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을 회복하라 (요한복음 21장 15절) < 진리는 밥에서 나온다 >
예수님은 믿음을 배반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었지만 밥 먹기 전에 하지 않고 먼저 따뜻한 사랑의 식탁을 만들어 밥을 잘 먹인 후에 하셨다. 예수님은 밥 먹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벳새다 광야에서도 말씀만 주지 않고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도 채워주셨다. 주기도문을 보면 주님은 가장 먼저 찬양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그 다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먼저 하게 하셨다. 그처럼 ‘밥 먹이는 것’을 귀하게 보셨다.
밥을 나눠주는 것은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사람들이 “진지 드세요.”라고 할 때 ‘진지’란 ‘어른들이 드시는 밥’을 높이는 말인데 그 말은 ‘참된 지혜’를 뜻하는 ‘진지(眞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조상들은 “진리는 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요새 많은 싸움이 진리 싸움보다는 밥그릇 싸움이다. 반면에 밥을 나누려고 하면 지혜도 생기고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안도 주어진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다(요 6:38). 그 말씀에서 떡은 ‘매일 먹는 밥’으로 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밥이니”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밥을 나눠주는 삶에 진리가 있고 축복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복이 없는 사람은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사람이다. 두 번째로 복이 없는 사람은 내 밥그릇만 챙기는 사람이다. 진짜 복된 사람은 밥을 나눠주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복된 사람은 자기가 밥이 되어주고 ‘거룩한 일을 위해 따돌림까지 감수하는 사람’이다.
축복을 원하면 어려운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라. 선교란 ‘주님의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선교사들은 나를 대신해 전방에 나가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 크고 무거운 짐이다. 그 짐을 함께 지려고 하라. 한쪽에서는 목숨 걸고 싸우는데 한쪽에서는 안락의자에서 쉰다면 죄도 되지만 인간적으로도 문제다. 혼자 살겠다면 영혼도 죽고 축복도 죽고 다 죽지만 자신을 태우고 헌신하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다 산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가슴에 빨대를 끼고 축복의 꿀을 빨아먹는 수단이 아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주려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되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방울과 핏방울이 있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십자가의 부담을 기꺼이 지는 것까지 나가야 바른 신앙생활이다. 삶의 최대 관심은 따뜻한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것에 있어야 한다.
< 첫 사랑을 회복하라 >
조반 먹은 후 해변이 아침햇살로 반짝거리고 제자들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 중에 베드로를 보며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듣고 베드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주님! 저는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이렇게 비참한데 잔인하게도 왜 그런 질문을 해서 아픈 상처에 식초를 붓나요?”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이다. 주님은 과거의 아픔을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열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셨다. 그런 주님의 의도는 그를 부른 호칭에서부터 알 수 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이란 이름으로 부르셨는가? 그 이름이 더 친밀감 넘치는 표현이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은혜 받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갈대란 뜻인 시몬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갈대가 아니라 반석이 될 거야.”라는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붙여주셨다. 그리고 12제자 중 수제자로 삼으시고 수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 그 기억을 되살리기 원하셨을 것이다. 아마 베드로는 자기 옛 이름을 들으며 과거의 은혜 받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일으키려고 호칭 하나까지 신경 쓰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고 첫 번째 하신 질문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잘 지냈느냐? 지금 힘들지 않으냐? 정말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등의 다른 질문도 많았을 텐데 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가? 그 말은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암시다. 사랑만 있으면 용기도 생기고 십자가도 지게 되고 고난도 이기고 인간사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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