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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요 18:38 하-19:9)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지금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을 공부하는 중에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되어진 사건이지만 그림을 그리듯이 한번 머리 속에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은 그 당시 로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형편으로, 빌라도는 중동지구를 총 관장하는 로마의 대표자인 총독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 본부는 가이사랴 빌립보인데 유월절을 맞이하여 이 근방에 소요가 있을 것 같다는 정보가 있어 임시로 본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 소요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으로 지금 재판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아다가 죽여달라고 청구한 사람은 빌라도가 아니라,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가야바의 명령으로 그의 군사들이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것입니다. 넘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자기들로서는 사형집행을 할 수가 없으므로 빌라도에게 넘겨서 그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모순점이 있음은 앞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관정 안에 계시고 군중들과 대제사장들은 밖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므로 예수를 관정까지 끌고 갔지만, 자기들은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께 질문할 때는 안으로 들어가고, 백성들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또 밖으로 나오고 이렇게 들락날락 하며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본의 아니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안에 있는 로마 법관들과 밖에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을 세워 놓고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하는 그 상황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사실 자기 입장에서 예수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이 재판을 기피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의인인지 죄인인지 자기로서는 잘 판단할 수도 없거니와 귀찮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집행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으므로 자기 입장만 모면하려는 자세를 취합니다. 빌라도가 저지른 잘못을 몇 가지로 추려 보면, 첫째, 그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자는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는 가능하면 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기피하다가 마지막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흉이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 특권, 지위, 능력을 기피한 결과가 이토록 엄청난 죄를 낳게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좀 안스러운 생각까지 듭니다.
둘째로, 그는 예수님께 죄가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 18:38 하반절)고 여러 번 죄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일 죄인이라고 끌고 왔지만, 빌라도가 여러모로 심문을 해본 결과, 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설사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 해도 그것을 가지고 왜 유대 사람들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가야바가 음모해서 예수를 끌고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매질을 합니까?(요 19:1) 여기에 빌라도의 모순이 있습니다. 죄가 없으면 무죄 석방을 하고, 죄없는 자를 체포해 온 그 사람들을 죄인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을 매질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빌라도는 정치인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리나 공의보다 여론을 더 중시하여 죄인들의 편에 섰습니다. 얼마나 모순덩어리입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로마인이었다면 매질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가 옥문이 열릴 때 나오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행 16:37-40)석방될 때 바울이 큰소리를 치니, 간수와 재판관들은 그가 로마인인 것을 알고 벌벌 떨며 안녕히 가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 사람인 경우, 재판하지 않고서는 매질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확정하고 나서야 때리든 죽이든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하는데, 지금 예수님께는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매질부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의를 집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군중에게 아첨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가가 군중에게 아부하면, 그 정치는 끝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백성들의 소요를 막아야 한다는 점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수도 공사도 잘못했고 망대도 무너지고 이곳 저곳에서 간간이 소요도 일어나 로마 정부에서는 빌라도의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으니, 지금 유대인들이 하자는 대로해서 우선 안전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정이나 통일이 먼저가 아닙니다. 의와 진리가 먼저이어야 통일도 되고 안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일을 앞세우며 타협하자면 가능한 일입니까? 무엇이 우선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셋째, 빌라도는 예수가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도대체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보라 이 사람이로다" (Behold this Man) 라고 자기로서는 도저히 죄를 찾지도 못하겠고 예수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 군중 앞에 내 놓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책 중에 유명한 것으로 (Behold this Man) 이라는 책이 있는데 빌라도가 한 말을 그대로 제목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는 무슨 말입니까? 빌라도의 생각에는, 예수가 죽은 자를 살렸다는 놀라운 소문과 5천 명을 들판에서 먹였다는 소문 등으로 성 안팎이 떠들썩함을 알고 있는데, 죽음 앞에서는 왜 이렇게 말 한 마디 없이 초라하게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어 봐도 시원한 대답이 없으니 빌라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공부하겠습니다만 빌라도는 예수께 내가 너를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으니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8절에 보면 심문을 하는 빌라도가 오히려 두려워하더라고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가 예수님의 침묵의 신비에 압도당하여 은근히 두려움마저 생긴 것입니다.(요 19:8)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이나 군중들의 떠들썩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예언의 말씀을 생각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밖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불쌍한 베드로도 생각하셨으리라 믿어집니다. 예수님은 배반한 제자들과 만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생각하고 계시니, 빌라도의 질문이나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소리에 마음이 쓰일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침묵의 의미입니다. 반드시 말을 해야만 대답입니까? 침묵은 무서운 대답입니다. 말이 되지도 않는 빌라도의 질문에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들을 것이다"라고 한 말씀하시고는 그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그에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에서 신비로운 의미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침묵은 오히려 빌라도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1년을 기도했습니까, 아니 10년을 기도했습니까? 만약에 응답이 없으면 다음 두 가지인 경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소원을 바꾸어라, 너의 청구서가 잘못 됐다" 하는 응답이며, 또 하나는 "좀 더 기다리라"는 응답입니다. 꼭 말씀이 있어야만 응답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침묵이 의미하는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의 침묵에서 위엄과 권세를 보았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 것입니다.
넷째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정말 놓아 줄 생각이 있어 애를 썼음을 어느 복음에서나 다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당한 방법을 쓰지 못했습니다. 놓아주려면 가야바를 불러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한 다음, "이는 죄가 없으니 무죄다"라고 선언하고, 앞으로 예수께 손을 대는 자는 로마법을 어기는 일이니 알아서 하라는 정도의 적극적인 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졸렬한 방법을 썼습니다. 유월절 때마다 백성들이 원한다면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무죄 석방하는 그런 전례를 여기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유월절에는 누구를 특사 하면 좋을까를 군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빌라도의 생각으로는 예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인 바라바와 대조해서, 예수가 당연히 풀려날 수 있으리라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의외로 바라바를 놓아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자기 함정에 빠집니다. 죄인 아닌 자를 일단 죄인으로 만들어서 특사하겠다는 그 의도가 잘못되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선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꾀에 스스로 말려든 격이 된 것입니다. 의로운 목적이었다 해서 졸렬하고 불의한 방법이 통하리라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정당한 방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두 주인을 섬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지위를 지키려다가 하나님의 공의를 그르쳤고,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그르쳤습니다. 죄없는 예수인 줄 알면서도 매질을 했고, 가시관을 씌웠으며 홍포를 입혔으며, 조소를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까지 지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게 됩니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기피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래서 무책임하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일생 일대의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 : 19에 보면, 빌라도가 재판을 하려는 순간에, 그의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꿈이야기를 하며 재판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아내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부인의 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2천 년 동안 수억 만의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를 말하지 않습니까? 어찌보면 빌라도에게 이 구절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야바에 의해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죽이도록 넘겨주었는데 빌라도가 다한 것처럼 사도신경에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자기를 살리려다가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든 의인이든 상관할바 아니고, 수단껏 자신을 지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베드로도 우선 살고 싶어서 예수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다가는 두 주인에게 다 배신당하게 됩니다. 오직 한 주인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명예와 재산 등 나를 완전히 포기할 때 비로소 예수를 높일 수 있고 그와 함께 나도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는 나도 죽고 그리스도도 배반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다시 한 번 예수께서 침묵하시는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관정 안에는 예수를 세워 놓고 밖으로는 가야바와 군중들을 놓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초조하고 불안한 가운데서 자신을 살리려고 애쓰는 비겁한 빌라도의 모습을 보세요. 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경우가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을, 진리보다 여론을 더 의식하며 살지 않았는지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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