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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신 구원의 문 (마가복음 10장 23절–27절)

by 【고동엽】 2025. 12. 25.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신 구원의 문 (마가복음 10장 23절–27절) 

주님께서 둘러보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신 그 말씀은, 단지 한 사람의 삶을 향한 평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의지와 신뢰의 방향을 꿰뚫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부유함을 가진 이들만을 겨냥한 교훈이 아니라,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하나님의 질문이었으며, 무엇을 의지하여 자신을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밝히 드러내는 빛이었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사람의 소유를 넘어 마음의 중심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재물이 많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곧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재물이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아 하나님을 대신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주인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보이지 않는 전환의 지점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실 때, 그것은 경제적 상태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의 대상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말은 단순한 감정의 동요를 넘어, 그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왔던 세계관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신앙적 인식 속에서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정결을 유지하며, 성실히 살아온 결과로서 재물이 주어졌다고 이해하던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익숙한 논리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말하며 심히 놀라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절박한 탄식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이들조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조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는 인식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할 수는 있었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결단과 헌신, 순종과 희생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은밀한 기대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깊은 진리로 이끄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을 확대해 주는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무능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 결단, 성취, 포기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아님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하나님께서 다가오신다는 소식,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의 문을 하나님께서 여신다는 선언이 바로 복음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씀은, 단지 과장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드러내는 진단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진단 앞에서 인간은 두 갈래의 길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변명의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는 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며,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가능성은 인간의 노력에 덧붙여지는 보조적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이 선언은,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인간의 소망을 가장 안전한 반석 위에 세웁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나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영적 역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가장 밝게 빛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가 열립니다. 이것이 은혜의 질서이며, 복음의 길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사라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안정, 쌓아 올린 성취, 확보해 둔 관계, 혹은 오랜 신앙의 연륜과 경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넘어, 우리의 신뢰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의 문 앞에 세우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지 이론적 선언으로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삶 깊숙한 곳을 향하여 내려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이 선언 앞에서 우리는 종종 낙담하거나 체념하기 쉽지만,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의도는 인간을 주저앉히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해 온 모든 가짜 버팀목을 제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손에 쥐어진 것들이 하나둘 놓여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손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의 무능을 폭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밝게 증언하는 복음의 언어입니다.

제자들의 놀람 속에는 자신들도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배와 그물을 버렸고, 세리였던 마태는 계산대를 떠났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의 배를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은밀한 자기 확신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그 남아 있는 마지막 의지의 지점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재물만이 아니라, 헌신조차도, 포기마저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내어놓은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의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복음은 우리를 완전히 평등한 자리로 데려갑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오래 믿은 자와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자, 많이 드린 자와 드릴 것이 없는 자 모두가 동일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자리는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아무도 자랑할 수 없고, 아무도 스스로를 높일 수 없으며, 오직 감사와 경외로만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은혜의 절대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개입될 틈이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는 인간의 불가능성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완화하려 애쓰며, 당시 예루살렘 성문 중 하나의 좁은 문을 가리킨 것이라거나,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러한 타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불가능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복음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는 순간,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거래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내세우고 싶어 합니다. 신앙의 연수, 봉사의 횟수, 헌금의 액수, 희생의 깊이, 심지어 눈물의 양까지도 은혜의 근거로 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계산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 앞에서는 오직 빈손만이 허락됩니다. 그 빈손이야말로 은혜를 붙드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우리는 구원을 값싼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값이 싸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이 너무도 커서 인간이 치를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말씀의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겸손으로 이끌 뿐 아니라, 동시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이끕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면, 그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이 말씀은,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구원의 지속과 완성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화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깊은 강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헤엄쳐 나오려 애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처음에는 힘을 내어 팔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 갑니다. 그때 구조대원이 줄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스스로 나오려 하며 줄을 붙잡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힘이 다했음을 인정하고 줄을 붙잡는 사람은 구조됩니다. 구원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붙들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며 그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셨습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결국 누가 능력이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환입니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성취에서 신뢰로, 소유에서 은혜로 옮겨 가는 전환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이 전환 앞에 서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말합니다. 더 쌓아야 안전하고, 더 가져야 안심되며, 더 증명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내려놓으라고, 맡기라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포기가 아니라, 가장 책임 있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은, 단지 구원의 문턱에서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신앙의 전 여정에 걸쳐 반복해서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해서 마주하는 불가능, 해결되지 않는 문제, 넘어설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이것은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능하십니다.

이 고백은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성숙한 언어입니다. 인간의 손이 내려갈 때 하나님의 손이 올라오며, 인간의 계산이 멈출 때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무력한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참된 자유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그 구원의 역사는 어떤 길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답을 이미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인간의 자랑을 꺾고, 인간의 계산을 무너뜨리며,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인간의 무능을 덮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십자가의 길을 통과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구원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인간의 불순종을 대신하였고, 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불의를 덮었습니다. 이 대속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내세울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믿음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빈손을 내미는 태도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을 받아들이는 응답입니다. 그래서 믿음조차도 자랑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 앞에서 인간은 오직 감사로만 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에는 따뜻한 연민과 단호한 진리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던진 질문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질문을 통해 복음의 핵심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 앞에서, 죄의 문제 앞에서, 죽음의 현실 앞에서 던지는 질문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질문의 끝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가리키십니다. 나를 보라, 내가 한다, 내가 능하다, 내가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 더 큰 능력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재물이나 규모나 영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오히려 복음의 본질은 흐려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한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성도의 삶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더 나은 성도, 더 성숙한 신앙인, 더 헌신적인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어느 순간 우리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게으름으로 이끄는 변명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결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신실함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붙드는 신앙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의 기도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기도를 거래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를 요구가 아니라 의탁으로 드립니다.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자신을 내려놓는 자리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기도는 조용하지만 깊고, 겸손하지만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중심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한 문장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웁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언어 중 가장 복된 고백입니다. 이 고백 위에 믿음이 세워지고, 이 고백 위에 소망이 자라며, 이 고백 위에 사랑이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은 단지 미래의 천국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새롭게 빚어 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가 분명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우리의 빈손이 분명할수록 은혜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가장 확실한 소망의 언어입니다. 이 말씀을 붙드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 위에 서는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성도는 끝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붙들고 서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어떤 사람에게 열리는지를 더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 문은 스스로를 가득 채운 사람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열립니다. 그 문은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자신을 맡기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그 문은 무엇을 이뤘는지를 들고 서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음을 인정하며 서 있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이 비움의 자리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이며, 상실의 자리가 아니라 충만의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을 다시 떠올려 보면, 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은 놀라움 속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절망 속에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사라진 지점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끝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무게를 다르게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한계를 실패로만 해석합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신앙이 연약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그러나 하나님으로는 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한계를 통로로 삼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며 아버지의 손을 더 단단히 붙드는 법을 배우듯, 성도 역시 삶의 여정을 걸으며 점점 더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서 자라는 신앙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합니다. 누가 더 잘 믿는가, 누가 더 헌신적인가, 누가 더 바르게 사는가를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 앞에서는 누구도 비교의 우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며,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깨달음은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합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더하려 할수록 하나님은 작아지고, 인간이 내려놓을수록 하나님은 크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된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능하셨고, 지금도 전능하십니다. 다만 인간이 그 전능하심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조용히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제 결심으로는 부족합니다. 제 신실함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능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여실 뿐 아니라, 그 문 안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가장 견고한 반석 위에 세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를 더 붙잡으려 애쓰지 마시고, 오히려 내려놓으십시오.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그 자리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한 문장은, 우리 신앙의 시작이며, 우리의 위로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말씀 위에 우리의 오늘을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일을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의 문 앞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온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때문이었음을 말입니다.

이 말씀 앞에 선 우리는 결국 한 가지 고백으로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의 지혜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절제 때문도 아니며, 우리의 신앙적 성취 때문도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버텨 온 것 같았던 순간들조차, 실상은 하나님의 손이 보이지 않게 붙들고 계셨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깊은 감사로 이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이 선언은, 신앙의 실패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은혜의 증인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스스로 해냈다고 말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정직한 간증이며, 가장 순전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인간의 공로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인간의 무능 위에 세우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죽음의 문 앞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세웁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재물도, 명예도, 성취도, 심지어 건강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이 말씀이 우리를 붙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은, 생명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준비를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의 삶과 내일의 소망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연약하지만, 내일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족하지만, 내일은 은혜로 충만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이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대신 신뢰를 선택하게 하고, 불안 대신 맡김을 선택하게 하며, 조급함 대신 인내를 배우게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이 말씀은, 지금도 교회를 향해 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가 교회를 압박하고, 성취와 성공의 기준이 신앙을 흔들 때에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고 하십니다. 교회가 이 말씀 위에 설 때, 교회는 작아 보여도 강하고, 연약해 보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들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고,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앞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앞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진리를 함께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 동행 속에서 우리의 걸음은 느릴지라도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 나라의 문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서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음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영원한 찬송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질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시다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게 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우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살아가고, 은혜로 완성되는 길 위에서 말입니다.

Ⅰ. 설교 요약

마가복음 10장 23절–27절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며,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선언합니다. 재물은 단순한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신뢰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이며, 인간은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울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힙니다. 제자들의 놀람은 인간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며, 그 자리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복음의 핵심 선언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절망을 고정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참된 소망으로 이끕니다.


Ⅱ. 묵상 포인트

  1. 나는 구원의 문제에서 무엇을 은밀히 의지하고 있는가
  2. 신앙의 연륜과 헌신이 은혜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3.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왜 은혜의 시작이 되는가
  4.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포기인가, 신뢰인가
  5. 내 삶의 불가능 앞에서 이 말씀이 어떤 위로와 방향을 주는가

Ⅲ. 본문 강해 (해설적 정리)

1.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 재물은 인간의 자립성과 안전감을 상징
  •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의존
  • 하나님 나라와 재물은 경쟁적 주인이 됨

2. 제자들의 놀람

  •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
  • 기존 신앙 공식의 붕괴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는 실존적 질문

3. 낙타와 바늘귀

  • 인간적 가능성의 완전한 부정
  • 점진적 어려움이 아닌 절대적 불가능성
  • 구원을 인간의 영역에서 제거

4. 하나님의 능력 선언

  • 구원은 인간의 협력이 아닌 하나님의 단독 역사
  • 은혜의 주권성과 절대성
  • 전적 은혜, 전적 역사

Ⅳ. 주석적 설명

  • 본문은 율법적 공로 신앙을 해체하는 말씀
  • 인간의 순종·포기·결단조차도 구원의 조건이 아님
  •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 인간의 불가능성은 구원의 장애가 아니라 전제

Ⅴ. 원어 주석 (핵심 단어)

  • ἀδύνατον (아뒤나톤)
    → “불가능한, 전혀 할 수 없는”
    → 단순한 어려움이 아닌 본질적 무능을 의미
  • δύναμαι (뒤나마이)
    → “능력이 있다, 가능하다”
    →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만 귀속됨
  • 대비 구조
    → 인간: ἀδύνατον
    → 하나님: πάντα δυνατά (모든 것이 가능함)

Ⅵ. 금언 (설교 인용용 문장)

  • 구원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서 완성됩니다.
  • 빈손만이 은혜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 불가능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복음은 시작됩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자랑을 제거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Ⅶ. 신학적 정리 (개혁주의 관점)

  1. 전적 타락
    인간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무능함
  2. 전적 은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3. 은혜의 단독성
    인간의 공로·협력·의지는 구원의 원인이 아님
  4.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은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을 모두 담당하심

Ⅷ. 주제별 정리

  • 구원: 가능성 → 은혜
  • 신앙: 성취 → 의탁
  • 재물: 도구 → 시험
  • 인간: 능력자 → 수혜자
  • 하나님: 조력자 → 주권자

Ⅸ. 목회적 정리

  • 성도를 성취 경쟁에서 해방시킴
  • 연약한 신앙인에게 깊은 위로 제공
  • 교회를 겸손한 은혜 공동체로 회복
  • 헌신과 순종을 구원의 조건이 아닌 열매로 재정립

Ⅹ.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1. 신앙의 기준을 재정립하겠습니다
    → “얼마나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맡기는가”
  2. 불가능 앞에서 도망하지 않겠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머물겠습니다
  3. 자랑을 내려놓겠습니다
    → 모든 것은 은혜임을 고백하겠습니다
  4.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살겠습니다
    → 오늘도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탁하겠습니다

마무리 고백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능하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신앙을 시작하게 하며,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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