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제 목 :발걸음을 새롭게
본 문 :로마서 10 : 9 ∼ 15
근엄하긴 하지마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어떤 왕이 있었답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입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왕은 짜증을 냈습니다. 때로는 화를 냈습니다. 발에 먼지가 묻는다고. 그리고 거친 땅 때문에 발이 종종 상하게 된다고 투덜거리면서 늘 이렇게 불만스러웠는데, 급기야 이런 명령을 했답니다. “나라 전역을 쇠가죽으로 다 깔도록 하라” 하는 명령입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게 될 때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답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이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주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왕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소가죽으로 온 땅을 덮는다니요.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온 세상 소를 다 잡아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러질 마시고 폐하의 두 발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쇠가죽 두 조각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가죽으로 당신의 발을 잘 싸면은 다시 상처가 나지도 않을 것이고 먼지가 묻지도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리석은 왕은 “아∼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그게 구두의 유래랍니다. 여러분, 길이 좋아지기를 바랍니까. 그러지 말고 내 발걸음이 좋아져야 되겠고요 길이 새롭게 되기를 바라지를 말고 내 발과 내 발걸음이 새로워진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길을 걸어갈 때 보면 무거울 때도 있고 발걸음이 가벼울 때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같은 거리인데도 말입니다. 결국은 무거운 발걸음이라는 것은 내가 모르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낯선 길, 익숙하지 않은 길, 전혀 모르는 길을 갈 때에는 그 길이 얼마나 먼지요. 또 불확실한 길을 갑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분명치 않고요 또 앞에 어떤 일을 만날는지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발걸음이 무겁고 게다가 자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면 이 발은 이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해야 하는 외로운 길을 갈 때 그 길은 점점 어렵고 무겁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가벼운 발걸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최종 목적지를 보장받고 가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그 Final Destination, 마지막 종착지가 분명합니다. 확실한 목표를 정하고 가고 있으며, 또 자유의지로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가는 길일 때는 가볍습니다. 또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의로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일은 더욱 가볍게 처리할 수가 있고요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누군가 사랑하는 자와 동행하고 있다면 먼 길도 가깝고 또 긴 시간도 짧게만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걸음으로 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큰 보람을 알고 창조하며 그 길을 향하여 간다면 내 발걸음은 신바람 나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회 사제이면서 심리학자 이였던 헨리 나우엔이라고 하는 분이요 “영적 발돋움”이라고 하는, Reaching out이라고 하는 그런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Three moment of spiritual life 라고 하는 그런 주제 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되는데 그 성장하는 것이 마치 한 나무가 자라는 것과도 같다.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밑으로 뿌리가 자라야 됩니다. 위로 나무만 자라는 게 아니에요. 밑으로 뿌리가 충실하게 깊이깊이 뻗어서 자라고 나서 비로소 위로 자랄 수가 있는 것이죠. 그 밑으로 자란다는 말은 내적 성장을 말합니다. 스스로 내면적으로 깊은 인격의 성숙함이 있어야되죠. 그리고 옆으로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또 성숙해져야되고 그 다음에는 위로 자라면서 햇빛을 보고 위로 자라는, 하나님께로 향한 그런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성숙한 자 만이 성숙한 발걸음을 가지고 바른 운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아름다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하는 말입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 구절 구절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 이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조건 세가지가 있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그 말씀을 전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감화입니다. 셋째는 이것을 전하는 인격, 그 누군가가 전도해야 되는데 전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요소가 합쳐질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기 위해서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분이 있습니다. 고마운 분이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고 그가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역사해서 오늘 나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이 구원의 역사를 내게 전해준 분,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요새 우리는 앞에 그 월드컵이라고 하는 축구 경기가 있다고 해서 준비 중 입니다마는 원래 그 전의 이야기는 올림픽 경기가 아닙니까? 이 올림픽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 아덴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올림픽경기의 제 첫 번째 종목은 마라톤입니다. 지금도 시작도 끝도 마라톤이 중요한 겁니다. 자, 그런데 이 올림픽경기라고 하는 마라톤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 하면 그 유래가 그 옛날에는 전쟁이 많았어요. 한 번 전쟁에 나가면 1년 2년 동안 못 돌아 오는 거예요. 남편이 나가고 아들이 나가고 전쟁터에 나가는데 이제 요새처럼 통신 수단이 좋지를 않기 때문에 전화도 없고 편지도 없고. 그러니까 이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겼는지 패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소식이 궁금합니다. 그럴 때에 전쟁에 이겼다면 이겼으면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야 될 거 아니에요? 이겼더라도 지금 성내에서는 계속 걱정과 근심으로 지내고 있거든요. 이제 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전해야겠는데 빨리 전하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 편지를 가지고 승전보를 가지고 뛰는 겁니다. 아주 산과 길을 산 넘어 강 건너 뛰고 빨리 전하기 위해서 그 뛰는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올림픽 경기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전쟁에 이겼습니다. 이 이겼다는 소식을 가지고 지금 뜁니다. 그 뛰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겠어요. 이 사람의 소식이 전해질 때에 성문에 올라가서 “우리 나라 군대가 이겼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를 때에 온 성 사람들이 다 나와서 그를 맞고 얼마나 반가워하겠어요. 자, 이렇게 승전보, 기쁜 소식을 가지고 뛰는 그 사람의 발걸음, 그 마음이 가볍고 행복할 것입니까. 또 그를 맞는 사람들도 얼마나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올시다. 먼저는 이 복된 소식을 내 것으로 삼아야 되요. 이 복음이 남을 위한 게 아니에요. 먼저 이겼어요. 이긴 군인이 뛰는 거예요. 승리감에 취해서 만족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의 그 놀라운 영적 체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 감격을 가지고 증인이 됩니다.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 소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겠다. 이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달려갈 때에 그 사람은 이 거룩한 역사에 내가 쓰여진다. Employee, 쓰여진다고 하는데 대한 이 고용되는데 대한 기쁨이 있어요.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선발해서 나로 하여금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이 감격이 있는 거예요. 고용된 감격, 기쁨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그야말로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소식을 듣지 못해서 절망하고 이 소식을 듣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걸 생각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뛰는 거야.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엄청난 소식이 여기에 있지마는 전하는 자가 없다면 어찌 듣겠느냐. 듣지 못했다면 어찌 믿겠느냐 믿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받겠냐, 여기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요. 내가 누리는 이 기쁨과 감격을 저 사람도 누리고 내 기쁜 소식으로 인해서 오는 행복을 저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줘야하고 내가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들도 이 자유에 동참하게 해야겠다 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아가페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그래요. 이 마음이 있을 때만이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죠. 이 기쁨을 나 혼자서만 누릴 수는 없는 거예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더불어 기뻐하고 싶은 거예요. 그 찾아가는 그 모습입니다. 우리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 가는 겁니까? 때로는 나와 상관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Stranger, 낯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올시다.
초대교회에,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유무상통하며 은혜의 생활을 누릴 때에 어쩌면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버리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핍박을 주었어요. 야고보가 죽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큰 핍박이 있을 때 사람들은 다 흩어졌어요. 흩어져서 사마리아로 가고 다른 나라로 갑니다. 다시 말하면 난민이 되었다는 거죠.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난민이 복음을 전했어요. 그렇다면 복음 전하도록 그들을 난민되게 한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원치않는 사마리아 땅에 가게 했고 이방 땅까지 가게 한 거예요. 갈 수밖에 없도록 강하게 역사하신 것이죠. 자, 소식을 나 혼자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 누구에게 전해야 되요. 전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셨어요.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록 모든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주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유명한 학자인 하비 콕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Secular City라고 하는, 세속도시라고 하는 책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 책에서 현대인을 딱 두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요점이죠. 첫째가 뭐냐하면 익명성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서로 다 알고 지냈죠. 뭐 조그만한 마을에. 그래서 문을 잠그면 복이 안들어 온다고 서로 나무랬어요. 문 잠그면 안돼요. 다 열어놔요. 그리고 온 동네가 서로 알고 지내죠. 이 집에 숟가락 하나 없으면 저 집에 가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그러니깐 뭐 도둑질 할 수가 없죠. 모두가 다 알고 개방적으로 살았는데 요새는 세속도시라고 하는 건 그렇질 않아요. 문을 잠그고 살아요. 도대체 여러분 주머니 보세요 열쇠가 몇 개인가. 열쇠 꾸러미가 좌우간 이게 얼마나 큽니까? 잠그고 잠그고 또 잠그고. 자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거요. 그게 바로 마음을 잠근거나 마찬가지예요. 익명적이예요.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망교회 교인 많이 나오는 이유가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래요. 여긴 나와도 누가누군지 모르거든요. 묻지도 않고 인사도 안하고 그거 좋더라 이래요. 자꾸 찾아오고 물어보구 뭐 그러면 ‘귀찮다 야. 골치 아프다’ 그럴까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현대인은 자기를 폐쇄하고 삽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 보고도 좀 앉아서 얘기하면 “무슨 얘기하냐” 하고 물어보세요. 아이들 대답 안합니다. “알 것 없어요” 그러죠. 그런 세상이에요. 철저하게 폐쇄적이에요. 어쩌면 어느 정도는 전부 자폐증에 빠져가지고 사는 거예요. 자 이렇게 문을 닫아놓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찾아 들어가야지요.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 문을 열어야 되요. 그리고 한사람을 구원을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 교인 가운데 그런 분이 계셔요. 옆집 사람이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를 믿었어요. 믿고 나서 보니 너무 후회가 되는 거예요. ‘왜 나는 이렇게 늦게 믿었나. 나 예수 믿는 친구들도 많은데 동창도 많고 한데 그 누구도 나더러 예수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나이 오십이 된 지금 와서 내가 예수를 믿게되니 참으로 야속하다고 그러지요. 저희들만 믿고. 날 보고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안했다는 거예요. 하기야 뭐 얘기 해봐야 안 믿을거 같으니깐 그랬겠지만도. 좌우간 이게 문제라니깐요. 문을 두드려야 됩니다. 익명성을 해체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이거보세요. 제가 얼마 전에 아는 분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어요. 뭐냐하면 Bowling Alone 이라는 책이에요. 좀 이상하잖아요? 볼링이라는 운동을 하는데 혼자 한다 그거예요. 그 책의 서문에 나오는 거 보니깐 맞는 얘기예요. 현대인을 비평했는데 옛날에는 운동을 할 때 둘이 셋이 같이했어요. 요새는 혼자하는 거예요. 미국 가서 볼링장에 가보면 정말 큰 72레인이나 되는 레인에 전부가 한 사람씩 혼자서 쳐요. 철저하게 이기적이요. 누구하고 함께 할 줄을 몰라요. 요새 우리 한국에도 이 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전부 혼자서, 이게 바로 고독함, 정신병자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이 폐쇄적인 사람을 찾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요. 그게 아름다운 일이죠. 그 문을 열어야 되요. 거룩한 사랑으로 폐쇄된 인간을 개방해야되겠다.
또 한가지는 이동성이라고 했어요. 그렇습니다. 뭐 이사들을 자주 다녀요. 아마 여러분 요새 한 집에 한 15년 살았다고 하면 존경할만한 사람입니다. 아파트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3년도 못가서 이사 또 해요. 왜 이사하느냐? 좀이 쑤셔서. 지루해서 못견뎌 하는거야. 이리 이사가고 저리 이사가고. 그래서 이삿짐센타가 돈을 버는 거야. 이렇게 이사를 많이 하는데 이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을 피상적으로 만나는 거야. 적당적당히 “How are you” “Fine thank you” 요렇게만 만나지 그 이상 묻지도 말아요. 더 얘기하지도 말자. 뭐 클럽이니 회담이니 무슨 뭘 한다고 해봐야 전부 피상적이요. 깊은 만남이 없어요. 바로 이 사람이기 때문에 미쳐돌아가는 거예요. 고독해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깊은 만남의 관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요. 복음을 들고 들판을 뛰는 게 아니요. 바로 여러분의 이웃을 찾아야 되요. 굳게 닫힌 문을 열어야 되요. 제가 아는 교인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 하나 친구를 인도하기 위하여 저 소망교회에서 테이프를 좌우간 매주일마다 갖다 주는 거를 3년을 갖다주니깐 교회 나오더랍니다. 그저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뭐라고 전도도 못하겠고 이거 좀 들어보라고 계속 3년을 그런 거야. 자,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할 때 그리고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 나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을 때 나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거룩한 역사의 종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조셉 에디슨이라고 하는 영국 시인이며 수필가요 극작가인 분이 계십니다. 그의 책 가운데서 그는 이런 시적인 말을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볼 때에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말더라.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으면서 무절제하게 사는 욕망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보았노라. 부모님들의 묘비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을 위하여 슬퍼할 것이 아닌 것은 내가 그 뒤를 꼭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쫓겨난 왕들이나 쫓아낸 왕들의 무덤을 보면서 경쟁과 불화와 논쟁이 얼마나 헛된 일인 것을 생각했노라.” 무덤에 보면 몇년 몇월부터 몇 년까지 살았다고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요. “그걸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노라. 부활하는 날짜는 같은 날짜일거라고.”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걸음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언젠가는 마지막 종착에 도달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을 생각해야 됩니다.
아프리카 콩고의 선교사로 있었던 스티븐슨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날 먼 길을 가다가 산중에서 조난당했습니다. 비는 막 쏟아지고 비바람이 치는데 폭우가 오는데 길을 잃어버렸어요. 동으로 갈지 서로 갈지 완전히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헤매다가 오막살이 하나를 만났어요. 원주민을 만나가지고 부탁을 했어요.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진스강으로 가고있는데 아, 이렇게 길을 잃어 버렸는데 좀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가세요.” “잘 모르겠는데요.” 다시 설명해줘요.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가라.”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겠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때에 그 추장은 하는 말이 “할 수 없군요. 내가 같이 가야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가셔야지요. 유명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집니다. 어느 수도사가 하나님 앞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베드로가 그를 맞이하면서 반갑게 맞이하고 하는 말이 당신이 살아온 일생을 요렇게 한번 돌아보라고 그래 뒤를 돌아다보니깐 자기가 살아온 발걸음 발자국이 쭈욱 있는 거예요. 자세히 보았더니 발자국이 두사람의 발자국이야. 이거 왜 두사람의 발자국이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함께 한 것이요.” 자세히 보았더니 두사람의 발자국이 있다가 어떤 곳에는 혼자 발자국이 있어요. 여기는 왜 혼자요? “너무 힘들어해서 예수님이 업고 걸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나 혼자 산 줄 알았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히브리 11장에 보면은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저 가신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가 지금 마지막 코스를 달리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고. 마지막 종착점을 바라보며 결승점을 바라보며 마지막 코스를 달리는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바르고 복되고 신바람 나고 마지막 얼마 안 남은 요 시간을 최선의 길로 가장 행복한 발걸음으로 달려갔더란 말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이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거칠고 험한 세상을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생각컨데 잘못 갔기도 했고 잘못 걷기도 했고 방향조차 잘못된 일도 많았습니다만 바른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 가장 아름답고 소망과 용기와 은혜에 충만한 마지막 노정을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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