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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6장19-31 / 부자와 거지 나사로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6장)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묵상/눅 16:19-31)

 

◆ 부자와 거지 나사로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다.

 

부자는 당시로는 고급 옷에 속하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잔치를 벌일 정도로 대단했고, 반면에 거지는 고운 옷 대신 온몸에 헌데(헬코스/계 16:11 '종기'로 번역)를 앓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더러운 거지가 대문에 얼쩡거리는 것이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고 가까이 오는 것도 상관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꽤 괜찮은 부자였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설정은 부자와 거지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지, 부자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하고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라고 본다.

 

이 거지는 굶주릴 뿐만 아니라, 온몸에 헌데가 나서 많은 고통 가운데 있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참으로 비참한 삶이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은 공정하지 않아보이고, 너무 비참한 사람이 많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정말 불쌍하고 억울할 사람도 많다. 그러나 반전이 기다린다. 

 

 

◆ 거지 나사로

 

오늘, 이 비유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는 명시된 것이다. 비유에서 이름이 등장하기란 쉽지 않은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름까지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가 실화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사로의 등장이 이 예화가 비유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고(요 11:11),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였다. 그리고 병들어 죽었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리셨다(요 11:41-44). 아마도 오늘 비유는 나사로를 살리시고 난 후에 하셨을 것이다.

 

오늘 예화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는 만일 죽은 자를 살려서 보내면 자기 형제들이 들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에서는 정말로 죽은 나사로가 살았음에도 바리새인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할 궁리를 했다(요 11:47-48). 바리새인들은 이런 행동들은 오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설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지라도 안 믿을 것이라는 말씀이 맞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주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연상시키기 위해서 거지의 이름을 '나사로'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 부자의 최후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무척 호화롭게 잘살았지만, 저세상에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만일 누구라도 이런 결말을 알았다면 차라리 나사로처럼 살기를 자처할 것이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짖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자기 아버지라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아브라함의 행위는 본받지 않은 자(요 8:40)들의 최후가 어떠할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라는 혈통이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게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사람들은 종종 엉뚱한 것에서 구원의 근거를 찾는다. 부모님의 헌신, 교회 봉사, 십일조... 이런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떤 구원의 근거도 없다.

 

◆ 지혜롭고 복된 자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 비유에서와는 달리 진짜 지옥에 떨어지면 이렇게 아브라함을 볼 기회도, 대화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 세상이 전부인 듯하지만, 아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진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저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진짜다. 이 세상은 잠깐이지만, 저세상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내일은 존재하지 않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정말 없을 것 같았던 내일이 오늘이 되듯이 저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죽으면 없을 것 같았던 저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무 늦는다.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느 날 불쑥 다가온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오늘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역전과 반전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가 진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지혜로운 삶일까?

 

기적이나 어떤 체험을 통해서만 믿겠다고 하는 고집과 어리석음을 버리자.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믿는 자들이 진짜 지혜롭고 복된 자다.

 

살아생전에 마귀에게 보이스피싱 당해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

 

주 예수님,

저세상이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선하신 주님, 위선을 벗어버리고 제 믿음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박종호의 '살아계신 하나님'>

https://youtu.be/Wm0D07C8Xmo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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