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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소명 예화모음 18편

by 【고동엽】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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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부르심에 대한 예화 모음

 

♥ 감취진 소명

 

이 사람은 누구일까. 직업을 열 번도 더 바꾼 사람.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주위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인물. 뱃사공에서 농부로, 노동자에서 장사꾼으로, 군인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지내다가 법률사무소 직원으로 있었던 사람. 법률사무소에서 법률공부를 했고 낙방 끝에 겨우 변호사가 되었던 사람. 그러다가 못생긴 얼굴로 주의원, 상원의원에 겨우겨우 당선되었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 그가 바로 노예해방을 선포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링컨이다.

 

 

 
 
 

 

 

♥ 소명인

 

일에 대한 자세에 따라 생업인, 직업인, 소명인이 있다. 생업인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직업인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경제적 기반이나 사회적 위치를 보장받는다. 소명인은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국의 한 길모퉁이에서 열심히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다. 온 종일 구두를 닦으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밝은 웃음이 종일 끊이지 않는 소년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으니?” 소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거든요.”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즈이다. 소년 디킨즈는 빛나는 구두코에서 희망의 꿈을 보았다.

/장자옥 목사(간석제일교회)

 

 

 
 
 

 

 

♥ 소명을 감당하는 행복

 

소명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것을 감당하도록 소명보다 훨씬 더 큰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김열방 목사(잠실목자교회)

 

 

 
 
 

 

 

♥ 현재에서 소명을 붙잡은 사람들

 

우리는 현재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소명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후회스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바꾸진 못한다. 내일 일을 염려한다고 해서 미래의 일을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지금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소명의 길은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현재를 살아가면서 발견할 수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소명을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세기 영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1785년, 그가 25세 되던 해였다. 그는 당시에 영국 의회에서 일하고 있었고 신학 공부를 할 것인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존 뉴턴(John Newton) 목사를 찾아갔다. 존 뉴턴 목사는 한때 노예무역 상인이었다가 회심해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곡한 사람이다. 윌버포스는 뉴턴 목사에게 신학교 입학에 대해 상담했다. 그러자 뉴턴은 “하나님은 신학교에 가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부르심이 있어 당신을 영국 의회에 보내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윌버포스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만류했다. 그 후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더 중요한 부르심을 묵상하다가 의회 정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노예 제도 폐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그는 이 일에 평생 헌신하다 마침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노예 제도가 영국 땅에서 폐지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윌버포스가 걸어간 소명의 길은, 그 자신이 현재 처한 삶의 현장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내 인생에 비전이 보인다」/ 양형주

 

 

 
 
 

 

 

♥ 소명의 중요성

 

말을 잘하는 것은 세상에서 참으로 유용한 일입니다. 말로써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지 않습니까? 정치가는 훌륭한 연설로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휘관은 훌륭한 연설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선생님은 훌륭한 말로써 학생들을 일깨웁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는 일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보십시오. 모세는 말이 어눌하여 말 잘하는 아론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역사의 주역은 소명을 받은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는 것이 말을 잘하는 일보다 훨씬 소중합니다.

 

 

 
 
 

 

 

♥ 직업과 거룩한 소명

 

대검찰청 신우회 연말 예배에 설교자로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식사 시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교제하다가, 검찰 총장이 앞에 나와서 하는 인사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면 성경을 읽은 다음에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눈에 꼭 드는 검찰청이 되게 하옵소서.’ 남은 임기 동안 제가 최우선순위를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검찰 복음화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약과였습니다. 기독교 교도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선진국처럼 교회가 경영하는 교도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런 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데, 일부 기독교 단체가 교도소를 운영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천 지검장 되시는 분이 대뜸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기독교 교도소가 만들어지면 내가 소장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에 가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은 황금 어장인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검장의 자리가 높습니까, 교도소 소장의 자리가 높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직업이 검사지만,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으니, 그 직업이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의 소명이 되겠습니까?

「요한이 전한 복음」/ 옥한흠

 

 

 
 
 

 

 

♥ 직업과 소명

 

직업이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직업을 통해 개인은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된다. 소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소명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직업과 다르다.

첫째,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포기한다.

둘째, 소명의 목적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다. 예를 들어,직업이 의사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소명은 생명을 살려내고 사람들에게 건강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셋째, 개인의 소명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책임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소명이다. 전문적인 직업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에서의 봉사도 소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당신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혹시 직업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소명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삶의 목적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

/장학일 목사(예수마을교회)

 

 

 
 
 

 

 

♥ 헌신의 소명과 목적

 

음악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연주를 마쳤을 때, 한 젊은 음악도가 그의 손을 잡고 훌륭한 연주를 극찬하면서 “저도 선생님처럼만 연주할 수 있다면 제 자신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이런 대답을 남겼다고 합니다. “오늘의 제 연주는 지금까지 제 자신을 바친 결과지요. 그렇지만 친구여, 나는 당신이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왜, 무엇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지를 잊지 않기 바랍니다.”그는 헌신의 소명과 목적을 상기시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망각한 채 공부하고 일하며 돈 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음악으로 음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시간, 재능, 노력, 정성, 물질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 소중한 음악가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 아닐까요?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보다 우리 주님이 그런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주님의 영광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있습니까? 더 이상 받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받기 위해서는 먼저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 「역설로 살아가는 행복」/ 이동원

 

 

 
 
 

 

 

♥ 소명을 받은 사람

 

하나님은 인간 각자에게 각기 다른 탤런트를 선물로 주셨다. 그와 같이 선물로 주신 재능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겐 받은 재능과 탤런트를 이용해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는 삶의 목적을 이뤄가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자신의 재능과 소명을 발견하여 그것을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받은 탤런트를 찾는 것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자기의 탤런트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교를 하게 될 때 사람은 소명대로 사는 삶을 버리고 욕심대로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직업과 전공을 잘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직업과 전공을 탤런트와 소명대로 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의 직업과 전공을 자신의 소명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자식이 소명대로 살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식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는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직업과 전공을 비교하지 말고 그냥 자녀들이 자신의 소질과 소명을 따라 직업과 소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김동호

 

 

 
 
 

 

 

♥ 그리스도의 종 된 소명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또한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 앞에 서야 할 주님의 여종이오. 그러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섬기는 일을 포기할 순 없소.” 위싱턴의 어머니는 위대한 소명 의식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나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소명 의식을 갖고 일을 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스스로 행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선 자리가 위대해지고 거룩해집니다.

하늘을 품은 마음 / 이중표

 

 

 
 
 

 

 

♥ 시니어를 향한 부르심

 

모든 직장인은 정년이 되면 일터를 떠나게 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은퇴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일에 대한 숙련도와 풍부한 인간관계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감을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마음이 시니어들의 표지이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후회함이 없이 쓰임 받는 것이다.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누린다(벧후 3:18). 그리고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닮아간다(롬 8:29). 지금도 소명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사용하시고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주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시니어를 계속 부르신다. 시니어를 찾고 계시는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국교회의 시니어가 구름떼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해 본다.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 부르심을 받은 자

 

하이든의 96번 교향곡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그의 연주회의 청중들은 하이든이 연주를 끝냈을 때 홀린 듯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천정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떨어져 박살이 났으나 객석은 비어 있어 다친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기적이다"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하이든의 피아노소리보다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오늘도 구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생은 저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르심의 은총을 거역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인간을 유혹하여 멸망에 떨어뜨리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또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하나님의 선하신 축복을 잃지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아도 그때 그 당장에는 견디기 힘들어 불평도 하고, 너무 억울하여 좌절하고 낙심도 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고, 감사할 일로 바뀌어진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생활은 언제나 만사형통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이 시간 확신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는 자들이 되어지시기 바랍니다.

/조동천 목사

 

 

 
 
 

 

 

♥ 부르심

 

우리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없다. 부르심에 대한 유일한 확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진다. 오직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는 성령만이 부르심을 확증해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예들을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믿음은 소명을 낳는다. 역사상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한 소명을 위해 부르셨다는 믿음으로 사명의 동기를 부여받았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화재의 불길로부터 구조되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영국 교회에 ‘개혁’이라는 소명을 위해 주께서 자기를 살리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이 진정으로 소명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질 때,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오직 신앙만이 잠재력에 불을 붙일 수 있으며 삶을 극대화할 수 있다.

- 「비전, 그 신비로운 빛과 북소리」/ 이원설 외

 

 

 
 
 

 

 

♥ 부르심에 대한 응답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한 청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저도 이제부터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고 신앙의 연조는 얼마나 돼야 합니까 테일러목사는 청년에게 되물었다. 촛불은 언제부터 빛울 발합니까 청년이 대답했다. 그야 양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테일러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신앙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지식과 신앙연륜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훌륭한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신앙은 한 순간의 결단이다. 신앙은 부르심에 대한 거룩한 응답이다. 신앙은 내 뜻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그 분 앞으로 나아가는 엄숙한 행위인 것이다.

 

 

 
 
 

 

 

♥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

 

카톨릭 복음주의자 가운데 헨리 나우엔은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는 아주 유명해서 개신교인들도 핸리 나우엔의 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일생에서 1985년은 아주 중요한 해였습니다. 1985년 초에 불란서에 있었던 정신지체아들을 모아서 수용하면서 그들을 섬기고 양육하는 라르쉬라는 공동체에 한 지도자가

예일대학으로 헨리 나우엔 교수를 방문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부터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또 정신지체아들을 섬기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날은 그들이 사는 얘길 감동으로 받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다음에 이 공동체의 지도자로 있었던 장 바니에라는 지도자로부터 편지 한 장이 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자기의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아들의 수양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왔으면 좋겠다”는 글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엔 교수는 처음에 자신을 강사로 초청한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수련회에 가보았더니 “우리 수양회는 침묵 수양회입니다. 침묵 수양회(Silent Retreat)입니다. 이 수양회는 사흘 동안 열리는데 기도만 하고 행동으로만 사람들을 돌봐주고 섬기는 수양회입니다”라는 것입니다. 특이한 수양회를 참석하면서 헨리 나우엔 교수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헨리 나우엔 교수는 사흘 동안 아무 소리 안 하고 정신지체아들을 돌봐주고 발도 씻어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식사하고, 그들을 쳐다보면서 마음으로 기도만 하면서 돌봐주는 침묵 수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정신지체아들의 세계 속에 자기 몸으로 부딪히면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그들을 경험했습니다. 침묵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 또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함께 있어서 축복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우리 같은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주신다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그 당시 헨리 나우엔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하버드대학 교수로 이제 막 옮겨 한참 할 일이 많았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얼마든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데, 그 편지 한 장이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하버드대학을 떠나서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지도자로 나를 부르신다.’

그의 마음에 자꾸 그런 부르심이 느껴져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그는 매우 갈등했지만 주님의 강렬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5년 가을에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에 ‘데이브레이크 커뮤니티’(Day Break Community)라는 정신지체아를 위해서 새로 생긴 공동체의 지도자로 떠나갑니다. 그 곳에는 단 6명의 정신지체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 6명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일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상하다. 이것은 희생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뒤엎는 나의 새로운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일인가! 이상한 마음의 평안이… 이 놀라운 평안이여, 자유여, 자유여.’

그는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이런 놀랍고도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공동체에 와서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탕자였던 내가 오히려 집으로 돌아온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을 돕고 이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니다. 우리 공동체 6명 중 아담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는 정신지체아였지만 깨끗하고 투명한 영혼을 가졌다. 나는 그의 영혼과 부딪치면서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그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

나에게 붙어있던 찌꺼기, 그런 거짓된 위선, 가면, 이런 것들이 찢겨 나가도록 내가 섬기고 있는 아담이 내 영혼을 치료해주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그는 정신지체아들도 시간은 걸리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1996년 9월 21일에 헨리 나우엔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떠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1:18~19)

 

 

 
 
 

 

 

♥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험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갈 길을 분명히 정해 놓고 부지런히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갸륵한 뜻을 품고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갔던 길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뻔히 아는 길도 내가 가려고 할 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길로,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느낌이 날로 강해질 때입니다. 시대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만큼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을 하나님이 불러 맡기실 일도 다양할 것입니다. 이제껏 그 누구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하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험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젊은이들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만 믿고 나서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에 순종하여 한 평생 출애굽의 삶을 산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라

 

우리 모두에게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한 동일한 부르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이며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주님 자신을 얻는 삶, 알아가는 삶으로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방향, 신앙의 방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신앙의 방향은 애굽에서 시작하여 가나안까지 나아가는 여행이며, 자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것이며,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영혼이 깨어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교제하며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역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인생인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바르게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사람이 되면 성공인줄 알고 대형교회를 하면 성공인줄 알고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연약한 상태에 있으면 실패인줄 아는 가치관의 혼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바울이나 나사로나 요한이나.. 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찢기고 상하고 망하고 손해보고 버림 받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광의 영역,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이 제자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여행을 떠났으며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한 번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자의 부르심은 날마다 주님을 먹고 마시고 누리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는 주님과 같이 있고 집에 돌아올 때는 혼자이고, 다시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러 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든 순간을 주님과 같이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이 부르심의 여행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요? 이 믿음의 여행을 시작할 때 우리는 처음에 어두움의 가치관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이었습니다. 자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누가 우리의 자아를 건드리면 분노하고 변호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며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의 자아를 높여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즐거이 웃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우리는 겉사람이 후패해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며 의식과 가치관과 감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매트릭스의 세계에 속지 않고 세상의 뉴스에 좌우되지 않으며 자아의 영광에 취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죽는 삶을 사모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부르심의 여행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애굽에서 탈출하며 지금까지 그곳에 살았던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느끼게 됩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드디어 가나안으로 입성하며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는 주님을 아버지로 여깁니다.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훈련하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애굽적인 요소들, 자아중심적이고 세상적인 요소들을 불태우십니다. 인생의 채찍과 사람의 막대기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입성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연인으로 느끼게 됩니다. 하루종일 그리워서 눈물을 금할 수 없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연인으로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죄에서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며 천국의 실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 사소한 악들이 주님을 얼마나 슬프게 하고 가슴을 찢게 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고독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였었는지..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주님을 아프게 했는지.. 이제 그 주님의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됩니다. 죽을 지언정.. 주님의 슬픔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아름다우신 초청이 있고 가르치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아주 낮은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부르심에서부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부르심은 애굽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고 애굽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부르심은 거기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있어서 나보다 부모를, 자녀를 더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부르심에 온전히 따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전히 옛 사랑, 옛 애정, 옛 세상에 속하여 애굽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애굽에서 라암셋과 비돔을 건축하며 그것이 바로를 흥왕하게 하는 것인줄 모르고 이상과 비전을 좇고 그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형제냐? 자녀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주님보다 다른 애정을 첫 번째로 놓습니다. 아브라함 조차도 처음의 부르심에는 제대로 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들처럼 키우고 있었던 롯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도 처음에는 그 부르심이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막내동생인 하란은 일찍 죽었고 그리하여 아비없는 자식이 된 롯을 아브라함은 어릴 때부터 키워왔으며 차마 그를 내버려두고 출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그 혈연적인 애정은 그에게 고통을 주었을 뿐입니다. 가난할 때도 힘들었지만,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을 때도 그 관계는 오히려 더 분쟁이 되고 고통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처만 얻은 채 결국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어진 이후에도 롯을 통한 마음의 고통은 여전하였습니다. 롯은 죄악의 도시를 선택하였고 목숨을 건 아브라함의 중보로 인하여 롯은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지만 딸과의 부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모압과 암몬 자손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두고 두고 가시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비극의 흐름은 이어졌고 다윗이 밧세바 범죄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음란행위의 결과 솔로몬이 태어났고 솔로몬은 역시 음란문제로 넘어져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둘로 찢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그와 영원히 함께 하기를 원했지만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롯과도 다시 찢어졌을 뿐 아니라 영원히 하나가 되어야할 약속의 자손 이스라엘까지도 둘로 찢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할 때 모든 이들은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애정이 십자가를 통과하고 주님의 손에 놓여지지 않을 때,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우상으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을 때 그 사랑은 언젠가 비참한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사소한 불순종은 먼 훗날까지.. 비극적인 열매를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심에 불순종하고 있을 때.. 그것은 먼 훗날까지.. 우리에게 재앙의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너무나 가난합니다. 주님과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이 부족합니다. 교회는 많고 크고 신자들은 많지만 그들이 맺는 열매들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들이 맺는 것은 하늘의 열매가 아니라 땅의 열매입니다. 땅의 성공과 성취와 누림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고 세상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의 성공과 자아의 영광을 구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께 사로잡히는 이들을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영광이 많은 이들에게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놀라우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무서운 비극입니다. 부디 당신의 부르심을 따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내 백성아, 애굽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당신이 성장을 원한다면, 당신은 먼저 첫 번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떤 얽매임도 없이 주를 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중심, 당신의 심장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반드시 이것을 물어보십니다. 네가.. 누구보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심장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역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심장이 허해서 주님이 아닌 다른 위안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들은 타락에 빠지고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사역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주님을 연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녀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중요한 구조적인 문제는 유아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많은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열심으로 사역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와 똑같은.. 변화되지 않고 열매맺지 못하는 신자들을 양산할 뿐입니다.

아무나 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아들은 아직 사춘기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살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결정하는 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영혼의 감각이 깨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지식이 증가되어도 자기가 필요한 대로 이용을 할 뿐입니다.

세 살짜리에게 결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난감에 빠질 수 있을 뿐 진정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 영혼의 성장 프로그램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 대인관계, 만남, 헤어짐, 기쁨, 슬픔, 상처, 버림받음, 오해, 직장, 진로, 성취, 실패..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이 그러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애굽탈출과 광야의 훈련과 탈출을 위한 것입니다. 메시지의 습득과 깨달음, 영혼의 각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미션을 수행하고 이 순간의 가르치심과 부르심을 발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열매를 위하여.. 진정한 길을 위하여..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주를 따르고 순종할 때만이 우리는 자아와 세상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의 요구를 따라 가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성경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부르심과 지시사항을 발견하십시오. 신앙에는 아무런 테크닉이 없습니다. 오직 신뢰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부디 주를 따르십시오. 주님의 눈을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고 전심으로 자신을 향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방에 혼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방에 계십니다. 기도와 예배를 일요일,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이야기, 마음과 생각의 모든 것을 조용히.. 깊이.. 듣고 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주님을 따르십시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전심으로 주를 향할 때 당신은 주의 가까우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분의 손을 놓치지 말고 동행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동행하는 것을 몹시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비둘기의 소리가 들리는 구나.. 포도나무는 향기를 토하는 구나.. 나의 사랑하는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십시오. 그분과 함께 걸으십시오. 신앙이란 아름다운 여행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 순복함으로, 기뻐함으로.. 즐거이 따르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잠시도 그분의 손을 놓지 말고 걸으십시오.

동행하십시오.

여행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향기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누리고 경험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친절하며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나날이 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하고 친절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과 교제할수록 당신도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어가게 됩니다. 당신은 천국이 어떤 것인지.. 그 아름다움과 영광의 향취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맛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복음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날마다 걸어갈 때, 그것은 사나 죽으나 천국입니다. 가난하나 부하나 아프던 건강하던 간에.. 그것은 천국이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그 영광의 세계를 더욱 더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다양한 방법, 동일한 부르심

 

만약 여러분이 오직 자기 일에만 신경을 쓰고, 좋은 성적을 받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만을 위해 행동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라고 있으면서도 최신형 스포츠카를 살 만한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 어디인지 찾아 헤매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연못에 이와 같은 새로운 돌멩이를 던져 넣으신다고 합시다. “이것 봐, 친구. 난 네가 목회자가 되면 좋겠어.”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면서 “하나님, 지금 제정신이세요?” 하고 대꾸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눈송이와 같습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독특한 방법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한 가지 완벽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역으로 부르신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부르심이 이미 아주 크고 분명하게 다가와 그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간단 명료한 공식은 없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 「그가 쓰시기 편한 그릇」/ 더그 샘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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