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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대로 한 사람: 마 21 : 28 ∼ 32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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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아버지의 뜻대로 한 사람
본 문 :마태복음 21 : 28 ∼ 32

아주 옛날 마케도니아의 황제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사병 중에 알렉산더 대제와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명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졸병은 아주 문제가 많은 졸병입니다. 사고뭉치였습니다. 그래서 이 졸병의 잘못된 행실로 인하여 왕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되고 또 욕이 돌아가게 되곤 했다고 합니다. 이 졸병이 실수할 때마다 상관들이 기합을 주면서 “이 알렉산더, 이놈!”하고 매질을 하니까 그 이름으로 인해서 왕에게 늘 불명예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 사실을 오랫동안 들어오던 황제께서 조용하게, 은밀하게 막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침, 그날도 이 사병은 술이 만취되어 주변의 물건을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어서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알렉산더 대왕 앞에 벌벌 떨며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묻기를 “자네 이름이 분명히 알렉산더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저의 아버지가 제 어렸을 때부터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알렉산더가 분명합니다.” “자네의 그 이름 때문에 내게 누(累)가 돌아오고 내 이름이 욕되게 될 때가 많은가 보더군.”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네게 명령을 한다. 네 이름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거든 행실을 바꿔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바꾸든지 그래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서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합니다. 뭐, 어렸을 때는 그렇다 하더라도 또 처음 믿을 때는 그렇게 여유 있게 생각해 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에 합당한 인격, 합당한 성품, 합당한 생활철학, 합당한 가치관, 합당한 행위를 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인격으로 성숙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신분이 있고 행위가 있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될 줄로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게 쉽게 대답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아들에게 가서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이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 해야할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들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가겠다 하고 안가고 하나는 안가겠다 하고 가고, 이 둘 다 좋지 않습니다.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겠습니다”하고 가는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 아들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셋째아들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정말로 합한 그런 아들은 없습니다. 이미 없습니다. 이미 망가졌습니다. 이제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라도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둘째아들이, 그 둘째아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현대인들을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맏아들 다분히 처세적입니다. 그의 맹세는 허상입니다. 체면이고 위선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불편하게 해드리지 아니하려고 “네”하고 대답합니다. 아주 공손하게 말입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지극히 처세적입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좋은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순종하였습니다. 말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형식적으로, 예절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아마, 누가 묻는다면 대답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노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릴 수가 없어서 간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겠지요. 이렇게 예절적인 효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면서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봉사한다고 하나 말뿐입니다. 준다고 했지만 무엇을 준다는 말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저 허세와 허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는데 다 된 것처럼 적당히, 적당히 넘어가면서…… 훌륭한 것 같으나 실상이 없습니다. 내실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 많은 날, 봉사한다고 했지만 여러분, 심판대 앞에 서서 물어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봉사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그 많은 날 간다 간다고만 했지, 간 일이 있느냐고, 한다 한다고만 했지 한 일이 있느냐고, 항상 맹세하고 결심만 했지 무엇을 했습니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피터 드러커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가 있습니다. 경영학자이며 미래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지금 93세입니다. 작년에 유명한 글이 나왔었습니다.
어느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선생님께서 쓰신 사십 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좋은 책이 어떤 책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피터 드러커가 대답하기를 “다음에 쓰는 책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92세 때. 그런데 지금 93세인데 방금 나온 책이 있습니다. 『Next Society』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미래를 내다봅니다. ‘먼저 가보는 미래’를 말했습니다.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하고 93세에 해박한 노교수가 앞을 전망해봅니다. 앞으로 확실한 것은 지식 근로자가 노동력 근로자를 우월했습니다. 지식의 세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쉽게 이동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젠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식이 제한 없이 마음대로 오고갑니다. 적어도 지식의 세계에서는 국경이 없는 세상이 된다. 그렇습니다. 국경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국경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육개방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에 상승이동을 해서 신분상승으로 말미암아 종래의 질서가 곤두박질하고 깨지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020년이 되면 이제 소위, 물건을 만드는 제품생산적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인구의 7%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높은 지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만의 세상이 됩니다.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주 혼란해집니다. 조금, 100년 전만 돌아가 보아도 공부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하고 권세자가 하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나 공부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만 공부시키고 딸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형님이나 하고 동생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다 공부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우수한 사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대로 신분상승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래의 모든 질서는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예전에 저의 아버지가 저를 가르치시면서 아무하고나 놀지 말고 모든 사람하고 화해하지만 가려야 한다고, 그것은 아버지께서 잘못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을 가르쳐주시는데 5성을 가르쳐주시고 “이것은 상놈이다, 이것은 백정이다, 이런 성을 가진 사람하고는 놀지 말아라”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니까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상놈들이 장관 되어 있었습니다. 재벌도 되고 무엇이든 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보면 기절할 노릇입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 이게 말세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면 말세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혼란해지고 맙니다. 위계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것은 인정을 해야합니다. 붙들고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전공을 쉽게 얻어서 쉽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쉽게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주기가 더욱 짧아집니다. 하루아침에 재벌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존경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감옥에 갑니다. 이 난리를 치는 통에 결국에는 불안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믿어볼 것이 없습니다.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안정이란 없습니다. 신분에도 없고 권력에도 없고 재벌에도 없고 지식에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옛날 생각대로 가지고 있다보면 어쩌면 기절해서 죽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런, 세상이 있는가!”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봉건문화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다가올 때에 이것을 감당하지를 못해서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신 분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둘째아들을 좀 볼까요? 이 둘째아들은 아주 정직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무슨 자기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가 본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니까 “안가요” 그랬습니다. 정직하지 않습니까? 또 정당하기도 합니다. 안가겠다고 말하고 안가지 않았습니까?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아들입니다. 그러나 문제 있습니다. 이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메타노이오입니다, 회개입니다. 뉘우쳤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총주제요 핵심이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생각의 발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가 해야합니다. 나는 내 할 일 합니다” 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고 안 갔으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했던 일이고 나는 정당하다고 했지만 아니,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나만 생각을 한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 에고이즘, 에고이스트, 에고센트릭, 자기중심적이 생각이었다. “아, 그게 아니지” 뉘우쳤습니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못 바꾸면 이 세상에 못삽니다. 제가 요즘에 결혼주례 할 때마다 종종 그 이야기를 아주 심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혼부부들이라던가 결혼한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그 말씀 두고두고 진리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래 재미가 나서 또 합니다. 그게 무엇인줄 아십니까? 밥투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하지 말아라, 그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만 잊지 말아라.” 신랑보고 이야기합니다. “압록강을 건너가면, 중국에 가보니까 13억이라고 하는 엄청난 인구가 산다. 그런데, 그 13억 인구는 전부 남자가 밥을 한다. 알았냐?”하고 꼭 확인을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바로 뒤에 있는 시어머니 보고 제가 이야기를 합니다. 시어머니 정신차리라고. 이제 이 아들이 장바구니 들고 따라다닐 거요, 자신이 부엌에서 일 할거요. 그럴 때에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럴 수 있느냐?”라는 그런 말을 하지도 말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못산다고 말입니다. 알았습니까?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직장을 그만 두셨습니다. 그리고 살아야 되는데 그 부인이 직장에 나가십니다. 살아야겠으니까. 그 부인이 직장에 나가고 남편은 직장을 못 나갑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부엌에서 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다 만들어 놓았더랍니다. 생전 처음 부엌에 한 번 나와 본 일이 없는 경상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밥을….. 부인이 깜짝 놀라서 “여보, 죄송하고 미안해서… 어떻게 당신이…” 그러니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동안 당신이 나를 위해 한평생 일했는데 이제 내가 오늘 당신을 위해 밥을 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없잖아?” 그분 괜찮은 남자입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생각의 전환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둘째아들은 안 간다고 했습니다. 안갈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뉘우치고 갔다. 뒤에 뉘우치고 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결국은 뉘우침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얼마나 생각을 바꾸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발상의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까? 내 뜻에서 하나님 뜻으로,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유명한 버나드 로너간(Bernard J.F. Lonergan) 이라고 하는 신학자의 Method in Theology 라고 하는 책에서 그럼 회개란 무어냐? 세 차원에서 오는 것이다. 첫째, 지성적 회개가 있습니다. 깨달음,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도덕적 회심이 있습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이 소중하지 않아, 이것이 소중합니다. 선과 악의 가치관을 바꾸십시오. 좋은 것과 나쁜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겨서는 안 되는 것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도덕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유명한 무디 선생님에게 어떤 짓궂은 교인이 찾아와서 목사님이 읽으시는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성경책 오래 된 것 하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책은 다 헤어졌지만, 몇 번 몇 번 고쳤습니다만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낡은 성경책을 보기를 좋아하는데, “목사님의 그 낡은 성경책, 그것을 보고싶습니다.” 목사님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줄치고 여기에 마크하고 여기에 글을 써놓고 성경책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런데 가끔 보니까 무어라고 쓰여있느냐 하면 “T.P.”라고 써놓은 것이 많았습니다. T.P. 큰 글자로 T.P. “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교인이 물었더니 무디 선생께서 “Tried. Proved.” 내가 이 말씀을 듣고 보고 생활 속에 실천을 하고 그래서 이것이 진리임을 확증했다고. 시험해보고 입증한 것이라고, 내 생활 속에서 입증한 것이라고. 여러분,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생활 속에서 입증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얼마큼 순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성전을 깨끗이 하게 될 때에 제사장들이 우르르 나와 도전적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데 놀랍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살아남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당시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 제사장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이렇게 말하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왜? 너희는 뉘우침이 없고 위선에 빠져있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세리와 창녀이지만 뉘우침이 있다. 마태는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다. 삭개오도 뉘우치고 내 제자가 되었느니라. 저 창녀도 뉘우치고 제자가 되었지만 너희들은 끝까지 뉘우칠 줄을 몰라. 그런 고로 창녀와 세리가 너희 제사장들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얼마나 뉘우칩니까? 계속적으로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평생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라도 오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창기냐 세리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뉘우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순종하는 것 같으나 순종함도 없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지도 않고 항상 마음에 결심을 하면서도 실천이 없는 그런 많은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주여, 바라는 것은 이제는 깊이 뉘우치고 아버지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그런 삶으로 이제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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