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에 필요한 4대 요소 (누가복음 5장 17-26줄) < 안수를 함부로 받지 말라 >
얼마 전 한 대학병원에서 임의로 병실을 다니며 의료진의 눈을 피해 안수기도를 해준다는 여자 목사가 있었다. 병들어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안수기도 해준다는 말에 미혹되면 진짜 지푸라기를 잡고 영혼도 망칠 수 있다. 아무에게나 기도 받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더 나아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행동적인 선언인 안수를 받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안수자에게 욕심이나 영적 교만이 있고 심지어 영혼을 종으로 부리려는 사탄적인 의도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구약 성경을 보면 안수는 남발되지 않고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행해졌다. 모세오경에만 나오는 안수 기록도 대부분 제물에 대한 안수 기록이지 사람이 사람에게 안수하는 기록은 저주한 죄인을 죽일 때(레 24:14), 레위인을 성막 봉사자로 성별할 때(민 8:10),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리더십 이양을 위해 안수한 것 외에는 거의 전무하다. 예수님도 안수를 남발하지 않았다. 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안수 기록이 몇 번 없고 요한복음에는 한 번도 없다.
거짓 목자나 거짓 능력자는 안수를 남발하는지를 보면 금방 구분된다. 체육관 집회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한다면서 뛰어다니며 안수를 남발하고 심지어 넘어뜨리기까지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몰상식적인 행동이다. 그 모습에서 사랑의 흔적이나 성령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안수를 남발하는가? “아무나 걸려라. 아무나 코에 꿰여라.”는 식이다. 안수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안수는 “이 손길은 하나님의 손길을 대는 것입니다.”라는 행동 고백이다. “남이 하니까 낫든지 말든지 나도 그냥 손을 대본다.”라는 마음으로 안수를 남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디모데전서 5장 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참된 안수라면 안수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어느 날 한 성도가 목회자에게 요청했다. “목사님! 제가 아픈 데가 많아요. 다음 주일 예배 후 안수 기도를 해주세요.” 그는 평소에 안수기도를 가볍게 여겨 그 전에도 그렇게 안수기도를 많이 받았었다. 그 요청을 듣고 목회자는 안수기도가 병 낫는 도구가 아니고 거룩한 직임을 맡길 때나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에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라는 성경 원리를 말해주면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그냥 “알았어요.”라고 했다.
그 요청을 받고 목회자는 일주일 내내 정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게 불결함이 없게 하소서. 다음 주일에 제가 안수할 준비가 되도록 하나님 마음에 합한 깨끗한 영혼이 되게 하시고 안수를 통해 선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 그렇게 일주일 내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주일 예배 후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때 그 목회자에게는 일주일 내내 한 명 안수기도를 해주기 위한 준비가 주일 설교 준비만큼 힘들었다.
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해야 할 안수를 출처 불명의 사람에게서 치유 명목으로 받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낫는 것에만 집착하는 그런 행위를 하나님은 지극히 싫어하신다. 안수해준다는 사람이 욕심과 귀신에 사로잡혀 접근할 때가 많기에 출처 불명의 사람이 기도해주겠다면 멀리하고 안수기도를 해주겠다면 더욱 멀리하라. 아는 사람이라도 태도나 인격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그가 안수해주겠다고 해도 사양하라.
안수는 영적인 접촉이다. 나쁜 것이 흘러들어오게 하면 백해무익이다. 신뢰할 수 없는 기도를 받기보다 자신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로마서 14장 12절을 보면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라.”고 했다. 능력 과시자를 찾아가 기도를 부탁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다. “너는 나를 그렇게 못 믿느냐?”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기도 받으면 살 것도 죽고 축복 받을 것도 못 받는다. 설령 그때 낫고 축복 받아도 좋은 것이 아니다. 마귀의 낚시질에 영혼에 확실히 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집사가 남편의 병으로 불안해서 그 대학병원에서 몰래 안수기도를 해주는 그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 목사는 애절한 음성으로 병 낫는 기도를 해주었다. 그 집사는 고마웠다. 곧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이 죽었다. 그래도 애절하게 기도해준 생각을 하니까 속은 생각이나 싫은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잘못 기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사람이 기도해주겠다고 하면 영적인 접촉을 아예 피하라. 잘못하면 사탄의 낚시질에 걸려 노예처럼 살 수 있다.
남편이 죽은 지 얼마 후 그 집사에게 안수기도 해준 목사가 전화해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며 말했다. “집사님! 제가 OO에서 교회를 개척하는데 집사님이 나를 도와서 개척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했어요. 지금 교회 수리가 필요한데 어디를 고치는데 얼마 들고 어디를 고치는데 얼마 드는데 둘 중에 하나를 해서 주의 종을 섬기세요.” 그 전화를 받고 그녀는 그 목사를 철저히 멀리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남편도 이미 죽었는데 가까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결정을 못하고 꿰인다.
문제는 만약 그녀의 남편이 병에서 나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때는 더 무서운 일이 펼쳐진다. 그런 돈을 밝히는 목사를 남편을 낫게 해준 치유 능력자로 오해하고 코가 꿰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출처 불명의 사람의 기도를 받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실제로 죽든지, 아니면 살면서 노예처럼 죽은 목숨이든지 막다른 두 길만 펼쳐질 수 있다. 이상한 마음이 들면 “내 기도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위협해도 기도 받지 말라. 잘못 기도를 받으면 잘못된 영이 들어와 귀신과 이단의 종이 되어 영혼이 파멸된다.
지금 도처에 내 물질을 노리는 사람도 있지만 내 영혼을 노리는 사람도 있다. 물질을 노리는 사람보다 영혼을 노리는 사람은 고단수다. 때로는 내 영혼을 종으로 만든 후 물질을 탈취할 목적으로 안수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꼭 기도 받고 싶으면 기도해주는 사람이 바른 사람인지, 믿을만한 사람인지, 돈을 밝히는지,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말씀대로 사는지를 꼭 보고 기도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 있다.
가끔 보면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교회 몰래 다른 교우에게 안수기도를 해주기도 한다.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그냥 지켜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안수는 영과 영의 접촉으로 함부로 하면 안 되기에 바른 목회자는 당연히 막는다. 그러면 그가 교회를 떠나면서 뭐라고 하는가? “교회가 기도해주는 것을 막아 떠납니다. 기도해주는 것을 막는 교회가 교회입니까?”
믿음이 검증되지도 않고 교회 리더십에 순종하는 기본도 없는 ‘불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의 잘못된 영 전파를 막는 것은 기도를 막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수많은 교회가 그 문제로 분열되고 병들어가기에 그런 현실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이 좋다. 기도를 꼭 받고 싶으면 기도해주는 사람이 믿을만한가, 언행이 말씀 안에서 바른가, 그가 바른 의도를 가지고 기도해주는가를 꼭 고려해 받으라. 아무 데서나 아무에게나 안수받겠다고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마귀를 미소 짓게 하는 영적인 자해 행위다.
< 치유에 필요한 4대 요소 >
요새 어떤 교인은 치유의 핵심 통로가 안수인 줄 오해하고 있다. 왜 이단 종교인들이 그런 오해를 심어놓는가? 그래야 영혼을 종처럼 꿰어 차 통제가 쉽기 때문이다. 그런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성경적인 치유의 원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가 기적적으로 병이 낫는 장면을 통해 신유에 필요한 4대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1. 사랑
어느 날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사방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났다(17절). 그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는데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이 없어서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내렸다(18-19절). 성인 몸무게를 생각하면 그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에 감동해 치유를 작정하셨을 것이다. 사랑은 치유의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사랑을 오해하면 안 된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좋게 해주는 것이다. 리더를 좋아하는 팔로워보다 좋게 해주는 팔로워가 좋은 팔로워다. 아내를 좋아해도 좋게 해주지 못하면 사실상 좋은 남편이 아니다. 진짜 좋은 배우자는 상대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좋게 해주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해주는 것이다. 좋아하는 수준에 머물면 수시로 상처를 입히지만 좋게 해주는 수준까지 올라가면 점차 상처가 아문다. 참된 사랑은 참된 치유를 낳는다.
2. 믿음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사랑의 수고와 치유의 열망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20절). ‘그들의 믿음’이란 표현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뜻하지만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그 표현은 치유의 핵심 요소가 믿음임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치유가 온전한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기적과 표적을 통해 얻는 믿음은 잘 흔들린다. 지지대를 의지해 자란 식물은 지지대가 없으면 금방 쓰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셨다(요 20:29). 보이는 것이 없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줄 때 치유의 능력과 가능성이 커진다. 참된 믿음은 불안한 두려움을 없어준다. 나쁜 종교인은 종말 얘기나 귀신 얘기 등으로 두려움을 심어 영혼을 약화시킨 후 자기를 의존하게 만든다. 참된 목자는 참된 믿음을 통해 평안을 주지만 거짓 목자는 거짓 믿음을 전파해 불안을 일으킨다. 회복과 치유와 건강은 평안을 주는 참된 믿음을 통해 나타난다.
3. 순종
때 예수님은 일어나 걷게 하는 어려운 일을 행해 죄 사함의 권세를 보여주시려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 그때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 실제로 행동하자 정말 일어나게 되었다(25절). 중풍병자의 목표는 치유보다 순종이었지만 그 순종을 통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순종은 세상이 잘 운행되도록 하나님이 설정하신 기초 원리다. 모든 자연이 하나님이 설정하신 자연 질서에 순종해서 생명이 유지된다. 자연의 법이나 양심의 법에도 일단 순종하라. 모든 인간 문화가 순종의 가치를 인정한다. 다만 잘못된 사람에 의해 잘못된 주문이나 명령이 내려질 때도 있기에 최종적으로는 말씀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말씀에 바르게 순종하면 깨지고 병든 삶에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리더십과 질서에 힘써 순종하되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4. 감사
중풍병자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이었다(25절). 그때 지켜보던 무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6절). 치유가 일어나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까지 잘해야 한다. 치유에 욕심을 부리거나 치유를 통해 믿음과 영성을 과시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취하는 것이다. 응답 받아도 최대한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그러면 순간적인 치유의 은혜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건강의 은혜를 얻는다.
힐링(healing,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치유 상태가 쭉(th,의성접미어) 계속되는 헬쓰(health, 건강)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힐링보다 헬쓰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힐링에 감격하면 범사에 감사할 줄 모르고 힐링을 과시하는 이단과 사이비에 속아 잠깐의 힐링에 취해 헬쓰를 잃는다. 반면에 헬쓰에 감격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넘치고 헬쓰가 지속된다. 순간적인 치유의 기적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통해 지속되는 건강 자체가 기적인 줄 알면 건강 가능성도 커진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가장 마지막 구절인 28장 20절에서 승천하실 때 말씀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한국말 번역으로 보면 “있을 것이다.”란 미래형 표현 같지만 원래는 “있는다.”란 표현이다. 모든 영어 버전이 “I will be with you always.”가 아닌 “I am with you always.”라고 번역되어 있다. 심슨(Simpson) 목사는 그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불변의 현재(unchanging now)’ 가운데 계시는 분으로 묘사했다.
예수님은 사랑하심과 동행하심을 철회한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꾸준히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힐링 능력이 계속 머물면서 헬쓰를 잃지 않는다. 치유는 영원한 것(permanent)이 아닌 꾸준한 것(constant)이다. 그래서 꾸준히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계속된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고 치유의 능력도 철회하시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헬쓰를 얻는 비결이다. 늘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범사에 감사함으로 치유(healing) 이상의 건강(health)을 얻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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