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바른 삶// 20010624
2001-12-08 17:27:37 read : 189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22장 1-14절
오늘 본문에는 천국은 임금의 혼인 잔치와 같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종을 보내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재차 종을 보내어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고 여러 핑계를 대면서 자기 일에만 매달리고(5절),
심지어는 임금의 종들을 잡아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합니다(6절).
그러자 임금은 종들을 시켜 아무나 데리고 와서 잔치에 참석하게 합니다.
이 비유가 우리들에게 주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
먼저 본문의 비유는 기독교가 기쁨의 종교임을 잘 말해줍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쉽게 말하면 천국은 사랑하는 자녀를 결혼시길 때 베푸는 잔치와 같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기쁨이 많겠습니까?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지 슬픔의 종교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공포와 불안과 번민과 전쟁을 끝내고 기쁨을 생성시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슬퍼하고 침울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모르나
구원에 확신이 있는 성도들은 항상 즐거움에 찬 생활을 해야합니다.
특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기쁨이 넘치는 천국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천국 잔치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얻은 기쁨이 바로 진정한 기쁨이며,
이 기쁨으로 한 주간의 생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이기게 됩니다.
성경은 천국이 네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기쁨이 넘치는 마음이 천국입니다.
그처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은 성도들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는 진짜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
그리고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를 잘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 9-10절에서 누구나 잔치에 초청된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천국잔치에 초대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처럼 무슨 특권을 가지고 자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우리가 좀더 의롭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보다 의롭고 착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래도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의 때에 은혜를 거절하면 나중에 끌려가든지 멸망하든지 할 것입니다.
요즘 보면 본문의 천국잔치와 같은 사랑의 초청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초청이 사랑의 초청이라고 느껴지면 최선을 다해 그 초청에 응하십시오.
초청에 응하는 자가 되려면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이나 상황을 버려야 합니다.
초청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 우리는 천국 교제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의 초청을 많이 하시고, 사랑이 초청에 많이 응하시기를 바랍니다.
<. 은혜 받은 자답게 사십시오 >
결국 많은 사람들이 임금님의 은혜로 천국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잔치에 들어와 보고 그 사람을 책망합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저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니까 임금이 그 예복 입지 않은 자를 쫓아냅니다.
왜 쫓아냅니까? 은혜의 자리로 초대했으면서 왜 이렇게 박대합니까?
왜냐하면 임금에게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적어도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고마우면 은혜를 베푼 분에 뜻에 맞춰 행동해야 합니다.
은혜는 선물이지만 은혜를 받고 거기서 끝나면 그 은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베푼 자에게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감사를 아는 마음! 그래서 은혜를 베푼 자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참 자유인의 자세이며, 거룩한 예복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외적인 행동이 완벽히 거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감사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왜 임금의 예복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옷이 편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하게만 살 수 없습니다.
임금의 잔치에 참석했으면 임금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임금의 백성답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마련해주신 예복을 입으려는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잔치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복은 싫어합니다.
예복은 같은 복장이기에 달라 보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 복장을 고집합니다.
그렇게 고집하다가 더 나아가서는 자기 복장이 좋지 않느냐고 억지를 부립니다.
임금의 뜻은 따로 있는데 자기 복장을 고집하면 그는 외톨이가 됩니다.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임금의 잔치에 참석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임금이 정한 법칙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모습은 우리 모두의 심리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극복할 때 우리는 더욱 쓸모 있는 하나님의 재목이 될 것입니다.
< 규칙을 지키는 분이 되십시오 >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는 따먹으면 안된다는 법칙을 정했습니다.
그 법칙을 따르면 에덴이 모든 축복이 내 것이 될 수 잇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원죄가 생겨났습니다. 임금의 법칙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가든지 그 곳의 법칙을 존중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자세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정한 법칙에 이의를 달지 않고 따르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세상 규칙도 잘 따르려는 사람이 교회생활도 잘합니다.
세상 법칙이 마음에 안든다고 씩씩대는 분을 보면 교회생활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타일에 완벽하게 맞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교인이 목사님과 함께 외국에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제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 오후 5시 10분쯤 면허시험장에 갔습니다.
그곳 직원이 말합니다. "국제운전면허증 발급은 5시 이전에 오셔야 합니다."
그러자 이 교인이 고집을 핍니다. "공무원은 6시까지 근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면허증 발급규정이 그렇다고 하니까 이 교인이 막무가내로 주장합니다.
"아니, 공무원이 국민의 편의를 위해서 봉사해야지 그러면 됩니까?
멀리서 왔는데, 발급하는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안해줍니까?
누가 이런 규정을 만들었습니까?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욕을 먹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막 나가니까 할 수 없이 창구 직원이 면허증을 발급해주었습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목사님이 염려를 합니다.
"저 집사님이 하는 행동을 보니까 교회생활도 염려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일이 있은 지 꼭 6개월 후에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그 교회를 떠나더랍니다.
내게 불편이 있어도 규칙에 순종하는 자세는 정말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뿌리를 내립니다.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편과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기에 신앙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적당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믿을 때에도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게 참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적당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위해 절제하는 믿음과 적당히 믿는 믿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매년 입시철이 되면 가끔 이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교회 중직 자녀인데 고 3이 되었다고 부모가 적당히 믿으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면서 적당히 믿어도 좋은 대학에 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듯하게 덧붙입니다.
믿음생활 오래 한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이 이처럼 적당히 둘러 붙이는 것입니다.
결혼 문제에서도 자주 그런 장면을 봅니다.
사윗감을 고르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이 늦더라도 믿음의 결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윗감이 정말 좋다면 결혼을 늦추고 그의 전도를 위해 먼저 힘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 노력도 없이 다른 조건만 좋다고 무조건 결혼시키며 뭐라 말합니까?
"결혼 후에 전도하면 돼! 그러면 한 사람 전도하는 것이다." 그게 쉽습니까?
하여튼 잘못 오래 믿으면 적당히 둘러 붙이고 갖다 붙이는 데에는 선수가 됩니다.
믿음생활을 오래 하면서 적당히 둘러 붙이는데 선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결혼하는 경우가 간혹 있을 수도 있겠지만
믿음의 결혼을 위해 최선을 노력을 다하는 일을 생략하고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적당히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는 하되 자기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잔치는 좋지만 예복을 입는 것은 싫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복된 자세일까요?
그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부분 후회합니다. 13절 하반부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엄청나게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버림을 받게 되고, 나중에 그것을 반드시 후회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대개 이런 후회와 아픔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복은 순종의 징표입니다. 예복을 입기를 즐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문제와 갈등과 아픔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가운데 살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예복을 입고 천국 잔치의 즐거움에 동참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십시오 >
그리고 잔치에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은 예배 자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에 초대를 받을 때 그 사람의 차림세가 그 마음을 나타냅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반바지 입고 작업복을 입은 채로 가면 대단한 실례입니다.
주인의 입장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잔치를 빛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한 사람을 생각해주는 것입니다. 깨끗한 옷은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리고 옷은 신분을 구분해줍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선수는 선수복을 입습니다.
그처럼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옷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때에 옷차림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비싼 옷을 입고 교회에 오라는 얘기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최고의 것을 준비하고 오는 것이 성도의 예절인 줄 믿습니다.
예배 드리러 올 때 어떻게 오십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십니까?
예배를 위한 기도는 하십니까? "하나님! 오늘도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한 기도의 옷도 준비하고 예배에 참석해야 하늘 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날을 안식일의 예비일이라고 해서 안식일을 준비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토요일부터 예배를 준비하면
반드시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토요일은 어떤 날입니까?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때에는 가까운 사람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예배를 생각합니다.
그처럼 무엇이든지 준비가 철저히 하면 어떤 것을 하든지 성공하지 않습니까?
예배에 있어서도 미리 예배를 준비하는 분들이 성공적인 예배자가 될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그냥 드리지 마십시오. 꼭 열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드리십시오.
< 핑계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
무엇보다 중요한 마음은 예배는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기 밭과 자기 사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농사와 사업을 지켜주지 않으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집니까?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그 어떤 시간보다 예배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일을 외면하고 돈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악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탐욕을 가지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이지만 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돈은 선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을 잘 관리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스피드 시대가 되면서 움켜쥐는 구두쇠가 돈 버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려면 돈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얼마 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 맘에 안 드는 내용들이 많지만 한 가지 맘에 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보면 가난한 아빠는 말합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베풀 것이다."
그러나 부자 아빠는 말합니다.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단체에 기부금 내는 데에도 많이 내라 그래야 부자가 된다."
정보화 시대에 선한 일로 좋은 소문이 나면 금방 길이 열리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제는 구두쇠가 돈 버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베풀고 좋은 소문 내는 자가 돈을 법니다.
더 나아가 우리들의 선한 일이 하나님께 소문이 들리면
우리의 모습을 갸륵하게 보시고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베푸는 삶을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터를 소중히 여기는 삶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면서까지 밭이나 사업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건전한 재미를 개발해야 합니다. 즐겁게 사십시오. 밝게 사십시오.
그러나 재미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재미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다른 어떤 일보다 예배 드리는 일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을 보면 장가들기 위해서 못간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은 정말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잘 돌봐야 합니다.
신명기 24장 5절을 보면 새로 장가든 자는 아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전쟁에도 안 나가고 직업도 일년간 쉬게 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부부는 서로 즐겁게 해 주어야 하고, 부자간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멀리하는 것이 안됩니다.
그 가정을 누가 지켜줍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정말 가정을 아낀다면 하나님께 내 가정을 드리고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은 소중한 장소이지만 하나님보다 가정이 크게 보여서는 안됩니다.
자녀는 정말 소중한 내 자녀이지만 하나님보다 자녀가 크게 보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천국 잔치가 크게 보여야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핑계는 그럴 듯 합니다.
돈도 중요하고, 즐거움도 중요하고, 내 가정과 자녀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돈과 즐거움과 가정은 참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임금의 혼인 잔치가 지금 매주일 예배 중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빈자리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임금님의 심부름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9절 말씀대로 사거리 길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천국 잔치를 위해 사람들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가 빈 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강권하여 데려오셔서 하나님의 집을 채우십시오.
그래서 그들과 천국의 기쁨을 나누고 풍성한 삶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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