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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 재커라이어스)너는 내 눈동자니라/신32:10, 렘31;3

by 【고동엽】 2023. 1. 17.

너는 내 눈동자니라                       신32:10, 렘31;3                     출처

  You Are The Apple of My Eye

  

너는 나의 눈동자니라. (신 32:10, 시17:8)

호세아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었죠.

그는 창기였던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아이들은 엄마의

계속되는 매춘 행위 때문에 집에 버려졌습니다.

          

호세아는 돈을 주고 부인 고멜을 다시 데려오려고 나갑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라 명하셨기 때문이죠.

창녀촌 밖에서 고멜을 찾아 서성거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얻으려고

돈을 흥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걸로 봐서

고멜은 매력적이고 젊은 여성이었을 수도 있겠죠.

 

호세아는 그녀를 그 당시 노예의 반 값을 주고  *호3:2참조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였죠.

다른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한 선량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참 이상하군요. 당신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왜 이런 여자와 결혼했습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호세아는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제 질문에 먼저

답하신다면, 저도 답하겠습니다."

"저렇게 거룩한 하나님이 이 창녀 같은

우리나라를 왜 사랑하시는겁니까?"

 

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신 족속을

버리신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겠죠.

                

로마를 선택하시는건 어땠을까요?

엄청난 왕적인 위엄이 있지 않습니까?

로마를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기 더 쉬웠을텐데요?

 

위대한 철학자들을 지닌 그리스는요?

그 중에서도 탑 쓰리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 백만명의 인생을 더 피곤하게 만들지 않앗습니까?

                     

그들은 그림자와 실재, 동굴 등,

각종 비유와 철학 사상을 논했습니다.

이처럼 철학이 묻는 질문들이 신학과 별 차이가 없다면,

왜 그리스를 택하지 않으셨나요?

온 세상이 그분을 이해하기에 더욱 수월했을텐데요?

         

왜 바벨론을 택하지 않았으셨습니까?

바벨론의 찬란한 위용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로마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아니었고, 바벨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조그만한 한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로마에게 지배당하고, 그리스에게 무시당하며,

바벨론에겐 멸망한 나라를요.

                

"너는 내 눈동자 속의 동공(까만 작은 원)이니라" *신32:10, 시17:8

이는 영어로 쓰여진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이런 표헌이 없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이걸 "너는 내 눈동자 안의 작은 아가씨"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은 아가씨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그녀가

당신에게 가까이, 더 가까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비로소 당신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녀가 바로 '당신의 눈동자의 작은 아가씨'인 셈입니다.

신32:10에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말씀했는데,

원래는 '눈동자 속의 동공'이란 말이고, 그 동공(이쉬온)의 어근에는

'여자'(이샤)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눈동자 속의 여자, 또는 남자'가 되죠.

하나님 그처럼 자기 백성을 친밀하게 사랑하는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와라. 가까이 와라.

더 가까이 와서 내 눈동자를 봐라."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신 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을 거부하는 것도 참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인을 무턱대고 거부해선 안 된다는 뜻)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하나님을 압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제가 그럴 자격을 지닌 건 아닙니다.

 

이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아가페)입니다.

인자함과 조건 없는 은혜, 그리고 신적인 자비입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오직 유대-기독교 신앙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같은 사랑(헤세드)을

그 어떤 범신론적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이슬람의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무슬림들은 선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선행이 악행에 비교했을 때 더 많아야만 합니다.

 

범신론적 종교는 모든 인생을

윤회를 위해 (자기 죄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모든 탄생은 재탄생입니다.

그러려면 지난 생애의 결과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마침내 이 업보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합당한 응보를 이뤄내는겁니다.

이슬람에서도 낙원은 스스로 얻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뛰어갑니다.

이 작은 아들은 인생이 철저하게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머무르던 형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여러분, 중동 지역에서

이 내러티브(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존중 받지 못하고 멸시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부터 달라는 아들 때문에요.

 

아들의 요구는 당신이 빨리 죽어서 얼른 내 몫의

유산이나 챙겼으면 좋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은 결국 유산을 가지고 나갑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상황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으러 뛰어나갈 중동 아버지는 없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발 앞에 납짝 엎드려, 발목을 잡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고, 빌고, 또 빌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을 감싸안고 말합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이 아들이 결코 받을 자격 없는

신적인 인자하심과 자비입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을 이끌었다 하였노라"

(예레미야 31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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