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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 4: 1∼ 8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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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본 문 :에베소서 4장 1절 ∼ 8절

예일대학의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로버트 J. 스타인버그(Robert J. Steinberg)라고 하는 교수님의 저서인 Successful Intelligence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유명한 저서 속에 나오는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똑똑이와 똘똘이가 있었습니다. 똑똑이라는 아이는 학교에서 최우등을 하는 아주 똑똑한 아이입니다. 아주 공부를 잘하는 그런 아이고 똘똘이라는 아이는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이고 사실은 말썽꾸러기 아이입니다. 이 두 친구가 같이 산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산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똑똑이가 호랑이를 딱 보는 순간, 똑똑한 머리로 계산을 했습니다. “호랑이가 250밖에 있다. 시속 50로 달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17.88초에 다가올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죽는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고 똘똘이는 운동화 끈을 풀어서 다시 꼬옥 매고 있는 것입니다. 똑똑이가 말했습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네가 뛰어 봤댔자이지 어떻게 호랑이보다 빠르게 뛸 수 있겠느냐?”하고 말을 했더니 똘똘이가 씨익 웃으면서 한마디를 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너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거든.” 알아들으셨습니까?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과 똘똘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진리 적용 능력이 없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들을 어떻게 생활 속에 옮길 것인가? 특별히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대처해야 하느냐, 하는 그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있는 한마디가 생각이 납니다. 사자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토끼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숲 속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죽는다.” 그러니까 토끼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굴려서 그 곳에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고 사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놓고는 토끼보고 하는 말이 “내가 몹시 배가 고픈데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의리 없는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죽을 것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도 된다 안 된다는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여우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여우가 지혜를 내었습니다. 사자보고 “사자왕이여, 이 토끼가 임금님을 구원해주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 사자가 함정으로 풍덩 들어가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지” 그랬습니다. 여우가 “그럼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 라고 한 후에 “토끼야 가자”하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래성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도대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제가 북한 평양을 가는데 열 한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여러 사람이 다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갔다오신 분들의 이야기가 너무 힘들더라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계속 감시를 받고 잠깐 밖에서 산책을 하려해도 안 된다고 하고 감옥처럼 불안하고 불편하다고 “그렇게 불편한데 왜 평양에는 자주 가십니까?” 라고 묻는 말에 저는 “당신과 저는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 갈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한에 가보면 내가 거기서 태어났고 자랐고 또 거기서 감옥에도 가 보았고 매도 많이 맞았고 또 젊었을 때이지만 광산에 끌려가서 공사 일을 했습니다. 그 곳은 그저 집을 엉성하게 지어놓고 이부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흙밖에 없는데 지푸라기를 놓습니다. 외양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지푸라기를 가득 놓고 그 위에서 잡니다. 오물만 없을 뿐이지 지푸라기 위에, 외양간 같은 데서 입은 채로 누웠다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잠입니다. 이러면서 하루에 수수밥 두 끼를 조금씩 먹고 일을 해야 되는데 여기서 일을 하다가 여기에서 죽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게 참 좋은 기회를 주어서 탈출을 했고, 북한을 탈출해서 남쪽에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서 내가 지금 다소나마 저들을 돕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합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만일 북한을 떠나지 못했다면 지금 저 처지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저 중에 내가 하나일 것이다’ 생각하면 깜짝 놀랍니다. 나는 북한에 내릴 때부터 사실은 마음으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와 감격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방문하고 옵니다. 왜요? 내가 피난을 못 갔으면 저렇게 되었겠구나…”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제가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지금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지금 불과 2∼3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요새 집에 가도 감사하고 직장에 가도 감사하고 교회가면 물론 눈물로 감사합니다.” 왜 그러느냐?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생각한대요. “내가 만일에 예수를 안믿었다면 첫째, 내가 저 여자하고 안삽니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집안은 엉망이고 사업은 망했을 것입니다. 뻔합니다. 이것을 틀림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좋은 가정을 이루고 이렇게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게.” 감사 감격한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본래성을 잊지 마십시오. 혹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꿈에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교회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천적으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악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이 부르심이란 것은 우리의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았다,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 부르심 속에 삶의 의미가 있고 부르심 속에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습니다. 과거의 청산이 있고 미래를 향한 약속이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현재라는 시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압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그 과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설대로는 갈대아 우르는 우상이 많은 도시요, 그 아브라함의 아버지도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그럽니다. 만들어서 그 우상을 파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집의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과거로부터 떠나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라. 가라. 자, 이 부르심 속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약속의 땅을 지향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러나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 생활에 종종 휘청휘청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면서도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넘어지기도 하고 저렇게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지요. 애굽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애굽에서 사백년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 말은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이 이스라엘 전 인구가 노예생활 중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사백년을 산 사람을 거기에 없습니다. 노예생활에서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갈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부름 받은 백성이요 부름 받은 선민입니다. 이제 어떻게 되야 하겠습니까?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야겠는데 믿음으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생각하자면 노예로 살다가 죽을 팔자인데, 안 그렀습니까? 자유의 몸으로 광야에 와서 죽어도 행복한 것이죠. 죽어도 만족한 것이죠.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도 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도 했습니다. 결국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책망하셔서 광야에 엎드러져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죄목이 무엇이냐? 하나입니다. 원망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현실 속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르셨고 지금 내가 사는 생활도 부르심의 생활입니다. 부름 받은 생활이기 때문에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현실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언제인가 한 번 텔레비전 방송을 보니 95세된 노인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아나운서가 집요하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무엇이십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빙글빙글 웃으시면서 딱 한마디를 하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습니다. “마누라 속썩이지 말아. 그래야 오래 살아.” 알아들으셨습니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 부인이 잘났던 못났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입니다. 남편이 맘에 들던 안 들던 모든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부르심의 생활입니다. 여기에 학술적으로 말하면 Effective Calling이라는, 효과적 부름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름에 합당한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다니는 도망자의 생활을 사십년을 했습니다. 나이 팔십세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인입니다. 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오로지 부르심만 듣고 부르심에만 응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대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자,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지요 세리 마테를 부르셨지요 주의 종들을 부르셨지요 특별히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아,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다메섹 도상에서 강제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여 부름에 합당하게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모세, 혹은 믿음의 조상들뿐이겠습니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또 미래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의롭다 하시고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부름 속에 내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생활을 하면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제가 결혼주례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득이 손님으로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계셔서 주례자로서가 아니라 손님으로 참석했다가 정말 일생 다시 보지 못할, 또 보아서는 안 될 그런 사건을 보았습니다. 시간이 되었는데 신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십 분이 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술렁술렁하더니 손님들이 다 가버립니다. 그 서있는 신랑이 너무너무 안쓰러워서 저는 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마지막에 신랑이 “미안합니다” 인사 한마디 하고 저도 돌아왔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신부에게 옛날 애인이 있었답니다. 신부 애인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거 청산이 잘 안되어서 미장원에서 화장을 하고 나오는데 납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결혼식장에 들어와야 될 시간에는 벌써 기차를 타고 대전을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여러분, 과거 청산 없이 새살림을 꾸미려다가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으면, 이제 과거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어떤 모습이던 간에 묻지 마세요. 잘낫든 못낫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과거에 속한 옛사람의 모습을 깨끗이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야 부름에 합당한 생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고 곧 감격하는 마음이고 부름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나를 부르셨는가,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 주어진 신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얻은 신분입니까? 어떻게 공부한 것입니까? 어떻게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 귀한 은혜를 입고 헛되이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소중히 여겨야 하고 부르심 속에 감취어진 약속된 미래를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대로 겸손하게 온유하게 사랑으로 살 것이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존 그레이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삼십년 동안 인간관계를 연구하고 상담하고 그리고 나서 간증 삼아서 쓴 책입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눈에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언제나 상대방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남자가 여자보고 남자가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자가 남자보고 여자가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론은 간단합니다. 남자는 남자로 사랑하고 여자는 여자로 사랑을 할 것이고,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I love you, You love me, 하루종일 해도 안됩니다. 하나되는 길은 오직 하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목적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하워드 크라인벨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란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다. 여러분, 오케스트라 구성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관악도 있고 현악도 있고 타악도 있고 여러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수백 개의 악기가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다같이 악보에 충실해야되고, 다같이 지휘자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휘할 때 지휘자는 절대군주입니다. 여기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나팔을 잘 분다고 혼자서 소리를 크게 내었다가는 일어서서 나가야합니다. 혼자서는 잘하지만 오케스트라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 사람이 여러 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오로지 지휘자를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잘난 사람 때문에 말썽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케스트라가 되야 하니까, 화음이 되어야 하니까.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작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케스트라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니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다. 하나다. 그런데 본래도 하나요 미래도 하나다. 우리 나라에는 참 고질적인 병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관 속에. 그것이 무언가 하면 반상 계급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반, 상놈 뭐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전부가 ‘나는 양반이다’ 그럽니다. ‘너는 상민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와 너는 같은 사람이긴 하다만은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뿌리가 다르다. 조상이 다르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꼭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뿐입니까? 죽은 다음에도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고 망부석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고. 세워봤댔자지 속에서는 썩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과거도 다른 것이 없고 앞으로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다는 것만 알면 간단합니다. 부부간에도 보십시오. 같은 것이 대부분이고 다른 것은 조금입니다. 같다는 동질성을 극대화하면 간단히 해결이 되는데, 근본적으로 다르고 교육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눈 높이가 다르고… 다르긴 무엇이 다릅니까? 많이 알면 무엇합니까? 좀 있으면 치매에 걸리고 말 것인데.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식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고 건강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닙니다. 지금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므로 부르심에서 하나이고 약속에서 하나입니다. 과거도 하나이고 미래도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 벌써 하나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너희는 깨닫고 지켜가라, 그 말입니다. 본래가 하나입니다. 앞으로도 하나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라.” 오늘도 다시 말씀하고 계십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한 일원이 되게 하시고 한 식구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섬기며 살게 하시고 부름받은 사람으로 부름 받은 운명의 길을 그 소망의 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하오니 부르심에 합당한 생을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시고, 주의 부름에 조용히 순간 순간 응답하며 확실하게 부름에 합당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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