이지 않는다.

제롬은 여인을 교회로, 세 말의 밀가루는 여러 종류의 인종(셈 함 야벳자손) 혹은 헬라인 유대인 사마리아인 등으로 봤다. 인위적인 알레고리적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이 비유의 요점은 누룩을 밀가루에 반죽한 것으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부풀어 전체에 퍼져간다는 데 있다. 겨자씨 비유와 다른 점은 겨자씨 비유는 외형적 성장을 강조하고 있고 누룩 비유는 내면적 성장인 천국의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두 비유는 상호보완적이다. 그러면 누룩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누룩과 같으니라”고 했을 때 그 천국과 누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체적으로 볼 때 천국은 여기서도 지상에 있는 교회,누룩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한다. 누룩의 특징은 첫째, 확산돼 간다는 것. 둘째는 그 확산이 비밀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누룩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확산돼 간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각과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누룩 비유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는 자에게는 항상 말씀이 겨자씨 비유처럼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누룩 비유처럼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나 병든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종 목사

 

 

 
 
 

 

 

▣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경: 마7: 24- 27, 눅6:47- 49

 

이 비유는 엄밀하게 말하면 직유로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삶의 정황은 산상 설교의 결론으로 하신 것으로 돼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항상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행함이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다(마 7:24). 여기서 주님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사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피하려고 한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과 같은 형편에서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왜냐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면 바닥 구조물을 단단히 다진 뒤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에는 한국과 같은 모래땅이 없다. 진흙 섞인 모래와 같은 흙이다. 그래서 흙이 말랐을 때에는 집을 짓기가 쉽다. 그러나 일단 비가 와서 와디에 물이 흐르게 되면 그 때는 금방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장기적으로 보지 않고 우선 빨리, 그리고 쉽게 이루려고 한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보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는 비와 창수와 바람의 시험이 반드시 있다는 점이다. 그 때에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여기서 주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 반석은 무엇인가. 시 18: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고 했고 고전 10:4절에서는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모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반석이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리스도 위에 인생을 건축한 사람인 것이다.

/신성종 목사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본문: 누가복음 18장 1∼8절

 

일명 끈질긴 과부의 비유라고도 부른다. 왜 불의한 재판관인지에 대해 본문에는 ‘사람을 무시하는 자’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과부는 반드시 늙은 여자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여자들이 13∼14세에 결혼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부가 재판관에게 소송을 제기했다고 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금전 문제가 개입돼 있었을 것이다. 그 문제가 부채 문제인지,담보나 유산 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본문에서 과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의탁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과부는 재판관에게 줄 소송비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무의탁자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맥으로 봐서 과부의 소송 대상자는 돈 많은 유력자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부는 ‘늘 와서’(계속해서 왔다는 뜻이다) 재판관에게 소송에 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요구한 것은 그녀의 사건을 맡아달라는 뜻이다. 재판관이 그 과부의 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 것은 과부의 분풀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과부의 요청이 끈질기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셨으며 이 비유의 뜻은 무엇인가? 이 비유의 삶의 정황에 대해 18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고 했다. 주님은 끈질긴 기도를 해야 할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듣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요구할 때 들어준다면 하물며 공의롭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끈질긴 기도에 응답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비유의 내용으로 보아 이 비유는 제자들이 끈질긴 기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유로 깨닫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때가 곧 오기 때문에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종말론적 경고다.

/신성종 목사<대전 월평동산교회 담임목사>

 

 

 
 
 

 

 

▣ 양과 염소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 25장 31∼46절

 

이 비유를 일명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라고도 부른다. 어떻게 보면 비유라기보다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양과 염소란 표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유다. 31절에 나오는 ‘영광’ ‘모든 천사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인자되심을 말하는 표상어(表象語)이다. 32절에서는 모든 민족을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갈라놓는다고 했다.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양과 염소를 함께 사육한다. 낮에는 같이 풀을 먹게 하고 저녁에는 떼어놓는다. 그 이유는 염소는 야간의 한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더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 그러나 양은 밤에 신선한 공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염소와 함께 재울 수 없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오른편’에 갈라놓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양은 염소보다 더 값진 짐승이기 때문이고 둘째, 양은 염소의 검은색과는 달리 흰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의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라놓는 것은 세계 심판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른편에 서게 된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은 주님께 여섯 가지 사랑의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여섯 차례에 걸쳐 ‘나’(일인칭 대명사)란 말을 ‘너희’란 말과 대조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첫째,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둘째,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셋째, 손님들을 영접하고 넷째,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다섯째, 가난한 병자들을 돌봐주고 여섯째, 갇힌 자들을 방문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의 사랑의 행위 중에서 여섯 번째는 유대인들의 사랑의 목록에는 없는 항목이다. 그러면 왼편에 서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오른편에 서 있는 자들과 정반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의 형제들(지극히 작은 자들)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마태의 형제란 말의 용법은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당하는 여섯 가지 고통에 동참하는 자들이 오른편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신성종 목사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이 비유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어떤 부자가 풍성한 추수를 한 뒤에 평안히 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밤을 끝으로 그의 안심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을 말씀하면서 그 부자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이 비유의 삶의 정황이 누가복음 12장 13∼15절에 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집안의 분쟁에 대해 재판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상속 문제였다. 부친이 죽은 뒤에 자기 형이 유언장에 명시된 조항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논쟁에 개입하시는 것을 거절했다. 이기적인 동기로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자기의 임의로 주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이 청년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청년은 예수님을 자기의 변호사나 재판장으로, 혹은 조정자로 이용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년의 요구를 거절하고 15절에서 유명한 금언을 주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여기서 주님은 탐심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그러나 주님은 그 청년에게 지상적인 부와 즐거움을 멀리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의 핵심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 인간에게 빨리 다가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임박한 종말의 대파국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말씀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종말론적인 비유이다.

마치 노아의 홍수심판 때 사람들이 오로지 재물과 토지를 모으는데 관심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이다.

/신성종 목사

 

 

 
 
 

 

 

▣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

 

본문: 누기복음11: 5- 8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삶의 정황과 이 비유의 맥락에 있다. 위에서는 이 비유를 11장 1∼4절의 주기도문의 틀에서 봤다. 이 경우 주님은 기도자의 자세를 교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너희 중에 누가?”란 말과 직결된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신약에서의 어법을 보면 ‘단연코 아무도’ 혹은 ‘불가능하다’란 뜻을 가진 강력한 대답을 유도하는 의문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중에 누가?”란 말이 6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다시 말해 7절도 “너희 중에 누가?”란 말에 연결시켜야 한다. 비록 밤중이지만 찾아와서 떡 세 덩이를 꿔달라고 요구할 때 “나를 괴롭게(귀찮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너희 중에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7절은 결코 거절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거절할 수 없음을 묘사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해석할 때 근동지역의 손님접대의 관습과도 통하고 이 비유의 핵심이 보다 분명해진다. 따라서 8절은 반복되는 이웃 사람의 간청이 아니라 간청 받은 친구의 동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간청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잠을 방해받은 자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유의 주안점은 간청하는 자의 끈기가 아니라 간청한 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에 있다. 그렇다면 주님은 기도할 때 끈기 있게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교훈은 누가 밤중에 찾아와서 떡을 좀 꿔달라고 하면 비록 문이 잠겨 있고 잠옷 바람으로 있다 할지라도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 귀찮다고 거절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기도의 확신을 갖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다.

/신성종 <대전 월평동산교회 담임목사>

 

 

 
 
 

 

 

▣ 탕자의 비유

 

본문: 눅 15: 11-32

 

본문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 주며, 회개하는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본문은 여러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인간을 버릴 때 인간도 세상을 버린다. 탕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회개하는 자의 위치는 자유인의 상태가 아니라, 노예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가 노예의 심정의 심정이 되어 돌아온 것에 주목하자. 그러나 그러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받는 환영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아들에게 베풀어지는 향연과 춤은 아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이다.

탕자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배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그 마음이 선천적인 성향을 따르고 있는 한 인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본문은 충실하게 묘사해 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 멋대로이다. 자신을 살펴보면 어떠한가? 이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먼나라>는 어리석은 자들이 염원하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낙원일 뿐이다. 거기에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였다. 죄는 끊임없이 죄의 결과를 가중시킨다. 그는 행복을 얻는 대신에 빈곤에 휩싸이게 되었다. 풍요하고, 명예로운 삶 대신에 그는 예속과 수치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고, 단지 붙여 사는 돼지치기일 뿐이었다. 그의 식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수의 먹이는 결코 사람의 배를 만족 시킬 수 없다. 그에게 먹는 기쁨은 사라졌다. 이와 같은 말씀은 전체가 신자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의 삶을 추구하여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가 없다.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참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가? 인간의 헛된 추구와 그로인한 실패는 물론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 보다도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친다.

본문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아들을 맞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라. 그는 완전한 복음의 사면장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는 오늘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집나가 고통받는 아들의 처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날마다 문열어 놓고,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회개를 미루지 말라. 용서를 위한 아버지의 준비를 보라. 그는 제일 좋은 옷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지환을 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상속자임을 인정하는 지환을 준비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떠난 자는 지금 즉시 돌아가라.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 자의 계속적인 순종의 큰 가치를 알라.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이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 비유에 관한 성경 말씀

 

0 (마태복음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0 (마태복음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0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0 (마가복음 4: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0 (마가복음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0 (마가복음 4: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0 (마가복음 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0 (마가복음 4: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0 (마가복음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0 (마가복음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0 (누가복음 12: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0 (누가복음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0 (누가복음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0 (요한복음 16: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비유에 관한 금언

 

0 모든 사건은 크건 작건 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들이다.(말콤머거리지)

/한태완 목사 360 주제별 예화모음(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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