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 (요한복음 9장 13-34절) 1. 율법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왜 흥분했는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만들어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발라 고쳐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 정신은 몰랐다. 율법 정신은 율법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율법은 보약이지만 율법주의는 독약이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외면된 인간중심적인 일을 금하라는 말씀이지 일로 의심되는 모든 동작을 안식일 24시간 동안에는 금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예배 외에 “모든 일에서 동작 금지!”라고 안식일 율법을 해석해 강요하며 자신들의 영성을 과시했다. 예수님은 기계적인 율법주의에 치우친 그들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율법주의에 치우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약이 된다.
안식일은 일을 무조건 금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다. 반면에 율법에 치우친 율법주의는 사람의 악한 뜻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 뜻을 따라 만든 사람의 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미혹한 것이다. 안식일 율법을 내세워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면서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정죄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영혼을 살리려고 주어진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삼는 율법주의로 흐르면 결국 영혼을 죽인다.
한 아내가 믿음이 깊어지면서 남편과의 잠자리를 멀리했다. 하나님 안에서의 결혼생활과 부부생활은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만든 양심의 법을 가지고 죄의식을 느껴 심적인 고통을 당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면 안 된다. 자기 영성을 나타내려고 율법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참된 신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거나 생각하게 하면 안 된다. 물론 율법주의 때문에 율법을 경시하면 안 된다. 율법 자체는 가치 있는 것이다. 율법을 깨뜨리고 부정하면 은혜의 탑도 쌓이지 않는다. 율법을 중시하되 율법에 치우치지는 말라.
2. 이론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 앞에서 안식일에 관한 이론적인 논쟁을 벌였다(16절). 또한 그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하도록 많은 이론적인 질문을 했지만 사실을 앞세운 그의 증언에 그들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론은 사실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그로부터 예수님을 깎아내리는 실마리를 찾으려고 예수님에 관한 질문도 했는데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즉시 대답했다(17절). 논쟁적인 이론이 아무리 사실을 가리려고 해도 오히려 빛나게만 할 뿐이다.
그에게서 예수님을 깎아내릴 대답을 못 얻자 그들은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않고 그 부모를 불러 사실 여부를 물었다(19절). 그의 부모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20-22절). 그들은 그를 두 번째로 불러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그분이 죄인인지 어떤지 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저는 전에 소경이었고 그분이 나를 고쳐서 지금은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25절).” 이론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사실을 가진 그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이다. 이론을 존중할 필요는 있지만 이론이 사실을 앞설 수는 없다.
‘이론적인 지식’보다 ‘사실적인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이론이 많아지면 바리새인이 되지만 사실을 소유하면 굳건한 믿음의 성도가 된다. 혹시 이론적인 논쟁에서는 져도 실제 삶에서는 이기라. 믿는 사람이 말은 잘하는데 삶이 모범이 안 되면 속으로 조롱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후에 성도의 삶이 불신자보다 나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라. 믿음이 추상적인 이론처럼 되어 성도가 불신자보다 못난 모습을 보이면 예수님의 이름까지 훼손되기에 말만의 믿음이 아닌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힘쓰라.
3. 이름
맹인이었던 사람의 치유 증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또 물었다. “그가 네게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했느냐?” 그들은 집요한 중복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깎아내리고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할 주장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도 분노가 생겼던지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않고 왜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27절).” 조롱 섞인 통쾌한 반문이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말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29절).” 율법과 이론이 통하지 않고 심지어는 맹인이었던 자의 조롱을 받으니까 그들은 모세 이름까지 끌어들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했다. 정말로 집요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했지만 만약 모세가 살아서 들었다면 “내 이름을 사칭하지 말라.”고 펄펄 뛰었을 것이다.
그들이 모세의 이름까지 그 논증에 바리새인들은 할 말도 없고 체면도 구겨지고 자존심도 상하니까 “네가 죄 가운데 맹인으로 난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하며 그를 출교했다(34절). 왜 바리새인들은 쩔쩔매고 그는 당당했는가? 그들은 모세의 이름을 사칭했고 그는 예수님을 꼭 붙잡았기 때문이다. 형식적이고 사칭적인 믿음은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을 꼭 붙잡은 믿음은 당당함을 주고 참된 능력도 생기게 한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뜻을 왜곡한 채 모세의 이름을 사칭했듯이 요즘 예수님의 뜻을 왜곡한 채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경우가 많다. 입으로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하는데 리더십에 순종하는 기본자세가 부족하고, 사회적인 부조화와 부적응에 대한 성찰도 없고, 약속한 시간과 자리를 지키는 책임감도 없고, 십자가의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외면한 채 쉽게 감정이 흔들리고 자주 옮겨 다닌다면 예수님의 이름이 훼손된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했다고 믿음의 준비도 없이 형식적이고 모방적으로 똑같이 말하면 마귀가 도망갈 줄 알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하면 마귀가 웃는다. 마귀도 누가 진실하고 헌신적인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안다. 그래서 참된 능력자 앞에서는 부리나케 도망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 앞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경우처럼 더 달려든다.
얼마 전에 대통령 부인을 사칭한 사람에게 유명한 정치인이 낚여 거액을 뜯겼다. 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교주에게 속아 영혼이 낚여 집과 돈을 빼앗기고 가족과 생이별하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고 천국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에 들게 해주겠다는 사칭 교주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속아 구원과 천국조차 잃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을 진짜 존중하며 성도답게 사는지를 보고 잘 분별해서 영혼을 지키라.
4. 축복
본문 17절에 나오는 맹인이었던 자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보라. “선지자니이다.” 예수님을 담기에는 크게 부족한 호칭이지만 그 간단한 호칭에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본문 25절을 보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 짤막한 한 문장의 간증은 파워가 넘친다. 참된 간증은 이런 간증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장황한 축복 간증보다 간결한 변화 간증이 더 중요하다.
반틸이란 유명한 변증학 교수가 말했다. “가급적이면 간증하지 마십시오. 간증하는 사람은 자기 얘기를 영웅적인 거짓 스토리로 만들 위험이 큽니다.” 영웅적인 화려한 축복 간증보다 달라진 삶에 대한 소박한 간증이 더 소중하다. 축복을 추구하기보다 먼저 변화를 추구하고 얻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먼저 드릴 생각부터 하라.
잘못된 축복 간증은 땀과 과정의 생략을 은근히 부추긴다. 땀이 없는 축복의 열매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수고하고 얻어야 더 가치를 느낀다. 교회도 눈물의 수고 없이 너무 급속히 성장하면 한 영혼의 가치가 경시될 수 있기에 그것은 경계해야 할 사례지 세미나의 모범으로 삼을 사례가 아니다. 눈물의 수고 없이 성장하면 힘은 얻어도 선은 잃기 쉽다. 또한 진실을 잃게 하고 인간적 자랑만 남게 하기 쉽다.
요즘은 작은 교회가 많이 외면 받지만 사실상 작은 교회도 장점이 많다. 그 장점 중의 하나는 한 영혼의 가치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는 한 영혼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면 교인들은 속으로 운다. 반면에 한 영혼이 찾아오면 첫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교인들이 들떠한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 상태에서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진통하는 모습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 자기 변화를 우선하라 >
성공과 성장과 축복만 바라보며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길 안에서 수고하며 우직하게 나아감으로 거룩한 방법으로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라. 그 일은 쉽지 않기에 인내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에 인내하면 이삭을 얻지만 인내하지 못하면 이스마엘을 얻는다. 오늘날 끊임없이 생기는 중동 분쟁의 근본 원인은 아브라함 부부가 약속의 성취를 넉넉한 믿음으로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왜 많은 교회가 진통하는가? 하갈을 받아들이는 부조리한 방법도 활용해 이스마엘을 낳는 식으로 교회를 서둘러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하갈은 기복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헛된 종말론을 뜻한다. 화려하고 신기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사탄은 인간의 호기심을 틈타 들어올 때가 많다. 힘들어도 진리 안에서 우직하게 살고 축복에 대한 관심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더 관심을 둘 때 진짜 축복을 얻는다.
왜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늦게 주셨는가? 사래가 사라로 변하지 않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곱도 이스라엘로 변화된 후에야 하나님과 진짜 깊은 관계로 들어갔다. 그들의 이름이 변했다는 말은 무속인의 말처럼 이름을 바꿔야 운이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상징이다. 축복에 치우치지 말고 자기 변화를 먼저 추구하고 최선의 땀을 흘려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라.
더 나아가 내가 복 받는 것에만 치우치지 말고 남도 복 받게 해주려고 하라. 기독교의 복은 남보다 잘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남을 잘 되게 한다는 말이다. 행복은 내 행복이 남에게도 행복이 될 때 주어진다. 좋은 일을 힘써 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힘써 후원하라. 혼자 쓰기에 빡빡해도 힘써 나누면 호주머니는 잠시 가벼워져도 기쁨과 축복과 행복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잘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은 사랑과 헌신의 손길을 펼치면 앞날은 더욱 복되고 성숙하고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앞날에 대한 사람의 예언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늘 삶에 예수님의 향기가 넘쳐나 남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면 앞날은 보장된다. 가끔 사람 때문에 상처도 받고 길도 막히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버리고 내 변화부터 추구하고 내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하면 2019년은 이전보다 더욱 복된 한 해가 될 것이다. 그런 복된 한 해를 만들어가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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