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7,537편)〓/유기성 목사 설교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도행전 18장 12-23절

by 고동엽. 2023. 1. 24.

2009.11.22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41)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도행전 1812-23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우리는 121일부터 두달 간의 특별 기도에 들어갑니다. 작년에 시작한 2개월의 기도로 올해 우리 교회는 놀라운 기도의 역사,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올해는 2개월의 기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놀라운 기도의 응답과 기적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번 추수감사 헌금을 교우들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라에 놀라운 은혜도 주셨고 교회에도 놀라운 복을 주셨지만, 성도들의 삶 속에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년보다 더 어렵다는 분도 많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두달 동안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새해를 맞으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와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을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고 또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기적의 삶이 2010년에 사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되 나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지는 말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되기를 갈망합니다.

저도 제가 소원하는대로 되기를 갈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갑자기 한 생각을 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무엇을 알기에 무엇이 되고 안되고를 갈망하는가?’ 그리고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포기했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여러분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로 순종하여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원을 세우신 대천덕 신부님께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역의 길은 막히고 목회만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가르치는 사역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기도를 바꾸었답니다. “목회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즐겁게 하게 해 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작 그렇게 기도하지!” 그 뒤부터 정말 목회가 너무나 즐거워지더랍니다. 얼마 후 한국에 신학교 학장으로 오게 되어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가르칠 때 목회 경험이 가르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소원대로 해 주세요.”가 아니고, “하나님 저를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이 인도하는대로 가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환란도 고생도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골짜기를 지나가면 푸른 초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만 가면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너무나 강하게 드러나 있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강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도 바울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두려워 떨었고 고린도 전도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오랫 동안 전도해서 열매 맺을 것 같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주님의 이 응답을 듣고 사도 바울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눈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들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고린도에서는 도무지 전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의 판단을 꺾고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 내 눈에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다른지 깜짝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 주님의 인도하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중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갈리오라는 새 총독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새 총독이 부임해 올 때를 이용하여 사도 바울을 총독에게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율법대로 처벌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형권은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형은 반드시 총독이 재판권을 행사해서 판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굳이 총독에게 가서 율법을 범했으니 사도 바울을 사형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이 보면유대인들은 다수입니다.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이용하면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 죽이고 유대인들 마음을 사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예수를 재판한 빌라도 총독이 그러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죽이라고 하니까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난감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끝인가?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주님의 응답은 너를 해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상황은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의 언어와 법에 관한 것이면 내가 상관하지 않겠다." 하며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하고 유대인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이것은 예상 외의 결과였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이 정치적인 사람이지만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렸을까요?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에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뜻이 좌절 당한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가 안식일마다 사도 바울에게 회당에서 강론하도록 허락했다고 재판석 앞에서 소스데네를 잡아 때렸습니다. 총독이 이 일은 가만 내버려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영향력에 대하여 신경쓰고 있었다는 말인데, 유대인들의 요구를 거절한 일이 정말 신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낙심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만 확인되면 담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대신 매를 맞은 소스데네도 잠시 억울하고 괴로웠겠지만 매 맞은 것이 복이 되었습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과 같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가가 다 구원받고 자녀들이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절에 보면󰡒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소스데네는 사도 바울과 동역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 날 소스데네가 사도 바울을 대신하여 매를 맞은 일을 계기로 그때부터 바울과 동역자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입니다. 소스데네가 복음 때문에 매 맞았다는 것이 그를 초대 교회의 존귀한 위치에 세워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 당한다면 마음으로는 정말 기뻐할 일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단 하나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핍박이 있다면 손해본 일이 있다면 그것이 복인 줄 믿으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떠나 외항 겐그레아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고는 에베소로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서원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했는지는 본문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에 무언가 간절한 갈망이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여자 분들이 미장원에서 파마 하나를 해도 다 뜻이 있다고 합니다.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으니까 머리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머리를 삭발했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 있었으면 삭발을 했겠느냐 말입니다.

누구든지 전도 여행을 해 보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제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하는 갈망입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초기에는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왜 이름을 바꿉니까? 큰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간절한 갈망이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말기에는 머리를 깎고 서원했습니다. 바울이 매 순간 얼마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랬을까? 전도 여행을 가보면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단기 선교라도 떠나보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갈망했을까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믿어집니다. “하나님, 제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절망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저를 인도하신다면 저는 편안합니다. 하나님, 저를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제 길을 지켜주시고 주님이 인도해 주셔요.” 이런 간절한 갈망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름도 바꾸고 머리도 깎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사명으로 살기 시작하면 여러분도 똑같아집니다. “하나님, 저를 인도해 주셔요.” 이런 갈망이 누구나 다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아홉 장로님 부부가 교회 전임 사역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12일 수련회에 들어가서 결단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결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남은 생애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사역을 하겠습니다.” 고백한 것입니다. 한결같이 눈물로 결단하셨습니다.

 

지난 주간 훈련받은 장로님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일본에 계신 형제 교회 네분 목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한분 한분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였는데, 불이었습니다. 버스 안의 기도가 우리 교회 본당에서 드리는 기도 같았습니다. 그 만큼 간절하였습니다. “주여, 일본에 선교사로 와있는 목사님들을 인도해 주셔요.” 그것이 모든 기도였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매사에 선교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가아사랴로 가려할 때,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더 머물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너무너무 좋아 그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가지 마시고 여기 더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계속 전해 주십시오.” 그 때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하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한결같은 태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그러면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각, 자신이 좋고 싫은 것, 자신의 감정, 자신의 계획을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그처럼 간절히 붙잡으면 그래 있어주자.” 할만도 한데 그는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있고 싶다고 있어 본 적이 없고, 자신이 가고 싶다고 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더 있는 것 아니야!’ 그러면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고린도에서는 사람들이 다 내몰려고 했었습니다. 회당에서 설교도 못하게 하고. 그런 곳에 더 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아!’ 그러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자기가 좋아서 있었던 적도 없고, 자기가 싫다고 떠난 적도 없었습니다.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로마까지 전도 여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만 하더라도 3년이 소요된 수륙 모두 3km의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든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좋고 싫음과 자신의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굳이 찾아갑니다. 가서 오래 머문 것도 아닙니다. 간단한 안부만 전하고 안디옥을 돌아갑니다. 문안했다는 얘기는 2차 전도 여행 보고를 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요즘같이 메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교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 도대체 이방인 선교는 어떻게 되는지 교회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가이샤라에서 104Km나 떨어져 있고, 다시 안디옥까지는 480km를 가야 했습니다. 간단한 안부만 전하기에는 너무나 먼 여행입니다. 이방인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알려야 한다고 주님이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여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네가 그 동안에 2차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있었던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해야 된다. 교회가 알고 있어야지 하나님께 정확하게 기도할 것이 아닙니까? 보고 한번 하려고 104km 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다시 480km나 되는 안디옥으로 내려가는 이런 수고를 사도 바울은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가서 보고하라고 그러면 그냥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인도하는대로 입니다.

그리고 다시 3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대단하지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떠났던 길을 가만히 km를 합산해 보면 3km나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만약에 자기 감정, 자기 원하는 것, 자기 계획대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그런 것이 앞섰다면 아마 그는 이런 전도 여행은 못했을 것입니다. 3차 전도 여행까지 끝내고 이제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순교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 여행은 끝납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런 선교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있고 주님의 뜻이면 갔던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사도 바울에게 다른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했다면 이제 우리의 삶에도 똑같은 원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마음 중심에 계시지만, 뭔가 내놓을 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이 원칙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정말 뭔가 거둘 것이 있으려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살았던 유일한 원칙인 주님의 뜻이라면으로 여러분도 살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23절부터가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정말 사도 바울의 삶은 주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맡긴 삶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평생 씨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일본에서 사역 장로 수련회를 가졌는데 후지산에 이틀을 갔다가 정작 후지산을 보지 못하고 왔습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덮여서 후지산에 있으면서도 후지산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목사님은 여행 중에 내내 안타까와 하며 계속 구름 덮힌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가 후지산입니다. 저기 후지산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후지산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감동은 없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름 보고 감동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때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알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만 아니라 믿는다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우리 눈을 가리워서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얼마든지 믿고 볼 수 있는데도 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믿습니다.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만으로는 감동이 없습니다. 성질 하나 바꾸지 못합니다. 기분 하나 바꾸지 않습니다.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 하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막연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예수님, 천국에 가서 만날 그 예수님이 실제로 지금 내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믿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도 내 안에 계시는 놀라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분 하나가 안 바뀝니다. 짜증스럽고 힘들고 슬픈 이 기분 하나가 안 바뀝니다. 성질 하나가 안 바뀝니다.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뀝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며 성질 기분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뀌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후지산에 가있으면서도 후지산 감동이 없습니다. 구름에 가려있으니까. 예수님 내 마음에 모신 것도 내 눈이 세상에 완전히 가려있으면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성질 하나 안 바뀌고 기분 하나 안 바뀌고 불평 원망 하나 안 바뀌는 이런 기가 막힌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과 친밀함에 눈이 뜨여야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위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정말 그 문제를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것이 아니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눈이 영적으로 가리워져 있는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고 아무리 머리로 믿어도 실제로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능력도 없단 말입니다. 눈 뜨게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주님과의 친밀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깊이가 차이가 납니다.

 

 

우리 교회 임원 훈련 교재로 정한 [종의 마음]은 토미테니와 데이빗케이프 목사님이 함께 쓰신 책인데, 케이프목사님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목회를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아내 캐롤과 자녀들은 트레일러를 타고, 그는 대야가 달린 나무 십자가를 메고 주님이 명령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겨줌으로 목회할 때와는 비교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창녀에서 NBA 스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위험한 상황에서도 전 세계를 다니며 발을 씻겨주는 사역을 20여년 동안 지속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담임할 때보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오물이 떠다니는 하수구에서 무릎 꿇고 발을 씻겨줄 때 가정이 회복되었고, 나병 환자의 발을 씻겨줄 때 그의 병이 치유되며, 마약과 알콜 중독이 끊어지는 등 놀라운 기적이 계속되었습니다.

케이프목사님이 이렇게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은 언제나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 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의 음성에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가라고 하는 곳, 주님이 만나라고 하는 모든 이들을 향하여 기쁨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온전한 순종이 가정을, 직장을, 교회를, 민족을 어둠의 속박에서 끊어 버리고 해방 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 선한목자 교회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출석 교인이 만 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를 1천 명 파송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더욱 분명한 교회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

모든 교우들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그 점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 하나 외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할 때 위기가 오는 이유는 예수님 보다는 교회 규모나 예배나 집회의 화려하고 웅장함, 유명한 사람들, 매력적인 교회 프로그램이나 활동, 예산이나 선교사의 수 등이 예수님보다 더욱 주목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에 굉장한 영향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당에 꽉 찼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을 받는 것은 좋겠지만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은 흐려져 버리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목회 프로그램이 좋고 또 사업이 많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자꾸 소홀해집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핵심인데, 사람을 보느라고 어떤 큰 행사를 보느라고 정작 예수님 바라보는 마음은 점점점 식어져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렇게 빠져버렸는지 모릅니다.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고 프로그램 중심 행사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교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점점 더 부흥 되면 그냥 예배 시간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정작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오히려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여 은혜 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기인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커지면서 오는 위기가 예수님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미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도 기대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람이나 조직이 움직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수나 사역의 내용과 규모는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셔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생각이나 판단, 꿈이나 계획과 다르게 주님이 인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절박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예배당이 큰 굴처럼 되어져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강단 밑에서 추운 겨울날 담요 뒤집어쓰고 눈물로 기도하던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예배당이 지어진 것입니다. 예배당 인테리어 다 뜯어내고 나면 콘크리트가 나오는데 거기에 성도들의 기도 제목들이 빼곡히 쓰여져 있습니다. 아마 그때를 보지 못하던 분들은 정말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는 복받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현실이 너무 어려우니까. 모든 것이 풍성해질 때가 언제나 우리에게는 영적인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건강하게 될 수 있는 핵심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지금보다도 더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의 주인이 예수님 맞습니까? 그 점을 아직도 분명히 모른다면 그것이 위기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생기면 전체 분위기를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시기 바로 전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 인생에서 단 한번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떤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십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 기도가 사는 길이고 그 기도 속에 진짜 복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미래에 대해 어떤 길이 선한 길인지 더 잘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서 "하나님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입니까?" 기도하며 하나님 우선, 하나님 제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제 전심으로 기도하게 될터인데 기도의 제목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