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자 (시편 15편 1-5절) < 사람에게 청탁하지 마십시오 >
MBC 신우회는 1980년에 시작되어 매주 수요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1대 지도목사는 하용조 목사님이었고 저는 1996년부터 1998년 초까지 약 2년 동안 5대 지도목사로 있었습니다. 1997년 말 어느 날, 선교회 대표였던 A 목사님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 제게 부탁했습니다. “이 목사님! MBC 신우회 예배 때 말씀을 한번 전하게 해주십시오.” 당시 저는 세상을 순수하게 보았기에 그것은 ‘청탁’이 아닌 ‘단순한 부탁’으로만 알았습니다.
당시 예배 때 가장 은혜 받은 사람은 보도 분야의 최고 책임자인 보도이사였습니다. 그분은 대학 20년 후배인 젊은 목사의 말씀도 겸손하게 받고 제가 예배를 인도할 때부터는 매주 충실하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MBC 이사는 2500명 직원 중 각 분야에 8명밖에 없는 사장 다음 자리였습니다. 그 밑으로 지방 MBC 사장, 국장, 차장 등의 직급이 있었고 당시에 엄기영 앵커는 보도국 차장이었고 정동영 앵커는 그 밑에 있었습니다.
당시 A 목사님은 전국적인 보도 기회를 얻어 미약한 인지도를 높이려고 MBC 신우회 예배 때 자신이 설교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저는 그 부탁을 깊은 생각 없이 들어주었습니다. 신우회 예배는 수요일 점심시간에 드렸기에 설교를 짧게 해야 했지만 그분은 1시간을 설교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왜 대선에 출마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한참 했습니다. 일부 직원들이 안 좋은 표정이었고 저는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기자들 중심으로 이런 말이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왜 이 목사님이 예배 때 정치 목사를 불러왔는지 모르겠다. 의도가 의심된다.” 저는 지인 목사의 부탁을 ‘단순한 부탁’으로 여기고 들어주었지만 기자들은 제가 ‘불순한 청탁’을 들어준 것으로 오해하고 그 다음부터 일반 직원 외에 기자들만의 신우회 모임을 따로 가졌습니다. 결국 저는 분당에서 교회를 새로 개척해서 바쁘다는 명목으로 MBC 지도목사 직을 사임했습니다.
A 목사님은 제가 그분의 부탁을 한번 잘못 들어줌으로 성도들의 존경심을 잃고 자리를 내놓은 사실을 20년 가까이 아직도 모릅니다. 아마 본인은 그때 열정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설교로 MBC 직원들을 감동시켰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이 나뉘고 누군가 소중한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청탁은 받지도 말고 하지도 마십시오. 청탁과 부탁을 잘 분별해 청탁이란 느낌이 들면 바로 발을 빼십시오. 돈을 매개로 불의한 청탁을 주고받는 것은 자기 욕심 때문에 인생과 자리를 걸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처벌과 징계를 받는다면 별로 억울할 일이 없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란 심정으로 깊은 생각도 없이 청탁에 연루되었다가 옷을 벗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손해와 피해입니까?
사람들은 언뜻 생각할지 모릅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정으로 말씀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죄냐?” 그러나 죄는 아니라도 그 부탁이 누군가에게는 청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성도가 청탁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저게 뭐냐?”라고 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이름까지 훼손됩니다. 청탁은 인생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다른 부작용도 낳을 수 있기에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가 청탁문제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면 말씀사역의 영향력이 훼손되기에 목회자는 더욱 청탁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청탁자는 돈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청탁대상자는 돈을 안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때는 청탁브로커가 중간에서 돈을 가로챈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청탁브로커도 열심히 뛴다고 하지만 요새 청탁은 사회적 생명이 걸린 것이기에 사람들이 주의해서 거의 안 통합니다. 결국 상당한 인맥으로도 결정권자를 움직이기 힘들고 대개는 결정권자에게 청탁이 도달하지도 않습니다.
청탁해주겠다는 청탁브로커의 약속과 장담을 믿지 마십시오. 또한 결정권자와 직접 닿는 최대 인맥이 있어도 청탁하지 마십시오. 특히 잘 통하지도 않는 인맥으로 청탁에 나서면 요즘에는 청탁에 연루되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회분위기로 인해 괘씸죄가 발동해 결과가 더 나빠질 때도 많습니다. 결국 청탁하면 대개는 더 손해입니다.
1976년 저희 아버님은 형님이 입대할 때 형님이 좋은 보직을 받도록 아버님의 군 인맥 청탁브로커를 통해 여러 곳에 손을 썼습니다. 아버님은 평양사범 졸업 후 무관학교를 다닌 백선엽 장군의 2년 후배였고 1945년에 조만식 선생 밑에서 평양 치안대를 잠깐 맡았습니다. 그 후 김일성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47년에 월남하면서 군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러나 형님을 좋은 곳으로 빼내는 데 그 30년 전의 화려한 군 인맥은 실제 효과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청탁브로커의 약속만 믿고 가족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어느 좋은 부대에 배치될까 기대했지만 형님은 가장 훈련이 세다는 수도기계화사단(수기사, 맹호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청탁이 전달되지 않았든지 청탁이 전달되었다면 괘씸죄로 걸린 것입니다. 그때 아버님은 청탁브로커에게 노발대발했고 청탁브로커는 갖가지 그럴듯한 핑계를 댔습니다. 그 행태가 응답과 치유를 약속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나오는 이단교주의 행태와 똑같았습니다. 그때 가족들은 거짓 약속에 속았다는 생각에 실망을 넘어 허탈했습니다.
청탁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허접한 인맥을 통해 뻗쳐오는 청탁은 결정권자가 청탁압력을 받는 것 자체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여기기에 괘씸죄가 작동해 결과가 대개 안 좋게 됩니다. 뇌물도 받지 않았는데 자기 자리를 위태하게 만들 수 있는 청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밉게 보이겠습니까? 심지어는 직속상관을 통해 청탁압력이 들어와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즘은 부당한 청탁이 거의 역효과가 되는 시대입니다.
1980년, 나이 50세도 안 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권력을 잡아 보안사는 제일 강한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습니다. 당시 보안사의 일부 영관급 장교는 짧은 기간에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보안사 쪽으로 청탁하면 안 될 일도 되었습니다. 보안사 사병들에게는 장교들도 쩔쩔 맸습니다. 제가 금곡의 73훈련단에 있을 때 남들은 죽도록 훈련할 때 보안사 사병들은 머리를 기른 채 근무시간에 족구를 했습니다.
저와 같이 입대한 동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저는 73훈련단에서 205연대 13중대에 배치되었고 그 친구는 14중대에 배치되어 고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 그는 가장 편하다는 의무병으로 차출되어 갔습니다. 보안부대 군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빽으로 보직이 변경된 것입니다. 그런 혜택이 부러운 일 같지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은 통하기 힘든 일들이 그때는 쉽게 이뤄졌습니다.
아버님은 브로커 말을 듣고 잘못된 기대감을 주었다가 오히려 가장 힘든 부대에 배치된 형님에게 미안했던지 입대 초창기에 저희 7남매에게 거의 매일 돌아가면서 위문편지를 보내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형님의 시련은 고마운 시련이었습니다. 그 3년간의 수기사 복무로 인해 형님이 강한 의지와 배움의 열망을 가진 청년이 된 것입니다. 그 후 복학해 졸업할 때까지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는 등 큰 학업적인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당시 아버님이 바른 교회를 다녔다면 그런 청탁은 하지도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잠깐 바른 판단력을 잃고 청탁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 청탁이 받아들여졌다면 형님은 더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뤄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청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최선을 다해 자기 할 일을 정당하게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완벽하게 살지는 못해도 바른 믿음의 길을 고수하고 흔들림을 줄이면 열매의 크기도 커지고 행복의 크기도 커집니다.
<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자 >
시편 15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지 다윗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한 시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이 구절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와 ‘주의 성산에 사는 자’란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자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본문 5절 말씀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됩니다. 누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될까요?
1. 정직하고 의로운 자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정직과 공의와 진실은 성도의 삶의 기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모습 그대로 정직하고 진실하게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얕은꾀와 계산적인 삶과 척 하는 삶을 싫어하시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의로운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편한 삶보다 진실한 삶을 앞세우고 즐거운 삶보다 바른 삶을 앞세우십시오.
삶이 힘들 때 사람을 찾아 의지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나고 가슴이 답답해도 사람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꼭 붙들고 사는 의인은 결국 승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의롭게 살려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패배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과 대적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롭게 살면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과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십시오.
2. 이웃을 사랑하는 자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이웃에게 악한 언행을 쓰지 말라는 말씀인데 큰 의미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헛된 말이나 비난하는 말로 이웃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입히지 마십시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남을 잘되게 할 때 내가 잘 되고 남을 복되게 만들 때 내가 복되게 됩니다.
복은 남을 기쁘게 만들 때 주어집니다. ‘혼자만의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함께 누리는 복'이 진짜 복입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둔 남을 행복하게 해야 비로소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성경적인 복입니다. 복의 의미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축복을 원하면 초점을 자신보다 남에게 맞추십시오. 상대의 불행은 나의 행복 및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성경적인 참된 복은 남의 행복을 통해 내가 행복해지는 복입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 구절에서 ‘망령된 자’는 ‘하나님의 이름과 뜻을 멸시하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멸시를 받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존대를 받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최상으로 높이는 태도입니다.
왜 성도의 약속인 서원은 손해가 되어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면 다른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존재가 진짜 두려운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4. 순수하게 헌신하는 자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유대 사회에서 이자놀이는 이방인을 대상으로는 허용되었지만 가난한 동족을 대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사문화되어 이자놀이로 가난한 동족을 착취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자놀이를 기뻐하지 않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마음과 양심을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계산하며 살지 말고 헌신하며 사십시오. 삶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계산적인 삶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계산적인 삶을 잘 극복하려면 드리는 훈련을 잘하십시오. 받으려는 마음은 천하고 불행한 인생을 낳지만 주려는 마음은 고귀하고 행복한 인생을 낳습니다. 성경적인 복은 ‘소유의 복’이 아닌 ‘헌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드릴 줄 알고 대가를 치를 줄 아는 감사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은 재앙을 막아주시고 재앙이 와도 능히 극복하게 하시고 더 큰 축복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 자발적인 헌신의 축복 >
목회자에게 음지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영적인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그 수표에 무엇이든지 쓰면 그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해서 목회자가 깊은 생각 없이 쓸까요? 그렇게 쓰면 원하는 것은 얻어도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의 은혜가 예전과 같지 않게 될 수 있기에 아무리 급박해도 스스로는 거의 안 씁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남의 부탁을 받고 마지못해 헌신하는 것보다 성령의 감동으로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훨씬 더 헌신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고 후유증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부탁을 하면 도움은 받아도 그만큼 존경심이 약화됩니다. 그러면 말씀의 은혜와 영향력도 소리 없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고 스스로 어떤 감동이 생겨 자발적으로 헌신하면 존경심도 약해지지 않고 말씀의 은혜와 영향력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목회자는 아무리 어려워도 개인적인 부탁은 삼가는 것이 좋고 청탁으로 여겨지는 요청은 더욱 피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청탁으로는 고개를 숙이지 말고 오직 겸손함으로만 고개를 숙이십시오. 그래야 성도라는 이름과 영향력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처럼 무엇을 부탁해서 얻으려는 삶을 힘써 삼가야 떳떳하게 내일의 복을 예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누가 주의 사랑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한 후 정직하고 의로운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순수하게 헌신하는 자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의 기본적인 원천입니다.
초대교회가 그 엄청난 핍박을 이기고 어떻게 로마를 정복했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완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바로 로마를 정복한 힘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이기적 자기 사랑이 너무 지나칩니다. 거기에서는 결코 삶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의 헌신을 각오하는 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결국 무엇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헌신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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