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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앙인의 신앙
본 문 :로마서 4장 16절 ∼ 25절
196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제가 다른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 말씀이 많이 은혜 되어서 여러 곳에서 이 말씀, 이 본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은 민수기 20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 큰 실수를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에 살면서 물이 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합니다. 이렇게 발광을 부리고 원망을 하는 백성들 앞에 그만, 모세가 자기의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벌컥 화가 나서 반석을 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쳐야 하는데 모름지기 “꽝, 꽝” 두 번 쳤습니다. 사건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십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가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이것이 큰 죄가 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해서 그 본문을 읽을 때마다 신앙이 무언가, 참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는 그가 말로 실수를 합니다. 시편 106편 33절에 보면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적으로 말을 해야 됩니다. 모세는 함부로 지껄였습니다. 아주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너를 위하여 물을 내랴?” 언제 모세가 물을 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을 내신 것입니다. 모세는 심부름을 한 것뿐인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말에 신앙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 보면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 행동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24절에 가서는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누가 뭐라 해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는 믿음으로 이 백성을 인도했고 믿음으로 오늘도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불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말을 했고 믿음 없이 행동을 했으며 믿음 없이 하나님께 반항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큰 책망을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 같으나 그 순간,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앙인의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신앙인의 신앙이 있습니다. 보통 믿음이 아니고 믿음 중에 참 믿음, 바른 믿음, 거룩한 믿음이 여기에 나타나 있기에 이 말씀을 봅니다. 신앙인의 신앙. 사도 바울의 신학을 한 마디도 말하라고 하면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Justification by faith.”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의, 또 신학의 골자입니다. 율법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해석합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의 신학이요 우리 개혁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뿌리는 구약의 두 곳에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라고 나와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 이것이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 믿음의 성격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또 그런가 하면 하박국 2장 4절말씀, 유명한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행위로 살고 도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 두 요절을, 이 두 말씀을 딱 붙들고, 온 성경을 이 두 말씀에 의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핵심입니다.
자, 그 믿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믿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바로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아주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24절에 “믿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믿는다고 해서 다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일반적인 믿음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일반적으로는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그런 믿음입니다. 최근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사람의 96%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90%가 기도를 한답니다. 그리고 41%가 한 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식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1947년 통계와 똑같은 것입니다. 발전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사람들, 확실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난해 9월 11일 사건 때 뉴욕에 있는 건물이 터져나가니까 그 다음 주일에 교회가 터질 정도로 모였습니다. 교회마다 수용을 못해가지고. 텅텅 비던 교회가 꽉 찼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점마다 성경책이 동이 났습니다. 모두가 성경책을 사려고 하니까.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일으키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속의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고 기도하는 마음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입니다.
더글러스 V. 스티어(Douglas Van Steere) 라고 하는 신학자의 Dimensions of Prayer라고 하는 책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적어도 세가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믿음. 첫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 생명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있다. 전쟁도 흉년도 질병도 실패도 성공도 사랑도 전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전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 하나님 앞에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두가 다 하나님께 요구서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왜 안주십니까’라고 하나님께 신청서를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고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문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것을 왜 모르십니까? 왜 제게 복을 안주십니까?’ 이 기도가 사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신앙은 은총적 신앙입니다. 오직 은혜로 사는 것이다. 여러분, 아무래도 나의 의, 나의 선, 나의 봉사, 나의 진실로써는 안될 것을 압니다. 이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오직 은혜로. 그래서 의롭다 함을 얻는 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입니다. 의인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입니다. 의롭게 봐주신 것입니다. 보십시다. 탕자가 집에 돌아옵니다.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가서 허랑 방탕하고 여러 해 만에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를 율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갔느냐? 돈은 다 어디에 썼느냐?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하였느냐? 빚은 얼마나 졌느냐?’라고 전혀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았다. 잃었다 얻었노라. 잔치를 하자.” 아들로 영접합니다. 왜? 여기에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믿음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주실 줄 알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용서를 해주실 줄 알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을 믿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행위를 믿음으로 보시고 그 믿음을 보고 다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저는 탕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입니다. 좀 염치가 없지만 그는 아들입니다. 당당한 아들입니다. 왜요? 아버지가 그것을 다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그 탕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사랑, 오직 긍휼! 오직 믿음으로란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라는 것은 오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갖는 믿음 중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의롭다함을 얻었다’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누가 나에게 죄인이라 할 것이요. 그 믿음이 믿음 중에 가장 중요한 믿음입니다. 가끔 아이들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조그마한 꼬마들을 보면 어머니가 어떤 때에는 쥐어박기도 하고 물러가라고 해도 그냥 엉덩이를 갖다대고 턱 앉아있습니다. 틀림없이 사랑해 줄 것이란 것을 믿습니다. 이 꼬마들은 좌우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사랑해 줄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잘못해도 봐줄 수 밖에요. 사랑으로 봐줍니다. 그 믿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 있는 실제적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이제 고향을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는데 약속을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약속의 땅을 주겠다’ 땅에 대한 약속. 또 하나는 ‘자식을 주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5년을 기다려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은 점점 늙어가고 마누라는 할망구가 되어 단산했습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25년이 지난 시간이 되어서 천사가 와서 말을 합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자,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믿음을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아주 어려운 시간입니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다 지나가서 내년에 아이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일축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25년 동안 속았습니다. 오늘 믿습니다. 약속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취를 믿었습니다. 요즘에도 보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에 대한 약속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의 구체성이 없습니다. 25년을 그렇게 기다려 왔고 실망했습니다만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년에 낳으리라.”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믿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말씀을 할 때에 사라가 저 뒷전에서 웃었습니다. ‘픽’하고 웃었습니다. 이건 보통웃음이 아닙니다. 비웃었습니다. ‘내가 나이가 지금 몇인데. 단산한 지가 언제인데. 난 죽은 자와 같은데.’ 천사가 알고 “네 아내가 왜 웃느냐?” 하니 사라가 겁이 나서 “아니, 안 웃었습니다”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이 너무 좋습니다. “웃었느니라” 라고 합니다. ‘안 웃겠냐 웃게 되었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은 절대적 은혜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내년에 아들을 주겠다는 말씀을 들으며 가책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땅을 주신다고 하셨으나 흉년이 들 때에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보세요,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되니까 종 하나를 양자를 삼질 않았나 또 외도를 해서 서자인 이스마엘을 만들었습니다.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내년에 주신다는 말을 듣고 보니까 “아이쿠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동안에 잘못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휘청휘청 했습니다. 흔들흔들 했습니다. 실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자, 생각하자면 하나님께서 “너 굳게 서지 못하고 왜 휘청거리느냐? 약속 취소다”라고 하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취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많은 흔들림이 있었으나 오늘 이 시간 그 부끄러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아들을 주리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그 동안의 모든 실수를 다 덮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는 관계없이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단, 그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신학자 케이체프노이드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하십니다. 사람은 여섯 가지 심리적인 감옥에 갇혀있다. 첫째 감옥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만을 예쁘게 보려고 하는 자기 도취의 감옥. 거울 보며 ‘참 이쁘다’ 하는 것, 공주병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못생겼는가’ 하는 자기 멸시. 항상 생활할 때에 ‘자신은 왜 이렇게 못났는가’ 그것도 감옥이고 병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늘 내일이 항상 절망적입니다. 이것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옛날일만 좋게 생각하고 황금시대라고 생각하는 이것은 향수의 감옥. 다른 사람의 일만 좋게 보여 부러워하고 사는 선망의 감옥.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질투의 감옥. 여섯 가지 감옥입니다. 그런데 통합하면 그 원인은 자만심에 있습니다. 자만심 때문에 절망하고 자만심 때문에 교만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만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완전히 자유하고 그 부끄러운 과거와 잘못된 것도 많고 의심도 많지만 그래도 말씀하시니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19절에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까?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과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알고도 믿었습니다. 늙은 것도 알고 자신의 마누라가 할망구인 것도 압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대로 믿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대로 믿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늘만 쳐다보지 마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죽은 것과 같은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었습니다. 신앙의 구체적인 신앙. 빌립보 4장 13절을 저는 제일 좋아합니다. 누가 제게 묻기를 “목사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성경구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오면 언제나 이것을 대답합니다. 빌립보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성경책 하나를 들고 이 요절을 외우면서 저는 남쪽으로 왔습니다. 여러분, 어머니께서 이 말씀을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구역(舊譯) 성경에서는 “능치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믿었습니다. 약속을 믿고 성취를 믿고 그 현재성을 믿고 구체성을 믿었습니다. 나의 실수도 알고 허물도 알고 부족함도 다 압니다.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나를 통해서 다시 살리시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내게 능력주시면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뜻이면, 그가 말씀하시면,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저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신앙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십시다. 신앙인의 참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믿노라 하면서도 생각 뿐이요, 또 늘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형식적이었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며 저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그 아브라함의 후예답게 확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늘 찬송하며 늘 승리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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