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11. 주일 설교(빌립보서 강해 9)
언제까지 마구잡이 인생을 살 것인가?
빌 3:10-16
빌 3:10-16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이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 그가 대단히 불안해 했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갈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청하여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고 합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미국 대통령이라고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맙네, 이제 나는 준비되었다네.”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잘 사고 있습니까?
저는 장례식을 집례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순간 순간은 그렇습니다. 공부도, 장사도, 결혼도, 자녀 교육도 열심히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 전체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산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남은 것이 없습니다.
저의 둘째 아이가 이번에 대학입시를 치르고 있습니다. 수험생 아이를 뒷바라지 하면서 고3생 또 재수생들이 ‘과연 이렇게 고생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하여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대학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죽고 살 문제입니까?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결혼식에 너무 비용이 많은 드는 것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정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년부터는 교회에서 하는 결혼식은 하객 대접을 교회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르는데 교회라도 앞장서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쓴 <신과의 인터뷰>에서“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질문에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져 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 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실제는 마구잡이로 살고 있는 이유는 앞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게 되는지 막연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 대신 눈 앞에 되어지는 일은 크게 보입니다. 입시, 취직, 결혼, 사업... 그러다 보니 이쪽이 좋아보여서 그리로 가다가 저 길이 더 좋아 보이면 그 길을 따라가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길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방향전환이 일어나고 목표가 바뀝니다. 그래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왔다갔다 합니다. 마구잡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면 열심히 살았지만 무엇을 했는지, 뭘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마구잡이 인생의 비참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들립니다.
“나는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부르심의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상을 받으려고 열심히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승진, 합격, 결혼, 하다 못해 초등학교에서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받는 일까지 다 상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을 받으려고 열심히 삽니다. “달려가고 있습니다.” 학원도 다니고 일찍 출근도 하고 야근도 하고 화가 나도 참고 몸이 아파도 참습니다.
그런데 상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주는 상도 있고 회사에서 주는 상도 있고 방송국에서 주는 상도 있고, 나라에서 주는 상도 있습니다. 상이지만 쓸데없는 상, 받아도 안 받아도 그만인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으려는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11절에서 고백한 대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불신자 때는 오직 남보다 좀 더 좋은 것을 먹으며, 남보다 좀 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며, 남보다 좀 더 좋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이고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고 영생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나 성과 같은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하녀와 하인, 그리고 개인 운전사와 가정교사가 있는 집에서 살았던 메리안 프레민저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행을 갈 때에는 꼭 침구를 싸갔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사용한 시트를 사용하는 것은 귀족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8세에 의사와 결혼했으나 1년 뒤 헤어지고 배우가 되어 젊고 잘 생긴 영화감독과 재혼하여 헐리우드의 화려함과 환락 속에 빠져 살다가 이혼하고 유럽으로 돌아가 파리 사교계의 여왕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대하하던 중 그녀의 마음 속으로 하나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슈바이처 박사가 있는 아프리카 렘버린(Lambarene)병원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거대한 성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라났고, 사교계의 여왕처럼 살았던 그녀가 흑인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매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아기들을 목욕시켜 주었고, 문둥병자들에게 식사를 먹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돕는 사람과 또 하나는 돕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돕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 뒤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절 ...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당회, 의미있는 규정 하나를 개정하게 됩니다. 장로님들의 65세 정년 규정입니다. 시무장로님들도 7년만 위원장이나 교회 부서의 책임을 맡고 그 다음에는 목양장로의 사명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인들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일할 기회를 드리자는 취지입니다. 이 안은 전적으로 장로님들의 발의로 지난 월요일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습니다. 이 안은 65세 이상된 장로님들을 몰아내려고 함이 아니었습니다. 정년 연령에 해당되지 않는 장로님들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적용하려고 정한 것입니다. 현재 65세 이상 되시는 분들은 이 규정에 구애됨없이 스스로 은퇴 시기를 결정하시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장로님들과 교회에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영생에 대하여 눈이 뜨이면, 세상의 것, 과거의 것, 육신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여겨집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길이 너무나 분명하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달려가듯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열리는 당회는 집사 권사 장로 임원을 선출하고, 교회의 여러 직책을 맡을 자를 선출하는 교회의 가장 큰 회의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직분이나 직책을 맡아달라고 하면 기겁을 하고 놀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무 놀라기에 제가 놀랄 정도입니다.
우리 교회,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선교회의 총회 결과 보고를 받았는데, 어느 교인이 선교회장을 맡길까봐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참석한 사람들이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그 사람을 회장으로 뽑았다는 웃지 못할 보고를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 시켜 먹으려’ 한다고 여깁니다. 교회 일을 짐으로, 부담으로,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를 불러 일 시켜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면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일이 잘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우리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우리에게 일을 맡겨주실 때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상 주시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발표회에서 사회자가 상품이 몇개 남았는데 나와서 춤추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우당탕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전부 춤을 추는데 '개다리 춤'만 추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엄마들이 나와서 춤추면 상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상이라면 아이나 엄마나 후다닥 뛰어나가 열심히 춤추는 것을 보면서 상의 위력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상에 대하여 이렇게 후다닥 뛰어 나와 춤 출 준비가 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일을 맡는 것이 엄청난 복입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써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 불행은 아무도 써주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쓰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누리는 엄청난 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주고 써주신다? 춤을 추며 기뻐할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로잡으셨기에 되어진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12절 …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로잡힌다”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 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품위있게, 고상하게, 상식적으로 믿어야지 그렇게 광신적이고 지나치고 극단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사로잡혔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사로잡혔느냐 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온통 돈에, 명예에, 쾌락에, 질병에,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것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국회의원이었던 작가 김홍신 씨가 <인생사용 설명서>에서 자신이 담배를 끊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는 37년 6개월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폐암의 위험이 있거나 간접적인 살인 행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끊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담배를 끊지 못했답니다.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보통 서너 갑의 담배를 피웠고,‘죽는 날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수필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스승께서 던지신 한 마디 말씀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는 것입니다.“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그는 마음에 결단을 합니다.‘세상을 끌고 가도 시원찮은데, 담배한테 끌려 다니다니!’그는 37년 6개월간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에게 끌려 다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 지인들이‘참 독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홍신 씨는 말합니다. 독극물을 삼키는 사람이 독한 사람이지 어찌 버린 사람이 독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언제까지 마구잡이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이제야말로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에게 붙잡혔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앞이 보입니다. 선명하게 보입니다. 더 좋은 것에 눈이 뜨이지 않았는데, 어찌 세상 좋은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서는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계산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되 즐겁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힘든 것은 자기 힘으로 하려니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로잡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고 주님이 하라는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며 쉽습니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누구는 사로잡아 주시고 누구는 사로잡아 주시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여러 번 사로잡으시려고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가 미꾸라지 처럼 요리저리 빠져나가니 잡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로잡아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주도에 갔다가 이기풍목사님 제주도 선교기념관에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기풍목사님은 190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 7명의 목사님 중 한분입니다. 이 분은 주먹을 쓰는 깡패였는데,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져 행패를 자주 부렸는데, 마포삼열 선교사님의 사진을 보면 턱에 큰 흉터가 있는데, 이기풍목사가 던진 돌 때문에 생긴 상처입니다. 그러다가 꿈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나타나 '기풍아 기풍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복음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가서 제주 선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갖가지 우상숭배로 가득 차있는 영적으로 너무나 어두운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굶주리기도 하면서도 일생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당시에 잘 살다 간 사람들, 일제와 함께 손잡고 온갖 영광 누렸던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할까 겁을 냅니다.
그러나 이기풍목사님은 선교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가 쓴 종이 한장, 그가 신던 신발 짝 하나도 찾아 전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기풍목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까? 선교 기념관에 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윤함애 사모님께서 남기신 유언장이 있었습니다. 그 첫 머리에“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하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바라보고 사셨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분들을 사로잡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살려면 삶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 잡다한 것에 시간낭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립니다.
이제 인생 전체를 거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위에서 주시는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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