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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민수기 12장 11-16절)

by 【고동엽】 2023. 1. 3.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민수기 12장 11-16절)

 

 

< 배려하는 언행을 훈련하라 >

 성숙이란 말이 너무 앞서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비판적인 댓글을 쉽게 단다. 그 비판이 타당해도 “이러다가 비판이 몸에 배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비판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교만이 방지되고 조금 더 사람답게 되고 조금 더 성도답게 된다. 어떤 글을 보면 키보드를 마구 치며 댓글을 달고 싶지만 그때 한번이라도 자제하면 그 한 번의 자제도 하나님은 한 번의 선행에 못지않게 기억해주시고 신비하게 보상해주실 것이다.

 남을 위해주는 말도 의와 순리를 따라 하라. 불의와 역리가 섞이면 남을 생각해주는 말이 오히려 남의 체면을 깎을 수 있고 잘못된 비인격적인 사람이 위해주는 말은 오히려 위해(危害)를 줄 때도 많다. 부모는 자녀에게 “얘야, 물질이나 외모와 상관없이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고 당부한다. 하나님도 그런 당부를 하신다. 나를 위해준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의 사람됨을 보고 좋아하라.

 때로는 남을 위해준다면서 불명확한 말로 논란과 싸움을 일으킬 수 있기에 남에 대한 말은 가급적이면 힘써 절제하라. 거짓으로 위해주는 말을 해도 안 된다. 사람은 수시로 거짓말을 한다. 시간 약속을 어기면 그것도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그런 인간의 연약성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십계명의 9계명을 주실 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단순한 거짓말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인 거짓 증거를 훨씬 큰 죄로 여기셨다. 남에게 이익을 주는 거짓 증거도 결국은 해가 되는 죄다.

 만약 누가 “우린 친구잖아. 친구가 이럴 때 도와야지.”라고 하면서 의와 도리와 정상이 아닌 길을 은근히 요구하면 그는 진짜 친구가 아니다. 진실한 친구는 “우린 친구잖아.”는 말을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다. 친구는 바른 길을 가도록 잠잠히 곁에 서서 성원해주고 기도해주는 대상이지 청탁이나 이용이나 파당 대상이 아니다. 진짜 친구는 인생의 천군만마가 되지만 친구를 사칭하는 친구는 인생의 올가미가 된다.

 남과 관련된 말은 위해주는 말도 절제하고 수군거림은 더 절제하라. 비판은 신중히 하라. 비판보다 더 안 좋은 것은 남이 이룬 것을 허물고 남의 명예를 불의하게 깎아내리는 불의한 비판인 비방이다. 왜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는가? 모세가 피부가 검은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처자가 있는 모세의 그 행동은 분명히 잘못이다. 그래도 그것을 정당하게 비판하지 않고 불의하게 비방했기에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 비방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

 본문에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에 대해 모세를 비방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나병에 걸린 미리암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으로서 회복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회개하라

 아론은 미리암의 나병이 모세를 비방한 죄 때문임을 금방 깨닫고 모세의 산적인 권위를 인정해 3살 아래인 동생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지칭했다(11절). 아론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세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2절). 회복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다. 죄 사함 받아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도 회개에서 시작된다.

 가끔 매스컴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양심선언을 한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지 양심선언을 빙자해 자기만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는 모습은 오히려 비양심적일 수 있다. 회개와 양심선언은 다르다. 양심은 왜곡될 때도 많고 온전할 수 없기에 회개가 중요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위대한 인물이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까지 했지만 회개하지 않아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되었다. 양심의 가책에 의한 행동에서 끝나지 말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통해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역전 인생의 서막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생각이 복된 사람을 쓰신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라. 예수 믿고 건강과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욱 큰 축복은 깨닫는 축복이다.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달라진다. 자신을 바로 보면서 소망을 크게 보고 문제를 작게 보라. 그런 마음과 생각과 시각의 변화가 참된 회개를 통해 나타난다.

2. 용서하라

 아론의 회개의 고백을 받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소서(13절).” 모세가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털고 간절히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것은 그녀를 진심으로 용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용서가 가능했겠는가? 자신도 부족한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족한 죄인임을 알 때 남에 대한 용서도 쉬워진다. 그래서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 용서도 잘한다.

 상처를 잘 잊고 용서를 잘하라. 교육적인 목적으로 누군가를 멀리해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용서하면서 앞날의 축복을 빌어주라. 하나님은 용서하는 사람을 용서해주신다.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용서 때문이다.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사람은 마음이 건강해야 불행과 고통이 줄어들고 가정도 평안해진다. 어떻게 마음이 건강해지는가? 회개와 더불어 용서에 탁월해야 한다.

 예수님은 예배드릴 때 남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한 후 예배드리라고 했다. 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기 때문이다. 원수도 사랑하고 미운 자도 용서하고 축복해야 어떤 시련도 이겨내는 건강한 마음을 얻는다. 용서하기 힘들 때 용서하는 마음처럼 소중한 인생 자산은 없다. 남을 욕하고 비판하면 행복 가능성은 낮아지지만 용서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훈련해 가지면 영혼도 회복되고 공동체도 회복되고 복된 미래도 펼쳐진다.

3. 침묵하라

 히브리인들은 사형죄나 추방죄 외에 일반적인 중죄를 범하면 그 아버지나 형제가 범죄자에게 침을 뱉어 큰 모욕을 주었고 동시에 7일간 진영 밖에 가두어 참회 기간을 가지게 했다. 그처럼 비록 미리암의 죄를 용서했지만 하나님은 그냥 용서하지 않고 관례를 따라 7일간의 진역 밖에 가두어 참회 기간을 가지게 했다(14절). 그 기간은 자기 성찰과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사랑에는 격리와 침묵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시각을 가질 때 사람은 성숙해진다. 침묵과 격리를 통해 영혼의 가벼움을 극복해야 쓰임 받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은 큰일을 맡기실 때 무게가 있고 진지하며 배울 자세가 되어 있고 배운 것을 온 몸을 다해 실천하려는 성도에게 맡기신다. 그런 성도가 되려면 침묵과 격리를 통해 자기를 성찰할 줄 알아야 한다. 공동체 생활에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급적 만남과 전화통화의 횟수를 줄이라. 침묵의 힘은 의외로 크다. 침묵을 배경으로 한 말은 성음이 되지만 침묵의 배경이 없는 한 말은 소음이 된다. 침묵하라고 해서 전혀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말을 조금이라도 줄이라는 뜻이다. 일정 기간의 격리도 침묵을 위한 것이다.

 사람으로부터의 격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환경이 자신을 격리시키는 상황으로 펼쳐지면 그 기간을 교훈 기간으로 삼으라.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가끔 여백도 만들고 떨어져 있으라. 배우자가 가끔 조용히 기도도 하고 독서도 하고 혼자 차도 마시는 상황을 즐기도록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지혜롭게 마련해주라. 너무 채워지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더 신경 쓰이고 짜증 지수가 높아진다. 왜 기도할 때 눈을 감는가? 그것은 가장 쉬운 침묵과 격리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치들을 영혼에 채우는 데 가장 중요한 훈련 중 하나가 침묵 훈련이다.

4. 잠시 서라

 미리암을 격리시킨 7일 동안 모세와 이스라엘은 행군하지 않았다(15절). 한 사람 때문에 전진이 멈춰졌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감수했다. 가끔 전진을 잠시 멈추라. 말을 그치는 침묵도 필요하지만 행동을 그치는 멈춤도 필요하다. 쉼이 없이 달리는 것은 일종의 집착이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고 집착하면 ‘망가지는 것’이다.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집착이다. 누군가 나를 꼭 떠나겠다고 축복하며 보내주라. 사람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만 떠나지 않으면 된다.

 여백이 있는 삶이 복된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도 주셨다. 밤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창조적인 역사가 준비되고 이뤄지는 시간이다. 저에게는 밤 9시부터 아침 7시까지가 주된 말씀 묵상 시간이다. 그 밤의 창조적인 묵상이 없었다면 성경 전체 강해의 비전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밤을 창조적인 시간으로 만들라고 주셨다. 목회자는 주일이 가장 바쁘듯이 밤도 가장 바쁘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만들 줄 알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밤에 고요한 묵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사람에게 침묵과 멈춤도 필요하듯이 밤과 잠을 통한 안식도 필요하다. 가끔 의견 갈등이 생기면 침묵하라. 침묵은 말의 안식이다. 싸움이 있을 때 침묵을 통해 그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부부는 다툰 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신기하게 잠을 푹 주심으로 상처 회복의 기간을 단기간에 끝내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지만 고난당하는 자에게도 잠을 주신다. 결국 밤, 잠, 침묵, 멈춤, 안식, 주일성수는 크게 보면 다 유사한 개념으로서 승리와 행복의 주요 원천들이다.

< 실패를 쉼으로 승화시키라 >

 삶은 낮과 밤으로 이뤄졌다. 삶에서 밤의 안식이 없다면 인생과 세상은 무섭게 망가진다. 안식의 밤이 없으면 문제의 밤이라도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문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의 순간을 안식의 기회로 삼으라. 그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하라. 능동적으로 쉼을 가지되 수동적으로 쉬게 된 상황도 두려워하지 말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잠시 서면 뒤처질 것 같지만 그때 잠시 앉아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

 지난주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집필을 하는데 컴퓨터 키를 잘못 눌러 갑자기 쓰던 글이 사라졌다. 몇 시간의 작업이 날아갔다. 원고 마감을 앞둔 바쁜 기간에 그런 일이 생겨서 너무 속상했다. <월새기>를 집필할 때는 마지막 순간에 심혈을 기울인 문장들을 새롭게 묵상해서 곳곳에 첨부해 넣는다. 그런 문장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몇몇 문장들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전에는 몇 시간 정도라도 그 속상함의 여파가 지속되었지만 지난주에는 그 속상한 기분을 10분 정도만 가졌다가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때 “잊어버린 말씀은 하나님이 들려지지 않기를 원하는 말씀인가보다.”라고 툴툴 털고 하루 분 말씀을 탈고했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1년도 손해 보는 사람이 있는데 몇 시간 손해 본 것에 너무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금방 툴툴 털고 일어서자 저 자신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처럼 “하나님이 그 상황을 만드셨다. 무슨 선한 뜻이 있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쉽고 속상한 일을 금방 잊고 툴툴 털고 일어서면 곧 기분이 좋아진다. 믿음으로 그런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라. 잠시 늦어짐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면 사실상 늦는 것이 아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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