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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의 신앙 의식(행 4:13~22)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는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중의 하나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양식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은 변화가 없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도, 환경도 날마다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진실과, 성실만이 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안정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도, 사랑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에서는 이 변화를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근본적인 변화(radical change)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변화는 가치 기준이 달라질 만큼 아주 근본적으로 기초가 흔들리는 변화의 세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빨리 변한다(rapid change)는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과서를 출판해 놓고 보면 벌써 세상은 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과서가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도 이 발전상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요새 웃는 이야기로 쌍둥이도 세대차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빨리 변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방향이 없는 변화(aim-less change)입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질서하게 되는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측을 불허합니다. 목표가 없고 방향이 없는 변화이기에 불안합니다. 자, 우리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변화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지키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인간됨을 지키며, 특히 바른 신앙을 지켜 나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공존하는 세상에서는 자전을 통해서만 부동자세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항상 자동차 앞에다 나침반을 붙여 놓고 운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노라면 이 나침반은 뱅글뱅글 돕니다.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도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침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돌고 있기 때문에 나침반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돌아야만 합니다. 돌지 않고 바늘이 고정되면 그 나침반은 제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고서는 북쪽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계속 북쪽을 가리키려면 빙글빙글 돌아야 합니다. 이 원리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요, 힘의 원리입니다. 내가 나 됨의 위치를 바로 지킨다는 것은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하여야만 내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바닷가에 나가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물이 다 빠진 다음에 바닷가에는 조개껍질도 많지만 특별히 커다란 게딱지를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 게가 있는 줄 알고 열어 보면 껍데기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껍질 속에 있는 생명이 자꾸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정도 커서 살이 꽉 차면 또 껍질을 벗습니다. 계속 벗어버립니다. 조개나, 굴, 가재 등 각질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은 크면서 계속 묶은 껍질을 자꾸 벗어버립니다. 이 생명적 변화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우리는 개혁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인간은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개혁이 없는 정지상태는 썩어 버립니다.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디오피아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한 번도 개혁하지 아니한 그야말로 그대로 있는 교회입니다. 한목사님이 돌아오셔서 후배 목사님들께서 하신 말씀이 "종교개혁은 해야겠어요. 2천 년 동안 그대로 있으니 이것은 미신인지, 종교인지, 기독교인지 알 수가 없이 되었어요"라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정말 기독교인지, 우상 숭배하는 곳이지 알 수가 없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미에 다녀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그 곳에서는 기독교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한 정도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만큼 미신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없는 신앙, 개혁이 없는 교회는 미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본래적인 진리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 생명의 진리,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개혁이란 말입니다. 계속적인 변화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있는 변화는 타락입니다. 수동적인 변화는 세속화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이요, 선택적인 스스로의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강조해서 이야기하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변화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종교요, 생명이 있는 신앙이요, 생명이 있는 인격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식에서 결혼 서약을 할 때는 서로 사랑하며 일생동안 살겠습니다 라고 서약을 합니다. 이 때의 심정이야 누구나 다 평생 사랑을 지속하며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살아가며 계속해서 재확인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다못해 옷장이라도 돌려놓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지 가만히 있으면서 그 사랑이 그대로 유지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는 본문에 나타난 이 짧은 이야기는 사실상 제1의 종교개혁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으로부터 467년 전에 독일사람 마틴․루터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칼빈에 의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계속 개혁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옵니다. 이 종교개혁,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개혁이 옛날 이야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개혁한다는 데 개혁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명입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제1교회가 교회로 창립되는 순간도 알고 보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히브리 종교로부터 왔고 구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당이 개혁되어서 기독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건 자체가 아주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였다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본주의화된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서 성령의 역사로, 생동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정화된 교리, 고식화된 종교 사상, 즉 완전히 형식과 위선으로 빠져버린 이러한 교회에 대하여 이것을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력 있는 교회로 개혁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 당시의 종교계는 말할 수 없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말입니다. 그 횡포와 거짓, 위선, 외식 등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법정에서 일장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본문에 있습니다. 사실 이 공회에서 바로 예수를 못박는 결의를 했었고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일생 일대에 큰 실수를 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섰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다 물리치고 이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러한 용기와 믿음이 마침내 기독교회를 창설하게 되고 개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역사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 가까이 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오늘 현재 내 생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했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눈앞에는 가야바나 무서운 재판장이나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어마어마한 건물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까? 앞이 막히고 뒤가 막혔으며 옆까지도 막혔습니까? 이제 위를 보세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자신을 보세요. 이것이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신앙 의식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는 윔스 회의장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장은 말합니다. 네가 할 말을 취소할 마지막 기회를 줄 터이니 취소하면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는 무서운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때 루터는 윔스회의장의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지 않았고, 살기 등등한 사람들의 얼굴도 보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외마디의 기도를 합니다. 거기에서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되고 개척자가 됩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쳐다보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를 본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고, 진실이 있고,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는 구체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쓰시고, 제사장을 쓰시고, 그리고 바리새 교인을 쓰시고, 서기관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즉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만 역사 하는 줄만 알았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역사 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어부요, 보잘것없는 초라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난날에 자기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고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에 보잘것없는 나를 들어 쓰신다고 하는 확실한 개인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개인적인 신앙(personal faith)이 마침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로 말씀의 재발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믿고, 예언을 믿으면 선지자들을 믿고 있습니다만 그 예언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신앙을 마치 무지개를 따르는 것과 같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무한히 미래적인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은 오늘 현재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간혹 주위에서 예수를 20년, 30년 믿었는데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지금 교회에서 기도하고 문밖을 나갈 때에 내 앞에 전개되는 모든 사실을 그대로가 기도의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 응답이 있고 말씀의 성취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응답이요, 십자가 사건도 말씀의 성취요, 방언의 사건에 나타난 것도 요엘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지어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도 예언의 성취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내 생활 현장에서 성취되고 있고 응답되고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 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핍박을 무릅쓰고 큰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셋째로 그들은 표적 안에 살아감을 발견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의 재발견입니다. 추상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이 아니며 현실이요, 사건이요,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과 표적으로 살아갑니다. 40년 동안이나 앉은뱅이로 걸식하며 살아 온 거지가 베드로를 쳐다볼 때, 그는 말하기를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표적, 이 믿음은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문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대로 생명이요,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을 때 무한한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속에서도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건으로서 십자가의 능력이 베드로를 강하게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베드로를 쳐다볼 때 그는 당당히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우리의 경건이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왜 나를 보느냐, 오직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걷게 했느니라" 표적 속에 살아가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이 먹이신다.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입히신다.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예수님은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표적으로 보셨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표적이요, 현실이요, 사건이요, 그리고 행동이었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만졌기 때문에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너를 무(無)로 즉, 없는 것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유교는 '너 자신을 닦으라.' 스토아 철학에서는 '너 자신을 죽여 버려라.'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으로 살아 가는 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이러한 믿음 위에 세워질 때 두려움도, 죄도, 부정도, 불의도, 유혹도 갖가지 시험도 다 이기는 것입니다. 개혁자의 신앙 그것은 곧 승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도 저희들은 변화 무쌍한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변화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이 급히 변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향하여 주의 뜻만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은 주님을 보며 우리의 손은 주님의 역사와 동행하며 우리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룰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개혁자적인 확고한 믿음에 살게 해 주시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살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사 항상 승리의 생활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개혁자의 신앙 의식(행 4:13~22)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는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중의 하나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양식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은 변화가 없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도, 환경도 날마다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진실과, 성실만이 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안정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도, 사랑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에서는 이 변화를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근본적인 변화(radical change)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변화는 가치 기준이 달라질 만큼 아주 근본적으로 기초가 흔들리는 변화의 세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빨리 변한다(rapid change)는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과서를 출판해 놓고 보면 벌써 세상은 달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과서가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도 이 발전상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요새 웃는 이야기로 쌍둥이도 세대차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빨리 변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방향이 없는 변화(aim-less change)입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질서하게 되는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측을 불허합니다. 목표가 없고 방향이 없는 변화이기에 불안합니다. 자, 우리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변화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지키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인간됨을 지키며, 특히 바른 신앙을 지켜 나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공존하는 세상에서는 자전을 통해서만 부동자세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항상 자동차 앞에다 나침반을 붙여 놓고 운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노라면 이 나침반은 뱅글뱅글 돕니다.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도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침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돌고 있기 때문에 나침반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돌아야만 합니다. 돌지 않고 바늘이 고정되면 그 나침반은 제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고서는 북쪽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계속 북쪽을 가리키려면 빙글빙글 돌아야 합니다. 이 원리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요, 힘의 원리입니다. 내가 나 됨의 위치를 바로 지킨다는 것은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하여야만 내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바닷가에 나가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물이 다 빠진 다음에 바닷가에는 조개껍질도 많지만 특별히 커다란 게딱지를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 게가 있는 줄 알고 열어 보면 껍데기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껍질 속에 있는 생명이 자꾸 자라면 묵은 딱지를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정도 커서 살이 꽉 차면 또 껍질을 벗습니다. 계속 벗어버립니다. 조개나, 굴, 가재 등 각질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은 크면서 계속 묶은 껍질을 자꾸 벗어버립니다. 이 생명적 변화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우리는 개혁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인간은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개혁이 없는 정지상태는 썩어 버립니다.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디오피아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한 번도 개혁하지 아니한 그야말로 그대로 있는 교회입니다. 한목사님이 돌아오셔서 후배 목사님들께서 하신 말씀이 "종교개혁은 해야겠어요. 2천 년 동안 그대로 있으니 이것은 미신인지, 종교인지, 기독교인지 알 수가 없이 되었어요"라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여기저기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정말 기독교인지, 우상 숭배하는 곳이지 알 수가 없는 집단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미에 다녀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그 곳에서는 기독교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한 정도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만큼 미신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없는 신앙, 개혁이 없는 교회는 미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본래적인 진리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 생명의 진리,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개혁이란 말입니다. 계속적인 변화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있는 변화는 타락입니다. 수동적인 변화는 세속화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이요, 선택적인 스스로의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강조해서 이야기하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변화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종교요, 생명이 있는 신앙이요, 생명이 있는 인격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식에서 결혼 서약을 할 때는 서로 사랑하며 일생동안 살겠습니다 라고 서약을 합니다. 이 때의 심정이야 누구나 다 평생 사랑을 지속하며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살아가며 계속해서 재확인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하다못해 옷장이라도 돌려놓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지 가만히 있으면서 그 사랑이 그대로 유지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는 본문에 나타난 이 짧은 이야기는 사실상 제1의 종교개혁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으로부터 467년 전에 독일사람 마틴․루터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칼빈에 의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계속 개혁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옵니다. 이 종교개혁,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개혁이 옛날 이야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개혁한다는 데 개혁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명입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제1교회가 교회로 창립되는 순간도 알고 보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히브리 종교로부터 왔고 구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당이 개혁되어서 기독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건 자체가 아주 위대한 종교개혁의 역사였다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본주의화된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서 성령의 역사로, 생동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정화된 교리, 고식화된 종교 사상, 즉 완전히 형식과 위선으로 빠져버린 이러한 교회에 대하여 이것을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력 있는 교회로 개혁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 당시의 종교계는 말할 수 없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말입니다. 그 횡포와 거짓, 위선, 외식 등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법정에서 일장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 본문에 있습니다. 사실 이 공회에서 바로 예수를 못박는 결의를 했었고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일생 일대에 큰 실수를 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섰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다 물리치고 이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러한 용기와 믿음이 마침내 기독교회를 창설하게 되고 개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역사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 가까이 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오늘 현재 내 생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했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눈앞에는 가야바나 무서운 재판장이나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어마어마한 건물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가운데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까? 앞이 막히고 뒤가 막혔으며 옆까지도 막혔습니까? 이제 위를 보세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자신을 보세요. 이것이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신앙 의식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는 윔스 회의장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장은 말합니다. 네가 할 말을 취소할 마지막 기회를 줄 터이니 취소하면 살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는 무서운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때 루터는 윔스회의장의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지 않았고, 살기 등등한 사람들의 얼굴도 보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외마디의 기도를 합니다. 거기에서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되고 개척자가 됩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쳐다보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를 본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고, 진실이 있고,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는 구체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쓰시고, 제사장을 쓰시고, 그리고 바리새 교인을 쓰시고, 서기관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즉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만 역사 하는 줄만 알았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역사 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어부요, 보잘것없는 초라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난날에 자기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고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민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에 보잘것없는 나를 들어 쓰신다고 하는 확실한 개인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 개인적인 신앙(personal faith)이 마침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로 말씀의 재발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을 믿고, 예언을 믿으면 선지자들을 믿고 있습니다만 그 예언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신앙을 마치 무지개를 따르는 것과 같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무한히 미래적인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은 오늘 현재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간혹 주위에서 예수를 20년, 30년 믿었는데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지금 교회에서 기도하고 문밖을 나갈 때에 내 앞에 전개되는 모든 사실을 그대로가 기도의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 응답이 있고 말씀의 성취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응답이요, 십자가 사건도 말씀의 성취요, 방언의 사건에 나타난 것도 요엘서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지어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도 예언의 성취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내 생활 현장에서 성취되고 있고 응답되고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 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핍박을 무릅쓰고 큰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셋째로 그들은 표적 안에 살아감을 발견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의 재발견입니다. 추상적이거나 관습적인 것이 아니며 현실이요, 사건이요,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과 표적으로 살아갑니다. 40년 동안이나 앉은뱅이로 걸식하며 살아 온 거지가 베드로를 쳐다볼 때, 그는 말하기를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표적, 이 믿음은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문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대로 생명이요,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을 때 무한한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속에서도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건으로서 십자가의 능력이 베드로를 강하게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베드로를 쳐다볼 때 그는 당당히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우리의 경건이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왜 나를 보느냐, 오직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걷게 했느니라" 표적 속에 살아가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이 먹이신다.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입히신다.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예수님은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표적으로 보셨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표적이요, 현실이요, 사건이요, 그리고 행동이었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만졌기 때문에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너를 무(無)로 즉, 없는 것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유교는 '너 자신을 닦으라.' 스토아 철학에서는 '너 자신을 죽여 버려라.'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으로 살아 가는 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이러한 믿음 위에 세워질 때 두려움도, 죄도, 부정도, 불의도, 유혹도 갖가지 시험도 다 이기는 것입니다. 개혁자의 신앙 그것은 곧 승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도 저희들은 변화 무쌍한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변화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이 급히 변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향하여 주의 뜻만 이루어 나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은 주님을 보며 우리의 손은 주님의 역사와 동행하며 우리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룰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개혁자적인 확고한 믿음에 살게 해 주시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살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사 항상 승리의 생활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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