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릿 시냇가의 역설적 축복/ 20001129 삼일밤 예배
2001-12-08 17:55:10 read : 437
열왕기상 17장 1-9절
행복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대답은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은 물질 및 쾌락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의외로 행복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소박하고 가난한 것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그릿 시냇가로 피신한 엘리야 이야기는
행복은 소박한 것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숨이 위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피신시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피신시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아마 매일 하나님을 체험하는 행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릿 시냇가로 왔는데 그곳 물이 마른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일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다시 시돈 지방의 사르밧으로 인도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바로 사르밧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릿 시냇가로 인도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반드시 책임지신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죽을 줄 알면서도 용기 있게 아합 왕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용기가 무조건 전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러설 줄 아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용기입니다.
상황이 심각하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야는 "어떻게 비겁하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비겁하게 보든,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절제된 용기는 하나님이 보증하시지만 만용은 축복을 끊고 생명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릿 시냇가로 가보니까 살기 힘든 환경입니다.
그래도 순종하고 머무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결국 얼마 후에 그릿 시냇가가 마르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일어나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니까
엘리야는 지체없이 일어나 시돈 땅 사르밧 지역으로 갑니다.
이런 일련의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불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철저히 순종하면 반드시 그 삶을 보증해 주십니다.
그리고 순종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 어디서나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동물이 가장 값이 나갈까요?
체격이 크고 잘 생긴 것일까요? 근 수가 많이 나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은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훈련이 잘된 것입니다.
사육사들의 말에 의하면 훈련이 잘된 개는 며칠간 굶긴 다음에
맛있는 고기 덩어리를 주어도 주인의 허락 전에는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개는 명견이 되고, 값이 많이 나가는 가치 있는 개가 됩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을 명마라고 합니까?
주인의 말에 철저히 순종하는 훈련이 잘된 말을 명마라고 합니다.
그런 명마들은 며칠간 사막 길을 다니고 난 후에 그 앞에 물을 주어도
주인의 물을 먹으라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 물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 말들은 명마가 되어 몇십 억 원의 가치가 나갑니다. 순종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소중한 가치를 따라 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 공동체의 원리에 순종하고,
자기의 직분이 주는 무언의 명령에 순종할 때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비전을 주십니다.
그 거룩한 비전도 하나님의 무언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열매가 있겠느냐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은 우리가 못하고 우리 후대가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충성하고, 끝까지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인도한 장소에서도 축복의 샘이 마를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로 갔는데 그곳이 말라버립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한 장소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한 장소에서도 축복의 샘이 마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것이 다른 축복의 샘이 예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마르지만 끊어지지 않는 역설적인 축복이 바로 성도의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조그만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셨을까요?
요단강이나 갈릴리 호수로 인도하셨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한 가지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강물의 축복도 있지만 시냇물의 축복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개 한꺼번에 다 주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양이 적어서 마르는 것 같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요단강과 같은 마르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 축복과 하나님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축복>보다 <적어도 끊어지지 않는 축복>이 더 좋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만나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식량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일 매일 정한 시간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만나를 통해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새 성경 통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소중한 프로그램입니다.
단시일 내에 한번 성경을 읽었다는 뿌듯한 자부심도 있고, 은혜도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하고, 영혼을 살지게 하는 것은 매일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하나님의 축복이 마르게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더욱 더 찾으라고 하나님은 마르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무엇을 원하실까요?
더 겸손한 사람, 사용하시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마르는 축복을 허락하시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축복이 마르는 것과 같을 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마르는 부분을 이용해 더욱 큰 축복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3. 부족함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고 부족함을 감사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릿 시냇가의 마른 시내를 보고 엘리야를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때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러분! 부족함에도 감사의 조건이 있음을 알고 부족함을 감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혼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넉넉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 약간 부족한 듯한 때에 숟가락을 놓아야 건강해지는 것처럼,
사실상 약간 부족한 것이 있어야 인생 살 맛이 있고, 영혼도 건강해집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다면 아마 그것은 영혼이 병드는 길로 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두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 사실상 축복입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인 어떤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가진 것을 다 가진 분이었습니다.
돈도 있었고, 명예도 있고, 지식도 있었고, 그리고 미모도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출중한 미모로 많은 남자의 시선을 받았고,
피아노도 잘 쳐서 교회 피아노 반주는 그분이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식 2명이 속을 썩였습니다.
그리고 50이 넘어서면서 류마치스 관절염 때문에 밤마다 고통 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그분이 점차 겸손하게 변했습니다.
결국 아들문제, 건강문제로 그분의 모난 성격은 변화되고 영혼은 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찬송가 반주를 하면서 그 가사에서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던 분이
자식의 부족과 건강의 부족으로 찬송가 가사만 대해도 감동하는 분으로 되었습니다.
부족함으로 인해 그분은 오히려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가끔 보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축복을 받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도 평생 건강 문제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정말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건강했다면 훨씬 더 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 중에 믿음이 커져서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고, 기도 응답이 완벽하게 되어야만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은 늘 한두 가지 정도의 기도제목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드리는 시간을 가진 사람이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족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기도의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그래서 더욱 발전의 가능성이 많아지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족한 건강을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표현을 보면 보통 아픈 기도 제목이 아닌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병을 안질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간질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사단의 가시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원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 남겨둔 부족함으로 인해 너무 실망하지 말고,
그 부족함이 나의 건강과 나의 아름다운 인격을 위한 것임을 알고
더욱 인격과 영혼을 단장하는데 힘쓰는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구체적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가져왔는데
누가 보냈을까요? 사실상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할 때 더욱 가까이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꾸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대개 부족한 친구를 멀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가 부족하면 더 가까이 오시는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가끔 주님을 친구라고 표현하는데, 왜 친구라고 합니까?
주님은 사람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한 잡지사에서 친구에 대한 정의를 공모했습니다.
그러자 수천 가지 정의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서 이런 정의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배가시키며 슬픔을 나누는 사람이다."
"친구란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친구란 약속한 바를 잘 지키는 정확한 시계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대상을 차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 정의였습니다.
그것은 "친구란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 오는 사람이다"라는 정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원하신 친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오히려 우리를 더 찾아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왜 자기가 감추어진 겸손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부족함을 느낄 때 부족함과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보다,
사실상 우리가 부족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장작을 패는데, 한 사람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일합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니까 커다란 장작더미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50분간 일하고 10분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때 보니까 쉬지 않고 일한 사람보다 더 큰 장작더미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을까요?
10분 동안 휴식했던 사람은 쉬면서 도끼 날을 갈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경건의 시간은 도끼 날을 가는 것과 같은 시간입니다.
인생 경주에서는 빠른 자가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빠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는 가장 바른 방향을 잡게 됩니까? 기도할 때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빵을 위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꼭 필요한 이유는 가장 바른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신앙도 견고해지고, 삶에 실제적인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나무가 풀보다 자라는 속도는 느리지만 훨씬 견고하게 자랍니다.
그 이유는 겨울도 맞아가면서 잎도 떨어져가면서 천천히 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부족함은 반드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힘을 얻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길이 전혀 없을 것 같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은 반드시 열립니다.
그 길은 우리의 공식에 맞는 길이 아니고 상상을 초월하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도 불행해 하지 마십시오.
내일에 대한 소망을 결코 잃지 마십시오.
내일 난데없는 축복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대개 자살하는 인간은 불행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떠오르지 않을 태양을 지레 짐작하고
희망을 져버리기 때문에 자살한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축복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축복의 원리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축복은 많이 가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참으로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한 분들은 그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한 그릇이 축복의 조건이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장마철에는 사람들이 비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비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가물 때에는 가랑비조차도 축복의 조건이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사람을 타락시킬 뿐만이 아니라
행복감을 무너뜨리게 되고 인간관계도 깨어지게 됩니다.
어린애를 한번 보십시오. 어린애는 비스켓 하나만 가지고도
한시간 이상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심령도 이와 같은 어린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와 같이 순수하고 소박하고 어린 심령이 될 때
오히려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 엘리야의 까마귀 사건을 볼 때마다 항상 우리 교회가 생각납니다.
분당에서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마치 그릿 시냇가의 삶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저희들에게 까마귀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마다 채워주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 어떤 교회들을 보면 한꺼번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부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하나 차근차근 채워지는 것이 더욱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동행하심을 더욱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홍수 같은 축복이 아닌 마르는 축복의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어려운 문제 속에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저 묵묵하게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까마귀를 보내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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