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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그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 : 5 ∼ 12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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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그 누룩을 주의하라
본 문 :마태복음 16 : 5 ∼ 12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가 들에 매어놓은 남의 황소 한 마리를 훔쳐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발각이 되어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말하기를 “이 사람아, 벌건 대낮에 남의 황소를 훔쳐? 어떻게 그래가지고 그게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하고 물었더니 도둑이 하는 말이 “나는 들에 나갔다가 고삐 하나가 땅에 놓여있는 것을 끌고 왔는데 와보니 소 한 마리가 따라오더군요. 난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요”라고 능청맞게 대답을 했습니다. 경찰의 대답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 우리도 자네 손만 묶어 가지고 왔는데 자네는 왜 따라왔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행동이든지 반드시 거기에 의지가 있고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행동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부지중에 혹은 몰라서 혹은 무의식중에 이런 말은 합니다만은 알고 보면 무의식도 의식적인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행동만 남고 의식이 뒤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역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어디까지냐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깨닫느냐 거기에 사람된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학 이론에 “전파론” 이라는 이론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유형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는 변화를 즐기며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항상 창의적인 것으로 치닫는 그러한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변화를 즐기는 사람, 다시 말하면 파이오니아쉽(Pioneership)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든 사람 중에 5%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타인 인식형입니다. 아주 소극적이라서 변화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하는 것까지 생각하다 보니 진정한 변화를 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20%가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추종자 유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조건 남이 하는대로 따라갑니다. 남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남이 입은 옷을 내가 못 입으면 속상합니다. 남이 입은 대로만 입으면 그럼 내 마음은 행복합니다. 남이 하는 일을 못 따라 하면 마치 그것을 악처럼 생각하고 남이 하는 일대로 따라하면 그것은 선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사는, 완전히 타인 추종형, 이런 형은 무려 70%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나머지 가운데는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철학, 생활 태도·방법이 무너지면 인생이 망가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고집불통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문제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들으면서 기억하고 기억이 축적되어서 논리적으로 정돈해서 이해가 됨으로써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이 지혜를 주고 지혜가 믿음을 주고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생활에서 생명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듣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 보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쉽게 기억하는 두 사람, 대표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근처에 우물가에 앉으셨다가 그 수가성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을 때, 그에게 귀중한 아주 신비로운 차원 높은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을 듣고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그런 물을 나 좀 주어서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세요.” 참 맹추같은 여자입니다. 이거 참 힘든 사람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또 유식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바리새교인이요 당대 종교 지도자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를 맞아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거듭나야겠다. 중생해야겠다”라고 말씀했더니 이 사람 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아니 젊으면 다시 들어갑니까? 어찌 이렇게 맹추같은 소리를 하노.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랍비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느냐?” 정면적으로 충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이 모두가 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에 집착을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왜 기억지도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떡 다섯덩이로 5000명. 또 떡 일곱개로 4000명.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사건인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깨달음도 많고 느낌도 많고 감격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격을 가진지 불과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지금 어떤 복음에는 다음 날로 되어있구요, 며칠 후 정도밖에 안되요. 그런데 배를 타고 지금 가십니다.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누룩”하고 나올 때에 ‘아이쿠, 빵이 없구나’ ‘아, 우리가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서로 시비를 벌였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서로 변론했다는 말입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아마도 그랬겠지요. 베드로가 그러니까 가롯유다가 회계 아닙니까? “아, 당신이 수제자로 ‘준비하라’ 했으면 내가 했을 것이 아닙니까?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왜 나에게 시비냐”는 것입니다. 서로 의논을 하게되고 변론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본 사람이 또 5000명을 먹이는 그 귀한 역사를 나타낸 그 하나님의 아들이 눈앞에 계시는데 아, 그 앞에서 빵이 없다고 시비하게 되었습니까 지금?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이적에 대한 이해는 삼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도 아주 고맙게 세단어로 구별되게 나타납니다. 첫째가 테라스입니다.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wonder라고 합니다. miracle, 기적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인간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한 일이 있을 때에 “이적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적은 많습니다. 오늘도 죽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그런 때에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이적하면은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중앙 의료원에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죽어서 시체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장례식을 하려고 냉장고로 갔더니, 냉장고가 꽉 찼습니다. 넣을 데가 없어서 내일 아침에 하나 뽑아서 장례식을 하면 그 때 그 자리에 넣기로 생각하고 그 냉장고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냉장고에 넣으려고 가보니까 살아났습니다. 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그래서 목사가 이미 되었고 병원전도를 위해서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기적이란 있습니다. 깜짝 놀라는 기적이 있잖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두나미스라는 것입니다. 다이나믹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두나미스란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pow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이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요 권능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메욘이라고 하는데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표적, 이렇게 번역하는데 이 말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적,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에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나타난 일이지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제 된 사건이지만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이지만 지금 새롭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인데 그것을 오늘에, 그 의미를 오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메욘, 표적 이해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남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몇 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표적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사람들은 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큰 능력을 보고도, 감격하고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떡 하나 없는 것 가지고 시비를 벌이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참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조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생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고, 떡을 보시면서도 생명에 대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40일 금식한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우리는 떡을 대할 때마다 생명을 생각하고 생명의 주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말이 또 문제가 됩니다. 신앙 없는 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세 황금 문”이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에 대해 충고를 합니다. 적어도 말을 할 때에는 이 세가지를 생각하고 말하라.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실 된 참말인가’ 하고 물어봐야 됩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는 남의 말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런다더라” “그렇대” 혹은 “누가 그런대” 이 정도로 말을 하는데 이걸 잊지 마십시오. 내 입으로 말하는 한, 나의 말입니다. 남의 말이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Quotation is nothing, 아닙니다. 남의 말이지만 내가 말하면 내 말입니다. 이제부터. 내게서 듣는 사람은 내 말로 듣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말은 참 조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 혹, 그 프로그램을 보셨습니까? 연예가 중계. 제가 그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봅니다. 그런데 연예가 중계가 나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에 요 몇 년 몇 달 동안에 소문이 났던, 인터넷에 뜨고 신문에 나고 했던 그런 이야기들을 전부 확인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연애한다더라 해서 물어봤더니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한다더라 해서 물어보니 “우리가 왜 이혼합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고 하는데 안 먹었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뿐입니까? 와, 놀랍습니다. 어느 가수 에이즈 걸렸대, 그래요. 그 아이들까지 걸렸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아 이거 야단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그래서 정말 그런가 했더니 어제 보니 멀쩡합니다.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합니다. 자, 그러니 연예인들 고생을 많이 합데요 정말. 그 연예인 된 죄로 말야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에이즈 걸렸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엉뚱한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확인을 하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는 얘기를 보았습니다. 결론은 무엇인가요? 여러분,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것이 망조입니다. 연기 납니다 요즘에는. 나고 말고요. 왜 그 생각을 못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에는 참으로 확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그 외의 말은 들은 말이라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해야 될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내가 할 말인가? 또 하나,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그것을 물어봐야 합니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제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기계체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철봉을 잘했습니다. 아주 썩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다 잘했는데 딱 하나,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대회전을 못했습니다. 그것을 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는 그것을 잘했습니다. 공부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서 탁 붙잡자마자 휙 돌아가는데 참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구경하던 친구 중에 하나가 입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표주박이 우물에서 깨지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돌면서도 그것을 또 들었습니다. 내려오자마자 “나 이거 하다가 죽으란 말이냐” 하더니 냅다 치는데요 저도 안 말렸습니다. 내키는 데로 때리라고. 참, 그거 입방아 못됐더라구요. 그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합니까? 위험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런 때에는 입이라고 잘 안 합니다. 그런 때는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말조심해야 합니다. 입이라는 것이 아무 때에나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고 다 말입니까? 진리야 진리입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할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물어 보십시오.
세 번째,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혹이라도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이 이 속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동기를 물어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가? 이 세 가지 문을 통과하면 훌륭한 덕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디트리히 본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은 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가? 라고 하는 논문에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감정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질투심을 유발해서 불평하게 만든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질투는 죄가 아닌 줄로 아십니다만 마귀가 작용을 합니다. 원망하게 만듭니다. 작은 일 큰 일에서 원망하게 만듭니다. 이 원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울증을 우리는 병이 아닌 줄로 착각을 합니다. 우울증은 불치병입니다. 무서운 병입니다.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애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셋째는 구원 신앙을 흔들어서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미 죄가 많다, 너는 끝장이 났다’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부정과 절망으로 유혹하다. 한번 들어둘 만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제자들, 어느 사이에 유혹을 받아서 방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보았건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감격도 없습니다. 그 능력도 잊었습니다. 오늘은 또 원망,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닫지도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어찌하여 서로 의논하느냐.” 바리새 교인의 누룩, 외식주의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비유해서 “누룩과 같다, 한 번 받으면 자꾸 퍼져나간다,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조심해라. 이 악한 교훈을 조심해라, 사탄의 역사를 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중요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어째서 떡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두 주일도 못 가서 원망을 합니다. 모처럼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죄목이 원망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원망하게 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원망하는 사이에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딱 붙들리는 순간 완전한 절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깨닫지 못하느냐? 깨달아야 되고 기억치 못하느냐? 여러분,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됩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했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살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하는 순간 오늘의 모든 문제가 시원하게 풀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능력으로 바꾸어집니다. 생명력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기억하고 그 기억한 바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해 보십시오. 밝은 미래가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저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또 새 은혜를 주시며, 또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또 다시 깨달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우리가 누리는 큰 기적을 순간순간 깊이깊이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기억하는 바대로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하고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 안에서 충실히 사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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