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제 목 : 판단치 못할 지혜
본 문 : 로마서 11 : 33 – 36절
중세시대에 최고의 사상가였던 ‘성 어거스틴’이 옛날 황혼녘에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우주와 인간에 대한
깊은 명상에 사로 잡혀서 조용히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한한 우주, 그리고 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다
만 보더라도 그 광란한 바다 앞에 나라고 하는 것이 조그마하고 미미하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무
한한 세계를 생각할 때 “도대체 인간은 뭐냐?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뭐냐?” 너무 작고 너무 미미하여 시편기자의 고백
(시8:4)이 절로 나옵니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 관대, 저를 돌아보십니까? 보잘것없는 저의 존재를 이렇게 느끼면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천진난만한 소년 하나가 자기 앞에 앉아서 표주박을 가지고 바닷물을 퍼
서 모래밭에 파여진 웅덩이에 갖다가 붓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표주박으로 물을 퍼다가 웅덩이에 붓
습니다. 계속 합니다. 반복하는 것을 보고 어거스틴은 이 낯선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
했더니 그는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예! 저는 이 표주박을 가지고 이쪽에 있는 바닷물을 몽땅 퍼서 저쪽에 있는 웅덩이
에다가 다 옮기려고 합니다. 이왕에 작정한 것이니까 뭐 평생이 걸리더라도 이걸 다 해낼것입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서…… ‘아주 엉뚱해도 정도가 있지? 이런 엉뚱한 일이 있나?’ 싶어서 “정신없는 짓 좀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어머
니가 기다린다.” 그랬습니다. 이 소년이 일어서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려므나.”
“선생님은 그렇게 작은 머리로 그 머리를 가지고 무한한 우주와 하나님의 세계를 어찌 몽땅 알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
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년은 간데없었습니다. 이 충격적 사건이 어거스틴의 신화를 세우는데
결정적 지혜가 되었다…… 라고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세계를 조금씩이라도 알아 가기 시작하면 그 무한한 세계 앞에 나라는 것이 얼마
나 하잘 것 없는가를 거듭거듭 알게 될 것입니다. 철학자 러셀은 자기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세 가지 힘이 있다고 그 저
서에서 고백합니다. 하나는 사랑에 대한 갈망! 역시 사랑을 느낄 때 행복하고 사랑을 할 때 힘이 생기고……. 사랑밖에
없더라. 그런고로 열심히 사랑하자. 사랑을 추구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그 힘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인식에 대한 갈망.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닫고 알아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렇게 해보았지만 아는 것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아
닌 것들이 아닌 것이요. 인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많은 사람이 너무너무 고생을 합니다. 좀 도와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지만 도대체 무엇을 도울 수 있다는 겁니까? 인류에 고통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
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잃은 것도 그 연민 뿐이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구나. 그런 생각으로 살아간다고 했습
니다. 그는 말합니다. 열심히 살아 갈 때에 신비로운 하늘에 조심을 눈치 챌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천국 문을 엽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더라. 그렇게 말년에 고백하고 있습
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 로마서 11장을 보았습니다. 1에서부터 11장까지가 ‘교리편’이고 12장부터 16장 끝까
지가 ‘윤리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로마서를 몇 년 강의한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대한 책을 두 번 썼습
니다. 로마서를 사랑해서 많이 읽고 또 연구해봤습니다. 11장까지가 교리요, 그런데 교리 마지막 부분에 가서 오늘 본
문을 봅니다. 이것은 교리와 신앙고백의 클라이막스입니다. 극치적인 신앙간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적으
로 표현이 됩니다. 동시에 내용은 찬양으로 일관됩니다. 찬양이라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the greatness of God”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조금 깨닫게 될 때 “와 놀랍다.” 그것이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또 하나는 그것이 위대하심 앞에 있는 자기 모습입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아주 미련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미련함을 간증합니다. 또 하
나는 이 보잘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큰 역사, 위대하신 역사 앞에 흡수되면서 헌신하게 됩니다. 새롭게 헌신합니다.
새롭게 계속적으로 commitment, 그에게 부탁하고, 그에게 의존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그런 믿음, 그게 찬양으로 이
어집니다. 여러분, 믿음과 깨달음을 대조 해 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큰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믿는다는 그거! 아는 것은 작습니다. 마치 여러분 부모님
과 자녀를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안다고 합니다. 부모의 대한 은혜는 바다 같고, 산과 같고…… 하지만
은 사실 알고 보면 걔네들이 압니까? 우리 눈앞에 있는 부모님 하나를 아는 것! 이것도 만만하지 않아요. 여러분, 부모
님의 은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우스운 얘기할까요? 제가 경험해 보니까요, 한 70정도 되어야
알아요. 젊은 사람들이 부모가 사랑이 어떻고…… 아주 유치한 거예요. 좀 더 세월을 살아가면서 “아! 역시 부모님의은
혜는 큰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세계, 감히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자, 그래서 말입니다. ‘어거스틴’는 이렇게 말합니
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다. 그 결과로 믿는 바를 보게 된다.” 원문대로 해석을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믿음
은 경험하지 못한 것! 경험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내가 믿어요. 그 결과를 믿는 바를 알게 된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
다 알지도 못하고, 다 알 수도 없고, 아니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 설명할 것도 없어요. 믿으면 되
니까! 믿고 받아들이면 되니까! 그러나 그 내용은 세월이 가면서 여러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
때의 감격이 있는 거예요. 깨달은 만큼만 행복한 거지요, 믿어서도 행복하지만은 그건 아직 온전하지 못해요. 깨닫게
될 때에 “아∼” 감격합니다. 그런 거구나! 여러분, 사랑은 많이 받고도 사랑의 깨달음이 없으면 사랑 속에 살아도 행복
은 없는 거예요.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요, 이것이 찬양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요.” 깊어요. 너무 깊어요. 너무 깊은 세계를 이제 와서 조금 깨달았어요. 아직 멀었어요, 무궁
무진한 하나님의 세계. 그 위대하심을 깨닫고 간증하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렇습니
다. 일반적으로요, 우리 믿는다 하지만은 책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요, 하나님의 능력은 믿어요. 보세요! 태풍이 일어날
때, 해일이 일어날 때, 해일이 일어날 때, 풍락이 일어날 때, 또 지진이 일어날 때! 깜짝 놀라 인간의 노력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나님의 큰 위대함을 그 능력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능력을 믿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못해요.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요, 지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그것이 간증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오
늘 본문 말씀에는 능력이란 말이 없어요. 다만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조금이나마 알아
내야 한단 그 말이에요. “기도다. 하나님의 지혜.”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인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
의 지혜가 있어요. 무궁무진한 신비로운 지혜가 있음을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깜짝 놀랍니다. 계속 놀라면서 살아갑
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간증을 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누가
주께 먼저 능을 갚으심을 받겠느뇨” 세 가지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명제입니다. 여러분, 누가 주의 마음을 아십
니까? 더 깊은 세계! 주의 마음! 지혜와 지식! 누가 알았습니까? 이제 조금 알고 감탄해 하는 것이여, 누가 알았느냐?
그것이 우리 현재의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오늘 제가 간증적인 말씀을 하나 드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았어요. 너무 자주 맞고 그러니까 심해서 제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때리나?” 그랬다가 혼났습니다. “이
놈아, 사랑하니까 때리지.” 몇 대 더 맞았어요. 창고에 앉아서 차고에 하루 한나절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너무 장난이
심해서 문제가 많았거든요. 그것마저 열어줬다간 난리가 납니다. 어째든 그렇게 맞았는데 제 기억에 17살 때, 마지막으
로 맞은거 같아요. 그때 매를 맞고 저를 불뚝 맞고 나가는 아버지를 처량하게 문간에 섰던 제 어머니가 붙들고 한마디
하시데요. “여보,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다 큰 아이를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이리도 때리는 거요?
잘 생각해 보니 오늘은 당신이 잘못한 거 같은데 왜 아이를 때리느냐?” 제가 안에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렇
게 질문을 하니까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속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안에서 생각
했습니다.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그 후, 몇 년이 안돼서 제가 광산에 끌려가 있다가 거기서 도망을 해서 산에 숨어 있
었습니다. 거쳐 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막연하게 숨어 살 때 그야말로 노숙하면서 사는데 아버지
가 제가 얼마에 한번씩 식량을 갖다가 주었습니다. 한곳에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데 “어느 날 몇 시쯤에
어디서 만나자!” 하고 그 곳에서 만나서 그 굴에서 만났을 때 아버지는 미숫가루하고, 쌀 얼마하고, 어떨 때는 닭도 한
마리 잡아서 튀겨서 종이에 넣어 가지고, 나뭇짐을 지고 감추어 가지고 올라오는데 이게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입
니다. 그 위험한 길을 밤중에 늘 이렇게 제게 식량을 갖다 주셨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생명을 걸고 이렇게 해주셨는
데 왔다가 가시면서 아무 말씀도 없어요. “몸조심해라.” 그리고 산을 내려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뜨거운 사
랑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맞았던 거 다 이해가 됩니다. 그 진노 속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God’s love is concreted in His wrath.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
다.” 구체적인 사랑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진노적인 것이에요. 진노 속에서 구체화되는…….
그 아버지를 보면서 사랑을 느끼고 이제 효도하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제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총살당하는 것을 목
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효도할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깊은 것입니다. 엷은 게 아닙니다.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요 . 그 누가 주
의 마음을 알았겠는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누가 알것이냐구요. 이제 세월이 가면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 가는 것이
죠. 이해하면서 그 깊음을 알고 감격하는 것이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모사라는 말은 His adviser, His counselor 란 뜻이에요. 누
가 하나님 더러 “이래야 되겠습니까? 저래야 되겠습니까?” 이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기도도 겸손하게 해야 합
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러나 나 고집 안 할 랍니다.’ 이런 기도를 해야지. ‘이렇게만 해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이래야 합니다.’ 그러다가 망가지는 사람 많아요. 그거 아니라고요. 누가 하나님 앞에 꼭 이래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누가 고집을 부려요.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17살에 애
굽으로 팔려 갑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형들한테, 형들이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애굽으로 팔아먹으면 일생동안 노예생
활을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 기막힌 사정입니다. 이렇게 팔려 갑니다. 노예로 노예 생활을 하지요, 감옥에 억울
하게 들어와서 고생을 하지요. 이거 기가 막힌 겁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를 팔아먹은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서 그 형님들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혀서 그는 억제하지 못하고 옆방에
들어가서 목을 놓고 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는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세기 45장 5절과 50장 20
절에서 “형님들. 나를 팔았다고 해서, 팔아먹었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요 나는 팔려온 것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서 왔습니다. sold가 아니고 sent. 팔려온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보냄 받
아서 왔다.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형님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 너그러운 마음. 하나
님의 엄청난 세계를 이해한 자의 고백입니다.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겸손히 끌
려가야 하는 것이죠.
또 누가 먼저 드리어 갚으심을 받겠느뇨?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건 나의 의를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뭘 드려서, 십일조를 드려서, 헌금을 드려서, 봉사해서 보답 받아 가지고 살아요. 누가 그러겠어요? 아
무도 아니에요. 드린 건 없어요. 거저 받는 것이죠.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하나님이 먼저 우
리를 사랑하신 것이죠.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뿐이지. 우리의 우리됨, 나의 나 됨의 내 의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것만은 누가 자기 의를 내세우겠는가? 내가 없단 말이에요. 여기 찬양에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유명한 마틴 부버
의 I am Thou 라고 하는 이 책에서 자유인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자유인이란 누구냐? 오만 없이 사랑할 줄 알고 사
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사랑 받을 줄 알고 사랑할 때 거기에 자유가 있어요. 형상을 믿고 현실을 인정하며 받아
들이는 사람. 이 현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 이게
자유인이야! 또한 숙명을 믿으면 숙명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긍정하는 사람. 이것은 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포기
하는 겁니다. 내 선택을 반납해 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그 숙명 속에 내가 있다고 아는 그 사람만이 자
유인이다. 그렇게 참 오묘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에 세계적인 무용가였던 수잔 링케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무용세계에 대한 것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유명한 얘기를 합니다. “독일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무용하기엔 적당치 않다. 무용이란 음악에 선율을 이해하고 음악에 선율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생
각과 자기의 의견을 다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음악 선율에 내 몸을 맡겨버리고 만다.” 그것이 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사랑하고 그 하시는 사역 앞에 감사 감격하면서 그대로 나 자신을
하나님의 뜻 앞에 맡겨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한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마치고 돌아올 때, 가정을 두고 왔기 때문에 시간이 조급해서 그저 학위논문이 통과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나올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 나를 맨 처음 부르는 곳이 하
나님이 부르는 것으로 알고 그리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와서 5개월 동안 지내봐도 오라는데가 없어요. 이거 생활도
어려운데 친구들이 만나서 다방에서 차 한잔 마시고는 아무 말 없이 금일봉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가 거지
냐?” 그랬더니. 내 친구 하는 말이 “얻어먹으면 거지지. 왜 말이 많으냐?” 그렇게 얻어먹었어요. 한경직 목사님이 오라
고 해서 갔더니 “이 사람아! 온다고 편지를 하고 오지 그냥 왔나?” “제가 뭐 잘난 사람이라고 편지를 합니까?” “어떻게
생각하고 왔나?” “맨 먼저 부르신 곳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지 알고 그렇게 기도하고 왔습니다.” “아! 이 사람 믿음을
좋은데 딱하구먼.” 그러더니 얼마 후에 오라고 해서 갔어요. “모 대학에 학장 자리가 있는데 뭐 어떻하겠나? 신학교 교
수 자리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고,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새로운 일이니까 한번 해볼만해.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학장
이 됐습니다. 어느 친구들이 한번 놀러왔다가 같이 앉아서 기도하더니 아주 목을 놓고 우는 친구가 있더라고요. “아니
한국 교회가 곽 목사를 어떻게 이렇게 대접을 하나? 아니 신학대학 교수로 받던지 아니면 어느 교회를 맡겨야지 설교
하게 해야지 설교하는 목사를 이 학장실에다가 쳐박아놔! 이거!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래서 “이 사람아! 울지마. 나도
안 우는데 네가 왜 우냐?” 그랬어요. 주일날은 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교회에서 우연히 방문 하는 길에 압구정동에
서 몇 사람 모여서 수요일 저녁 예배 본다고 해서 제가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도 모르고 밤에 차를 타고 여기 왔
어요. 그것이 소망교회입니다. 누가 이것을 알았겠습니까? 누가 이 비밀을 알았겠습니까? 자! 이제 다시 묻습니다. 누
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될 수 있느뇨? 누가 먼저 드려 갚으심을 갚겠느뇨? 스스로 대답하시
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은 과거에 주신 큰 은혜에 감격하며 현재의 섭리를 피부로 느끼면서 간증을 하고 결과로 앞
에 있는 세계를 환하게 전망하면서 조명을 관조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여기에는 찬송과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모르는 중에 섭리하시고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며 오묘하게 놀랍게 그
깊은 지혜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여,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는 하나님 계속해서 축복해주실 줄로 믿
습니다. 저희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더 크게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옵소
서. 그 크신 영광 그 깊은 지혜를 찬양하며 날마다 주를 섬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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