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갈라디아서 5:2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구원의 뜻은, 단지 죄의 용서를 받아 하늘에 들어가는 “결말”만이 아니라, 그 구원이 이미 우리 안에서 “열매”로 드러나는 현재까지 포함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그 열매의 이름을 들려줍니다.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사랑과 기쁨과 화평—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새 생명이 성령의 숨결로 자라며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은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복음으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언약의 현실입니다. 평화는 단지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리에서 시작하여, 그 화목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흘러가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안식으로 완성되는 구속사적 강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투는 핵심은,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순수성입니다. 그 복음이 흐려지면, 성령의 열매는 시들고, 교회는 가장 종교적인 모습으로 가장 비평화적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가 의의 근거가 되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은 즉시 비교와 정죄와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곧 말이 되고 표정이 되고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겉으로는 질서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화평의 뿌리를 뽑습니다. 반대로 값없는 은혜가 선명해질수록, 사람은 자기를 변호할 필요가 줄어들고, 남을 심판해 자기 의를 세울 필요도 줄어들며, 주께서 이미 주신 의와 사랑 안에서 숨을 쉽니다. 그때 화평은 억지로 짜내는 예절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무르익는 성령의 향기가 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의 본성을 정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화를 “유리한 조건”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상처받지 않는 범위에서, 내가 손해 보지 않는 수준에서, 내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한도에서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평화는 사실 타협이거나 회피이거나 침묵의 거래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화평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넘기는 타협이 아니라, 죄를 가장 무겁게 다루신 하나님의 공의의 자리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정죄의 칼을 우리에게 던지지 않고, 그 칼을 하나님의 어린양께 내리신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나온 평화는 값싼 조용함이 아니라, 죄를 직면하면서도 사랑으로 품는 깊은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감정의 기복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렬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 안정이며, 그 안정이 타인을 향한 태도와 언어를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맺는 결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뿌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뿌리가 죽었는데 열매만 달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은 먼저 뿌리의 문제입니다. 그 뿌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칼빈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진실은, 구원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내려오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구원의 사슬 속에서, 성도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붙들립니다. 이 확고함이 마음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사람을 움켜쥐지 않게 됩니다. 불안이 줄어들 때, 공격성도 줄어듭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은, 관계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싸우는 전쟁”을 멈추게 합니다. 평화의 열매는 이런 토양에서 자랍니다.
그렇다면 이 평화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우선, 하나님과의 화평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사람은 마음이 하나님과 불화한 채로는, 어떤 관계에서도 오래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면, 작은 말에도 상처받고, 작은 오해에도 분노하며, 작은 차이에도 담을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연약하고 실수도 하지만, 중심이 다릅니다. 기도는 단지 도움을 청하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소음을 가라앉히는 자리입니다. 말씀은 단지 지식을 쌓는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보게 하여 마음의 질서를 세우는 빛입니다. 예배는 단지 주일의 의무가 아니라, 흩어졌던 영혼이 다시 하나님께 정렬되는 재창조의 시간입니다. 이런 내면의 정렬이 있을 때, 화평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내부의 방향이 됩니다. 폭풍 속에서도 배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바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닻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닻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닻이 깊이 박힐 때 평화의 열매는 흔들리지 않고 맺힙니다.
또한 성령의 화평은 죄와의 싸움 속에서 나타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평화가 곧 “갈등 없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죄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화평은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만듭니다. 죄를 죄로 부르지 못하는 교회는 조용할 수는 있어도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침묵은 종종 두려움의 가면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화평은 담대함과 함께 옵니다. 다만 그 담대함은 사람을 찌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십자가 앞에 세우는 회개의 담대함입니다. 내 안의 죄를 직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허물을 정죄가 아니라 긍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로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열매는 죄를 덮어두는 데서 자라지 않습니다. 죄를 십자가 아래로 가져갈 때 자랍니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가장 진실하게 바라보되, 그 현실 위에 더 큰 은혜의 하늘을 펼쳐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화의 열매는 특별히 “말”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구체적인 언어 습관과 관계의 태도로 번역됩니다. 말은 마음의 넘침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말은 날카로워지고, 마음이 자기 의로 가득하면 말은 교만해지고, 마음이 상처로 응어리져 있으면 말은 비꼬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화평은 말에 온도를 바꿉니다. 상대를 이기려는 말이 아니라 살리려는 말, 결론을 내리려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말, 숨겨진 칼끝을 품은 말이 아니라 눈물을 닦아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화평이 곧 “할 말도 못하는 순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말하게 하십니다. 경계를 세우되 미움으로 세우지 않게 하십니다. 권면하되 조롱으로 권면하지 않게 하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혁주의적 경건이 빛을 냅니다. 진리에 대한 엄격함이 사랑의 온기와 분리되면, 우리는 정통을 지키면서도 그 정통이 낳는 열매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십자가의 사랑과 결합될 때, 교회는 견고함과 부드러움이라는 보기 드문 조화를 드러냅니다. 그 조화가 바로 평화의 열매입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열매는 더욱 현실적입니다. 가정은 신앙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교회에서는 단정한 얼굴로 “평안합니다” 말할 수 있어도, 집에서는 작은 일로 목소리가 올라가고, 습관적인 무시가 오가고, 오래된 상처가 다시 터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화평은 가정에서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화평은 가정을 “완벽한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환상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정 한가운데 세우십니다. 십자가는 “누가 옳으냐”의 싸움에서 “누가 더 낮아질 수 있느냐”의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평화의 열매는 자존심을 이기는 능력에서 맺힙니다. 먼저 사과하는 용기,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 사소한 친절을 반복하는 성실함, 말 한마디의 날을 무디게 하는 절제, 그리고 용서의 결단이 가정의 공기를 바꿉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만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착한 사람”으로만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억울함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열매가 자라는 길입니다.
세상 속에서 평화의 열매는 “세상과 다른 방식의 갈등 처리”로 나타납니다. 세상도 평화를 말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힘의 균형으로 유지되는 잠정적 안정이거나, 손익 계산으로 선택되는 휴전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평화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자들을 위해 피 흘리셨듯, 성도는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의와 사랑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성령의 화평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강하게 서게 합니다. 그 강함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면서도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 힘입니다. 분노를 품되 죄를 짓지 않는 절제, 정의를 사랑하되 복수에 사로잡히지 않는 균형, 상처를 인정하되 미움으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는 성숙—이것이 평화의 열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구속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에덴에서 잃어버린 샬롬의 회복이며, 그 회복의 중심에는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첫 آدم의 불순종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었고, 그 결과 마음의 질서가 무너지고 관계가 깨어지고 피조세계까지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آدم, 곧 그리스도께서 순종으로 의를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원수 된 것을 자기 몸으로 소멸하시며, 부활로 새 창조의 문을 여셨습니다. 성령은 그 새 창조의 능력을 오늘 우리 안에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단지 개인 윤리의 성취가 아니라, 새 창조의 표지이며, 장차 올 완성의 선취입니다. 성도의 평화는 종말론적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흔들리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는 때로 다투지만, 화해를 향해 돌아섭니다. 우리는 때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십자가가 그 상처를 치유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평화의 열매는 바로 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자라납니다.
예화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교회에 오랫동안 함께 봉사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꼼꼼하고 원칙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따뜻하지만 즉흥적이었습니다. 작은 준비 과정에서 의견이 충돌했고, 처음에는 단순한 방식 차이였던 것이 점점 “인격에 대한 판단”으로 번졌습니다. 말이 거칠어지고, 서로의 수고를 인정하기보다 허물을 확대해 해석했습니다. 결국 둘은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도 그 긴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회자가 둘을 따로 만나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묻기보다, 먼저 갈라디아서의 복음을 다시 펼쳐 주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둘은 자신도 모르게 봉사와 충성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했고, 그 증명이 흔들리자 상대를 탓하며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단순히 “사과하세요”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둘의 교만과 두려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용서하는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들을 받아들이셨기에 이제는 서로를 이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조용히 짚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둘은 비어 있는 예배당 뒤편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내가 옳았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서 당신을 밀어붙였다”고 고백했고, 다른 사람은 “내가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속으로 당신을 미워했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둘은 오래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함께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갈등의 쟁점이 한 번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옳음”이 아니라 “은혜”가 중심이 되자, 관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칼이 아니라 다리가 되기로 배웠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열매입니다.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관계가 새로 빚어지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평화의 열매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나무가 주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음”에서만 나옵니다. 붙어 있음은 단순한 종교 활동의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존재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를 낮추고 동시에 높입니다. 낮추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보게 하여 교만을 꺾는 것이고, 높이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임을 알게 하여 두려움을 쫓는 것입니다. 교만과 두려움이 줄어들 때, 평화는 자랄 공간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열매를 구하는 가장 실제적인 길은, 내 안의 복음을 더 선명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이 질문이 선명해질수록, 사람을 향한 태도도 선명해집니다. 나는 은혜로 사는 자이기에, 은혜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평화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오늘 마음이 흔들려도,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다시 이끄십니다. 평화의 열매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르익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랍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 있게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내 힘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려” 할 때 우리는 지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를 “지키고 가꾸는”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는 은혜의 리듬을 배웁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 오늘 내 말이 평화를 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을 때 “주님, 내 안의 복음이 작아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주님,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다시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겸손하게,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화해의 걸음을 옮기십시오. 평화는 마음속 결심만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발걸음으로 자랍니다. 전화 한 통, 짧은 문자, 조용한 방문, 진심 어린 사과, 상대를 위한 중보기도—이 작은 순종의 씨앗 위에 성령은 풍성한 열매를 달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열매는 교회의 사명과도 연결됩니다. 교회는 세상에 평화를 “설명”하는 곳이기 전에, 평화를 “보여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보기에도 이상한 공동체, 다름을 이유로 찢어지지 않고, 의견이 달라도 사랑을 잃지 않으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되 죄인을 품고, 진리를 굽히지 않되 사람을 부러뜨리지 않는 공동체—그 공동체는 그 자체로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그 평화는 결국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께 나아가십시오. 평화의 주께 붙으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의 삶에, 당신의 가정에, 당신의 교회에, 당신의 관계들에,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마침내, 주께서 다시 오실 날에 완전한 샬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요약: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화평”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성격적 안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된 하나님과의 화목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적용되어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구속사적 선물이다. 율법주의적 자기의는 관계를 전쟁으로 만들지만, 은혜의 복음은 교만과 두려움을 꺾어 말과 태도와 갈등 처리 방식에서 평화를 맺게 한다. 평화는 죄를 덮는 회피가 아니라 죄를 십자가 아래로 가져가는 용기이며, 교회와 가정과 세상 속에서 사랑 안의 진리로 드러나는 새 창조의 표지이다.
묵상 포인트:
내가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유리한 조건”을 원한 적은 없는가.
내 안의 불안이 말의 날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관계를 무너뜨린 적은 없는가.
십자가가 내 분노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묵상하라.
오늘 한 가지라도 “화해의 작은 순종”을 선택하라(사과, 경청, 중보, 친절).
강해:
갈라디아서 문맥에서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한 복음적 대답이다.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며, 성령의 열매가 “내가 쌓는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새 생명의 결과”임을 드러낸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하며(의롭다 함과 화목), 그 수직적 화평이 수평적 관계로 확장된다(말, 태도, 갈등 처리, 용서). 성령의 열매는 단일 열매로서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며, 화평은 사랑·기쁨과 함께 자라며 인내·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를 통해 구체화된다.
주석:
“열매”라는 표현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유기적 결과를 강조한다. “화평”은 단순 감정이 아니라 관계적·언약적 상태를 포함한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 노릇하라고 권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곧 공동체의 평화를 낳는다고 본다. 따라서 화평은 개인의 내적 안정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적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원어 주석(헬라어-신약):
“열매”는 καρπός(카르포스)로, 단수형이 사용되어 성령의 열매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생명에서 나오는 통합적 성품임을 시사한다. “화평”은 εἰρήνη(에이레네)로,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관계적 화목과 안정을 포함한다. 신약에서 εἰρήνη는 하나님과의 화목(롬 5:1의 흐름) 및 공동체적 평안(엡 4:3의 맥락)과 긴밀히 연결되어 사용된다.
금언:
“평화는 상황의 무풍(無風)이 아니라, 십자가에 깊이 박힌 닻이다.”
“은혜가 커질수록, 나는 옳음을 증명할 필요가 줄어든다.”
“화평은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갈등을 그리스도께 가져가는 길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도의 장식이 아니라, 새 창조의 표지다.”
신학적 정리:
칼빈주의·개혁주의 관점에서 화평의 열매는 선택과 부르심의 은혜가 성화로 열매 맺는 필연적 결과이다. 칭의는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며, 성화는 그 칭의의 공로가 아니라 칭의의 은혜가 낳는 결과로 나타난다. 화평은 그리스도의 속죄(공의와 사랑의 일치)와 연합(그리스도 안에 붙음), 성령의 적용(새 생명과 새 성품의 실제화) 위에 세워진다. 구속사적으로는 에덴의 샬롬 상실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그리고 종말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이해된다.
주제별 정리:
평화와 복음: 복음이 흐려질수록 평화가 말라가고, 복음이 선명할수록 평화가 자란다.
평화와 말: 평화는 말의 온도, 속도, 방향을 바꾼다.
평화와 죄: 평화는 죄를 외면하지 않고 십자가 아래로 가져간다.
평화와 공동체: 평화는 개인 덕목을 넘어 교회의 증거가 된다.
목회적 정리:
평화는 “성격 교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도에게는 복음 중심의 돌봄이 필요하며, 갈등의 기술 이전에 은혜의 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 목회는 옳고 그름의 판결만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를 보게 하여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 안내여야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오늘 하루, 내 말에서 공격을 거두고 생명을 심겠다.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 충동을 느낄 때, 먼저 복음을 고백하겠다.
갈등을 회피하지 않되, 상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겠다.
작은 화해의 행동 하나를 즉시 실행하겠다.
성령께서 내 안에 맺으시는 열매를 믿음으로 기대하며,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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