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으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디도서 1:2).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너무 익숙하게 입에 담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단지 시간이 끝없이 길어지는 연장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 창조의 생명이며,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존재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영생이 어디에 기대어 서 있는지, 무엇 위에 견고히 놓여 있는지 우리에게 단숨에 보여 줍니다. 영생은 우리의 결심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도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시간의 시작 이전부터 약속하신 약속 위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디도서 1장 2절은 짧지만, 한 사람의 구원이 얼마나 깊고 오래된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성도의 소망이 얼마나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지는지 선명하게 드러내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바울은 디도서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하며 믿음과 진리와 경건을 잇습니다. 믿음은 공중에 떠 있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뿌리내린 신뢰이며, 진리는 차가운 지식이 아니라 경건으로 열매 맺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과 진리와 경건이 마침내 어디로 우리를 이끄는가 하면 “영생의 소망”으로 이끕니다. 여기서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보증을 가진 기다림입니다. 세상은 소망을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성경은 소망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향한 현재의 확신’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망은 우리의 체력이나 의지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하늘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진 것이며, 시간 속에서 집행만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소망은 불확실성의 안개가 아니라, 약속의 빛 아래에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약속의 성격을 더 강하게 못 박습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 하신다’는 윤리적 진술을 넘어, 하나님 존재의 본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하나님에게는 변개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인간의 약속이 흔들리는 이유는 인간이 약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변하기 때문이며 인간의 지식이 제한되기 때문이며 인간의 선함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꼭 하겠다” 말해 놓고도, 상황이 바뀌면 말을 바꾸고, 감정이 바뀌면 책임을 미루고, 손해가 보이면 발을 빼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정이 바뀌어도 처음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뜻의 변경’이 아니라 ‘뜻의 성취’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약속은 인간 언어의 얇은 종이에 적힌 계약서가 아니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품 위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영원한 때 전부터”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의 마음을 시간 너머로 끌어올립니다. 영생은 우리가 회개한 그날 갑자기 하늘이 즉흥적으로 마련한 선물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시간의 문이 열리기 전부터, 영원 가운데서 이미 계획하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이 먼저 뻗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먼저 우리를 붙잡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은혜의 주권은 차갑고 딱딱한 운명론이 아니라, 흔들리는 인간을 붙드는 따뜻하고 능동적인 사랑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땀과 계산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하루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눈물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닻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약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은 우리가 세운 탑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이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말이 가진 복음의 달콤함을 더 깊이 맛보게 됩니다. 약속은 ‘자격 증명서’가 아니라 ‘은혜의 선언’입니다. 약속은 ‘당신이 충분히 노력하면 주겠다’가 아니라 ‘내가 주겠다’입니다. 약속은 거래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물론 성경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값을 치르는 행위가 아니라, 빈손으로 받는 손입니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약속은 구체적인 길을 택합니다. 십자가는 약속의 중심이며, 부활은 약속의 공개적 승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치르심으로 약속은 도덕적 타협이 아니라 공의의 완성 위에 세워졌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깨뜨리심으로 약속은 희망사항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죽은 뒤의 위로’로만 남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성도를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됩니다.
영생을 ‘약속으로’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 이야기가 우리의 자서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사 속에 기록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내가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이 상 주셨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무너졌는데도 하나님이 붙드셨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담대하게 만듭니다. 겸손은 “내가 했어”라는 허영을 꺾고, 담대함은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확신으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자기 의를 붙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듭니다. 참된 성도는 자기 성과를 증거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붙드는 자는 반드시 경건으로 나아갑니다. 은혜가 방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우리를 거룩으로 이끕니다. 약속의 빛을 본 사람은 어둠을 장난처럼 만지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향기를 맡은 사람은 죄의 썩은 냄새를 익숙함으로 포장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의 본질을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영생은 단지 ‘살아 있음’의 무한 연장이라면, 죄인에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죄가 영원히 지속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지옥의 정의와 닮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남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누리는 생명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 안에서, 새 마음과 새 소원과 새 능력으로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미래에 완성되지만 현재에 시작됩니다. 성도는 이미 영생의 씨앗을 받은 자입니다.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미 시작된 새 생명의 물줄기가 성도의 마음과 삶을 적십니다. 우리가 아직도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그 새 생명의 방향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주는 위로는 특히 흔들리는 날에 선명해집니다. 성도는 종종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질문합니다. “내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내 믿음이 너무 약한데, 내 마음이 너무 변덕스러운데, 내 죄가 너무 끈질긴데.” 이 질문은 때로 진지한 회개의 길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그때 본문은 우리에게 시선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끝없이 해부하는 자리에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네 결심의 선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선명함을 바라보라. 네 눈물이 구원을 사는 동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을 이루는 값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얻는 길은 ‘내 안에서 확실한 어떤 증거’를 찾아내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은 열매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그 열매조차도 우리의 기초가 아니라, 기초 위에 피는 꽃입니다. 기초는 약속입니다. 기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확신은 자기평가의 점수표가 아니라, 언약의 인장처럼 찍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는 높고 바람은 사납고, 선원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배가 뒤집히지 않게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살아남는 결정적 이유는 선원들의 팔 힘이 아니라, 바다 밑 깊은 곳에 내려진 ‘닻’입니다. 배 위에서는 모든 것이 흔들리지만, 닻이 걸린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감정도, 환경도, 몸도, 관계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붙드는 것은 우리가 난간을 얼마나 꽉 붙잡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견고히 붙잡고 계시느냐입니다. 닻이 깊을수록 배는 폭풍을 견딥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의 바닥보다 더 깊은 곳, “영원한 때 전부터” 내려진 닻입니다. 그러니 흔들리는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팔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닻이 걸린 반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반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영생은 우리 삶을 어떻게 빚어 가는가. 먼저, 약속은 우리에게 정체성을 줍니다. 성도는 ‘유한한 인생을 연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불린 사람’입니다. 이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는 눈입니다. 고난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불운이 아니라, 약속의 백성을 다듬는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실패는 더 이상 끝이 아니라, 약속의 손이 우리를 다시 붙들어 세우는 자리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약속이 완성으로 열리는 문입니다. 약속은 성도를 낙심으로부터 건져내어, 슬픔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는 기둥을 세웁니다. 우리의 신앙이 얇은 낙관주의라면 고난 앞에서 찢어지지만, 약속 위에 세워진 신앙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집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고난의 부재를 약속하지 않고, 구원의 성취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속은 성도에게 거룩의 방향을 줍니다. 영생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값없이 머물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약속의 보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경건은 공로를 쌓기 위한 등반이 아니라, 이미 받은 생명이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미 받아들여졌기에 거룩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신앙은 숨 막히는 종교가 되지만, 이 순서가 바로 서면 신앙은 자유로운 순종이 됩니다. 약속은 우리를 율법주의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동시에 방종의 거짓 자유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약속의 사람은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지 않되, 자기 죄에 눌려 끝내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회개하는 자를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약속은 교회 공동체를 세웁니다. 영생은 개인의 은밀한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공동의 유업입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함께 유업을 향해 걷는 동행자로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녀요, 한 언약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약속으로 살려 주신 자들의 모임’입니다. 약속을 믿는 교회는 숫자나 성과로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는 교회는 연약한 지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는 교회는 시간 앞에서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방식은 때로 느리게 보이지만, 결코 늦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자라듯, 복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세대를 바꿉니다. 약속은 우리가 성급한 조작으로 열매를 만들어 내게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인내로 열매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는 약속의 내용이자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은 인격 없는 에너지나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망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닮아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은 천국의 황금길만 그리는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되는 완성의 소망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이 부족하고,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이 더디며, 찬양하고 싶어도 마음이 무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말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너를 끝까지 빚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 성령께서 너를 인치셨으니 마지막 날에 너를 잃지 않으실 것이다. 이 약속이 성도를 울립니다. 이 약속이 성도를 일으킵니다. 이 약속이 성도의 밤을 새벽으로 바꿉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한 절의 빛 아래에서 결단합니다. 내 구원의 근거를 내 마음의 온도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겠습니다. 내 신앙의 무게를 내 어깨에만 올려놓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겠습니다. 내 미래를 내 계산으로만 세우지 않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영생을 받은 자답게, 오늘의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기도 한 줄, 말씀 한 구절, 용서 한 번, 숨은 섬김 하나가 영생의 사람에게는 영원을 향한 걸음이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해지지 않지만, 약속 때문에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넘어지지만, 약속 때문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떨지만, 약속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보증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약속을 붙들고, 영생의 사람답게 살며, 마지막 날에 약속의 완성을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설교요약
디도서 1:2는 영생이 인간의 노력이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졌음을 선언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며, 영생의 약속은 “영원한 때 전부터” 계획된 언약적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소망은 불확실한 기대가 아니라 확정된 약속의 기다림이며,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약속의 영생은 현재 성도의 정체성과 거룩과 인내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세우며, 마지막 날 완성으로 인도한다.
묵상 포인트
하나님의 약속을 내 감정과 성과의 잣대로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흔들릴 때마다 내 손의 힘을 점검하기보다, 약속의 반석을 바라보고 있는가.
영생을 ‘미래의 보상’으로만 축소하지 않고 ‘현재의 새 생명’으로 누리고 있는가.
은혜가 방종이 아니라 거룩의 동력이 되도록, 오늘 어떤 죄를 끊고 어떤 선을 선택할 것인가.
교회와 이웃을 경쟁이 아니라 언약의 동행으로 보고 있는가.
강해
본절은 ‘영생의 소망’을 약속의 토대 위에 놓는다. ‘소망’은 불확실한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확실한 확정성을 가진 미래 지향이다. 약속의 주체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며, 이는 약속의 신뢰성을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시킨다. 약속의 시점은 “영원한 때 전부터”로 제시되어 구원이 역사 속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 전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서 비롯됨을 드러낸다. 이 진술은 성도의 구원을 은혜의 주권과 언약의 신실하심 위에 세우며, 결과적으로 성도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확신과 인내를 갖게 된다.
주석
‘영생’은 시간의 무한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의 질을 포함한다. ‘소망’은 성경에서 종종 확정된 약속을 미래로 향해 기다리는 현재의 신뢰를 뜻한다. ‘거짓이 없으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부정이 불가능한 진리의 성격을 가진다. ‘영원한 때 전부터’는 구원의 근원이 창조 이후의 상황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있음을 보여 준다.
원어 주석(헬라어-신약)
ἐπ’ ἐλπίδι ζωῆς αἰωνίου: “영원한 생명의 소망 위에/소망을 두고.” ‘ἐπ’(ἐπί)는 ‘~위에, 근거하여’의 뉘앙스를 담아 소망의 토대를 암시한다.
ζωῆς αἰωνίου: ‘영원한 생명’은 단지 시간적 무한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생명, 종말론적 완성의 생명을 가리킨다.
ὃ ἐπηγγείλατο: “약속하셨다.” 약속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며, 구원의 시작이 인간의 기도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임을 드러낸다.
ὁ ἀψευδὴς θεός: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ἀψευδής’는 ‘거짓이 없는, 거짓말하지 않는’ 의미로, 약속의 신뢰성이 하나님의 성품 자체에 뿌리내림을 강조한다.
πρὸ χρόνων αἰωνίων: “영원한 때들 이전에/오랜 세대 이전에.” 시간 이전의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며, 구원을 영원한 언약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금언
약속이 흔들리지 않으니, 소망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 손이 약해도, 약속의 손은 약해지지 않는다.
구원은 내 결심의 기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다.
영생은 먼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오늘의 새 방향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늦어 보일 때에도 결코 늦지 않다.
신학적 정리
영생의 근거는 인간의 공로나 의지의 강도가 아니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는 진술은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경륜에 기원함을 시사하며, 은혜의 주권과 선택의 은혜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약속의 성취이며, 성령의 내주와 인침은 약속의 보증이다. 따라서 성도의 확신은 자기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근거한다.
주제별 정리
약속: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선언하시고 성취하시는 은혜의 언약.
소망: 불확실한 기대가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 확실한 기다림.
영생: 하나님과의 화목, 새 창조의 생명, 현재에 시작되어 미래에 완성됨.
신실하심: 약속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성품.
경건: 약속으로 얻은 생명이 반드시 맺는 열매이며, 공로가 아니라 결과.
목회적 정리
낙심하는 성도에게는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붙들게 해야 한다. 죄책감 속 성도에게는 자기혐오로 침몰하기보다 약속으로 회개를 지속하게 해야 한다. 고난 중 성도에게는 약속이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약속함을 가르쳐 인내를 돕는다. 교회 공동체에는 약속의 상속자라는 정체성을 회복시켜 경쟁이 아니라 동행의 사랑을 세워야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오늘 내 확신의 근거를 감정과 성과에서 약속으로 옮기겠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서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고정하겠습니다.
한 가지 죄의 습관을 구체적으로 끊기 위해 회개와 실천의 작은 규칙을 세우겠습니다.
낙심한 지체 한 사람에게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하며 실제적 도움을 베풀겠습니다.
죽음과 미래를 두려워할 때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기도로 마음을 붙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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