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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마태복음 16: 13~20

by 【고동엽】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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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다윗 왕을 아실 겁니다.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다윗 왕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이라는 말이 800번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 중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말씀하실 때마다 “내 종 다윗처럼” 하고 복을 주셨고, 벌을 주실 때는 “내 종 다윗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축복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이 표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본래 베들레헴 들의 목장입니다. 그저 양을 치는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명령하십니다. “아무래도 사울 왕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네가 비밀리에 이새의 집에 가서 한 아들을 택하고 기름을 부어라.” 이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병을 준비해 가지고 이새의 집에 찾아갑니다. “너희 집 아들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사람이 있다. 내가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 아들을 보여라.”
이새에게는 아들이 8명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빼놓고 일곱 사람만을 불러 사열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고 계시해 주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물어봅니다. “아들이 이게 전부인가?” 그러자 아버지 이새는 한 명 더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는 아닐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를 불러놓고 보니 다윗이었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였습니다.
왜소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감성이 있고, 그리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이 불그스레한데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 걸 알고서 꿇어 앉혀 놓고는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이 왕이 되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는 형제들이 볼 때나, 아버지가 볼 때도 외모가 시원치 않았어요.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리고는 다윗을 왕으로 지명하십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다윗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대장을 물맷돌로 때려눕힌 자가 아닙니까? 그 어린 소년이 글쎄, 물맷돌을 가지고 블레셋의 골리앗을 향해 던질 때 했던 말이 너무나 유명하지 않습니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 유명한 신앙고백을 다윗이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고 사람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 왕도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영광을 누릴 때 밧세바 사건이 일어납니다. 크게 실수합니다. 자기의 충성된 장수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할 때,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는 장수를 향해서 “저 놈의 목을 베라.” 하고 말했다면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훌륭한 점입니다. 오히려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외모는 시원치 않았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허물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모든 인류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표본이 되었는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이 진실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었습니다.

<중심에서 향하는 하나님 사랑은 성전 중심으로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로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행동은 진실하지 않아요. 그러나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왕이 되어 다윗 성을 건설한 다음에 백향목 궁전을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영광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수달피 가죽 천막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 나는 이렇게 영광을 누리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 속에 있도다! 이건 안 된다.’ 해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의 법궤를 위하여,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성전 지을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가 나옵니다. 마치 하나님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죠.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 다윗아.” 왜 그러셨을까요? 자발적으로 한 것이니깐요.
그뿐이 아닙니다. 더 귀중한 게 있어요. 가장 영광을 누리고 있는 때에 생각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 영광된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위대한 겁니다. 오늘 다윗은 최고로 영광을 누리는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집을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표현하겠습니다. “너는 네 집을 지어라. 나는 네 나라 위를 영원히 존귀케 하리라.” 여기서 ‘영원히’는 예수님 탄생까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이런 축복을 다윗에게 주신 거예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형통하는 날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교회 있을 때 낮에 잠깐 들어오면 한 20분 정도 여기저기 기도를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만나고 나갈 때 “기도하러 오셨어요?” 하고 물으면 “예, 그렇습니다.” 하시면서 누구는 아들이 병이 들고, 남편이 병원에 있고, 사업이 망했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도하러 온 사람 중에 “일이 잘 되어서요. 아이가 성공해서요. 그래서 기도하러 왔어요.”라고 말하는 분들은 없어요. 우리 인간의 얄팍한 생각이지요. 대학 시험 볼 때 되면 수백 명이 와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저를 붙들고 “기도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하십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다윗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까요? 그는 자신이 영광스러울 때, 성공했을 때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아주 귀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십니다.
다윗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이었어요. 성전을 사모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편 84편에 절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가 소망교회를 창립한 이후에 분당에도 짓고 하면서 은퇴한 다음에 다섯 교회를 창립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네 번째 이천에다가 교회를 시작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인데 언덕을 넘을 때 보니까 교회가 불에 타고 있었어요. 빨갛게 불타는 걸 보면서 엎드려서 울었어요. “하나님, 교회를 짓게 해 주세요! 제 생전에 이 교회를 보고 살게요.” 그래서 목사가 되고 교회를 짓는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성전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죠. 이거 지을 때 핍박 참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피아노도 없는 교회가 많고, 전자 오르간도 있는데 왜 파이프 오르간이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집은 얼마짜리요?” 하고 물이니 “5억”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건 4억 5천입니다. 당신 집값이랑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건 400년 쓴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게 잘못된 겁니까?” 하고 말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솔로몬 왕이 다윗의 명령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습니다. 짓고 나서 그가 헌당식 할 때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절절합니다. “하나님, 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세요.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 멀리 갔거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는 복을 주세요. 죄를 짓고 포로로 되어 간 그 자리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다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에도 언제든지 그렇게 합니다. 성전을 향하고, 성전을 사랑하고, 여호와의 집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을 말할 때, 우리는 그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사도가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그런 경우였지만 바울은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엄격한 율법을 따라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깜짝 놀랍니다. 그가 핍박한 건 교회였지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러분, 여기서 사도 바울의 회심이 일어납니다. 교회관이 바뀝니다. 교회관이 중생합니다. 이것이 신학의 근본이요 오늘의 교회를 이룬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을 향하여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교회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교회를 공동체로 생각하는 분이 많아요. 전 그래서 ‘공동체’란 단어 자체를 싫어합니다. 교회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신령한 진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분은 구제 기관으로도 생각하고, 정치구현의 단체로도 생각하고, 인권 운동을 하는 곳으로도 생각하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교회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예수 이름을 부르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역사합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급속도로 세워졌는지 생각할 만하지만 그 사건은 하나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기도 시간에 올라가는데 교회 문간에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그가 또 손을 내밉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이 중요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는 생각했을 거예요. ‘은과 금이 없어? 그럼 그냥 지나가라.’ 그런데 엉뚱한 말이 들립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벌떡 일어납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기초입니다. 이 사건이 온 마을에 불붙듯이 일어나면서 초대 교회가 된 겁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예수님의 생명력이 작용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이 함께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에 주의 영광이 함께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오늘 본문에 또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더니 예수님이 아주 기뻐하시면서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섭섭했을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면 “아, 3년 동안 많이 배웠구나 베드로야. 많이 나아졌구나. 제법 쓸 만하구나.” 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한 것이다. 네 지식이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다. 선택적 축복이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런 다음 말씀을 잘 보세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마 16:20 중) 여러분, 주님을 제외하고 교회를 말하면 안 됩니다.교회는 천국 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 자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를 택하신 백성으로 하늘나라로 옮겨 가십니다. 하늘문, 이 얼마나 귀한 이야기입니까? 참 귀한 이야기입니다.
작년 이때에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보니까 며칠 동안 기도를 하는데, 그 소리가 제법 커요. “하나님, 하늘문을 열어 주세요. 하늘문을 열어 주세요.” 계속 기도하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하나님도 다 들으셨을 거야.” 그런데 정말 하늘문이 열리는 걸 보고 “오, 하나님!” 하더니 갔어요.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고백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땅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입니까?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늘문,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생명의 신비를 아셔야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의 신비는 어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식물을 한번 보세요. 조그마한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야말로 식물적 생명의 신비입니다. 동물적 생명의 신비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성. 이것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한 다음에 생명,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적 단계의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부활’이란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연구해 보면 ‘부활’보다 ‘변화’라는 말이 더 많습니다. 40회나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그 첫 단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셨고, 그 다음에 우리가 따라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적 단계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부활 생명을 위한 에이전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얻고, 시련을 이기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적 생명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 만나는 감격을 얻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생명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병자가 치유받고, 능력을 얻고, 문제의 해결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이뿐만 아니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서 능력을 체험하고, 또 능력을 얻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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