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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일을 마치려는 사람! (행 20:17-25)

by 【고동엽】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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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려는 사람! (행 20:17-25)

 

어떤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신문에다가 이런 광고를 실 른 일이 있다고 합니다. 누 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 실로 만족하다고 하고 이것 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제가 백만불
을 드리겠습니 다. 라고 했더랍니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수많은 사람들 수백명의 지원자가 모여 들었습니다. 저마다 자기는 만
족하고 자기는 스 스로 행복하다가 자기 행복 한 내용을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
업에 대해서 만족하다고 어떤 사람은 자 기가 받는 보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은 자기는 받는
보수 에 대해서 스스로 항상 만족 하게 생각하게 아무도 부러 워하지 않고 산다고. 또 어
떤 사람은 아내에게 만족하 고, 어떤 사람은 남편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만족하고, 어떤 사
람은 자기 취미 생활 이 너무 좋아서 여기에 만족 함을 느끼며 산다. 그랬답 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 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저 는 불평하고 싶어도 불평할 꺼리가 없
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괘변도 있었답니다. 계속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행복과 만족을 발표
했지만 어느 사람의 설명도 납득할 만한 것이 못돼서 결국은 백 만불 상금은 아무도 받지
못 했답니다. 그 왜그랬냐? 하 면은 이 주인공 되는 이 광 고주가 단 한마디의 질문을 했는
데 이 질문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당 신들은 진실로 당신의 생활 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면 내 돈 백
만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이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참 행복이
라는 것은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어 야 행복입니다. 아직도 돈 백만불이 필요하거든요.
아 직도 또 어떻게 되길 바라는 게 있죠. 기대가 있고 바라 는 것이 있는 동안은 엄격히 말
하면 행복은 아닙니다. 이대로 이 형편 이대로 이모 습 이대로 만족해야 그것이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스스로 행 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참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한 순간에
내 모든 소원을 다 이루고 만것입니다. 다시 다른 소원이 있을 필요가 없 습니다. 그래야 행
복한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최고 의 만족을 스스로 말하고 있 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에 복 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
노라.” 바로 여기에 행복에 극치가 있습 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에 보면 은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믿음과 재물에 내가 나를 관제
로 드릴지라도 기 뻐하리라. 관제로 드릴찌라 도 기뻐하리라.” 관제라 함은 피를 쏟아 붓는
단 소립 니다. 양을 잡아서 선지 피 가 솟아 오를때 그것을 바께 쓰에 받아다가 제단에 붓
습 니다.
그와 같이 내가 이 시간에 죽어서 비참하게 죽어 피를 쏟아 부어도 나는 행복할 것 이다.
이런 행복이 진짜 행 복입니다.

우리가 성탄이 될때마다 듣 게 되는 곡이 있습니다. 이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원 래 오르
가니스트요 그는 오 르간 연주자로서도 탁월했다 고 합니다. 언젠가 그가 오 르간을 연주하
고 있을때 많 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하 고 크게 환호를 하고, 큰 칭 찬을 보냈습니다. 그
리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의 연주는 두다리와 열 손가 락만 가지고는 모자라는 연
주같은데 이렇게 연주를 잘 하게 되는 비결이 뭡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 니다. 저
는 이 오르간을 연 주하고 있을때 내 마음과 생 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 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 다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 다. 그래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 정력과 생명 을 다하는 순간 순간 다하는 바로 거기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위해서 이렇게 해본일이 있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
다. 하는 그런 마 음으로 온 정력을 다 쏟는다 면 그야말로 행복한 것이지 요. 이런 경험을
한번도 못 하고 죽으니 불쌍한 사람이 지요. 이런 경험을 한번만 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
는 세상을 헛되이 산게 아니죠. 사람이 이 극단적인 감정이 라는 것은 언제나 그 표현에 있
어서 생명과 연결해서 표 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래서 우리가 우스우면 우스 워 죽겠다.
맛이 있어도 맛 있어 죽겠다. 졸려 죽겠다. 피곤해 죽겠다. 좋아서 죽 겠다. 뭐 죽겠다는 말
을 곧 잘 합니다. 이럴때에 흔히 들 생각하기를 아 이거 한국 사람들은 궁상 맞아서 걸핏
하면 죽겠다고 한다고 하지 만 그건 모르는 소리고 세계 어느나라 말도 마찬가지요.
사람은 원래가 죽고 싶은 본능과 살고 싶은 본능이 함 께 있답니다. 그러기 때문 에 어느
나라 말이든지 이걸 전문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 에 의하면 언제나 극단적 감 정 표현은 죽
음과 관련시키 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에 대해서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한이 없
다. 또 죽어도 행복하다. 죽음 과 관련해서 연관해서 표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극치
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 대로 죽어도 만족하다. 바 로 거기에 행복의 절정이 있 다는 말씀이
올시다.

사도바울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 가를 알
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 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 런 말씀이 있습
니다. 자기 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 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아무리 자기를 위해 살려
고 해도 살길이 없어요. 부득 불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 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구를 위해 사는 겁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 습니다. 때로 부모님들 가 운데는 참
우리 어머니들 가 운데 이런분들 많아요. 자 식을 위해 살지. 자식을 위 해 정성을 다하다가
마지막 에 그 아이들이 크면서 집을 나가버리면은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뭐 그러더만요. 그
건 처음부터 잘못 산 거예 요. 세상에 났다가 그래 자 식하나 낳아서 그거 키우자 고 살았
나? 그건 아니예요. 근데 어떤 부모가 이런 얘길 하는 걸 들었어요. 아이가 국민학교에 다니
는데 피아노 를 잘해요. 뭐 입상도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얘를 데리고 외국에 가서 여기
에 있는 살림을 다 때려 치우고 외국 가서 얘 하나 공부 시 키면서 우리 둘이는 돈 벌어 서
이 치닥거리 하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만들어 보겠다 고 저한테 와서 그럽디다요.
제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 다. 그래 얘가 피아니스트 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른지 못
될른지 그것도 모 르겠지만 설사 됐다 치더라 도 그래 하나님 앞에 가서 너는 참 너 딸하나
낳아서 잘 키우고 왔구나 그럴 것 같냐고 어떻게 딸 하나를 위 해서 일생을 살아야 되느냐
고 어떻게 그게 목적이 되겠 느냐고 자식을 키우지만 자 식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 래 되면
우상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될 만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 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바로 그 분이 내 생의 목적이요. 누
구를 위 하여 살고 누구를 위해 죽어 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어요. 삶에 목적도 분명하고 죽
어 야 할 이유도 언제나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깝지 않게 살았습니다. 온통 다 쏟으
면 살았습니다. 그것이 행복한것이죠. 미련 없이 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래 그가 간증하는 유명한 말 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것 이 그
리스도고 죽는 것도 유 익하다. 죽으면 끝난 것인 데 아니요. 죽는것도 유익 하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 입니다. 그렇게 살았다 그 말입니다. 이 행복한 사람 이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 으니까 뿐만 아니라 목적은 있는데 현실적으로 구체화되 지 못
한 목적에 실망이 있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 놓고는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몰라요. 이래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바 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여 기에 복음을 위하여 특별
히 이방인의 사도로써 은혜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매우 중 요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은혜의
복음 이것이 바울에 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내 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는 갈라디아 1장에서 고백합 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 을 입었다. 난 태어날때부 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태 어났다. 분
명합니다. 이렇 게 확실한 목적이 구체화된 그런 생을 살았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알고 있었어요. 좀 더 나아가서 는 내게 주신 경륜을 알았습 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복음 전파도 여러가집니다 만은 여러분 이것을 흔히 세 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성이 라고
교회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내게 주신 은사가 뭡니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게 주신
재주 탤렌트 나로 가능케 한 것이 무엇입 니까? 이것을 극대화 해나 가야 합니다. 가만히
보세 요.
음치가 음악공부 하겠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죽을 때 까지 해도 안되는 거지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한 평생 뭐 피아노를 치고 음악 을 한다고 해도 그래도 이게 탁월한 사람이
되야지 돼요. 도대체가 타고나야 되요. 제가 프엔치에 갔을때에 그 정명우씨가 오페라를 지
휘하 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 이 좋은 분이요. 시작하기 전에 들어오라고 해서 준비 실에
가서 기도를 하고 끝난 다음에 또 마치고 기도를 했 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었는 데 굉장합
니다. 제가 거기 서 지휘하는 걸 봤는데 두사 간 반을 내리하는데 거의 악 보를 한번도 안
봐요. 열렬 히 지휘를 하는데요 난 뭐 음악은 잘 모르겠고 지휘만 보면서 감동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그 물어보았 어요. 여기다 생을 다 기울 였어요. 어떤 분이 말하기 를 그 분
이 유명한 것은 악 보를 외우는 거래요. 그 큰 악보를 몽땅 외워가지고 연 습 시간에도 딱
딱 지적하는 데 외국 사람 그 코큰 자존 심 강한 사람들이 꼼짝을 못 한다고 그래요. 그렇
지요. 얼마나 성의를 다하는데 그 래 저는 여기 나와서 독창하 는 사람들 뭐 들고 하면 영
들을 마음 없어요. 뭐 그걸 뭐 그럴려면 그만두지 그걸 그러바에야 되겠어요. 좀 성의를 기
울여야지 하다못해 정 건망증이 있으면 손바닥 에라도 써가지고 나와야지 그걸 큰 악보를
들고 노래를 하겠다고 그래. 그건 청중 기만이요. 안그렇습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해
야 되겠습니까? 저는 어떤때 보면 언젠가 한번 누가 음악 회 오라고 그래요. 갔지요. 들어보
니까 시원치 않아요. 그 다음에 자꾸 또 오라고 그래요. 안가요. 제가 피차 가 고생이요. 들
어주자니 힘들고요. 이거야 말로 타 고나야 됩니다요. 하나님이 그쪽으로 은사를 주셔야해
요. 내게 주신 은사가 뭡니 까? 그걸 정확하게 알아가 지고 여기다가 온 정력을 쏟 아야 돼
요. 충성이란? 가 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요. 없는 재주를 부릴려고 한평생 몸부림 쳐
봤댔자 되 는건 아무것도 없이 절망 뿐 이요. 많은 사람 고생 시킵 니다. 자 조용히 남에게
주 신 은사 부러워 할 것 없어 요. 나는 나대로 나대로 나 에게 주신 훌륭한 것이 있어 요.
그것을 극대화해 나가 는데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 이예요. 하나님이 내게 주 신것이 무엇인
가? 이걸 잘 알고 있어요. 그것에 총력을 기울였어요. 행복한 사람이 요. 그뿐 아니라 어떻
게 해 야 되는것도 알고 있었습니 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오늘 본문에도 성령의 인도 함
을 받아 이끌리어 예루살 렘으로 가노라. 그는 겸손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 경에 보면은
주의 뜻이면 가 고, 주의 뜻이면 오리라. 아 주 겸손한 말을 합니다. 하 나님의 은사, 특별히
성령의 역사 앞에 그는 순리적으로 살았습니다. 닫힌문을 열어 달라고 몸부림 치지 않았습
니다. 안될것을 되게 해 달 라고 몸부림 치지 않았습니 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 는대로 겸
손하게 따라갔습니 다. 그곳이 어디든 감옥이 든 그곳이 사막이든 그곳이 어디든 그는 성령
의 역사 앞 에 조용히 순종하는 사람이 었어요. 그런고로 행복합니 다. 여러분 대개 보면 고
집 이 많은 사람, 제멋대로 하 는 사람이 절망합니다. 온 유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늘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끝 낼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 니다. 하나님이 이
제쯤은 하나님이 내 일을 끝내려고 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복 음 전하는 사역 이 사명을 이
제 마치려 함에 다 마칠때 가 왔어요. 결론을 지을때 가 왔는데 이때에 나는 내 생명을 조
금도 아깝게 생각 하지 않는다. 다시 헌신하 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일은 시작하기도
힘들지만 끝내는게 힘듭니다. 여러분 이 제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 니다만은 설교나 강연도
요 웅변하기나 강연 다 보면 어 떤 말로 시작하느냐 참 어렵 구요. 어떤 말로 끝내느냐 하
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혹 부부싸움 해봤어 요. 시작은 어떻게 해던간 에 이제 끝을
내긴 내야겠는 데 끝을 내고 자야겠는데 무 슨 말로 끝을 내나. 이게 어렵다고요. 감정이 격
해지 니까 말은 끝은 내긴 내야겠 는데 끝낸다는게 어려워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끝을 내야 죠. 로마서 13장 11절에 보 면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시 기, 어느
시점에서 생각해야 되느냐. 이 카이로스가 중 요하고 그 다음에는 시편 90 편 12절에 보면
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 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 서. 내가 지금 몇살입
니까? 여러분 나이가 얼맙니까? 거기에 걸맞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젊은 사람이 늙은 척
하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 고, 늙은 사람이 젊은사람들 하는거 하겠다고 하면 주책 이예요.
그걸 알아야 해요. 어느 책에 보니까 운동도 운 동 안해서 병든 사람도 많지 만은 적절하지
않은 운동을 죽은 사람도 많데요. 그렇 습니다. 제가 너무 일찍 목 사가 됐기 때문에 언제
한번 결혼주례를 하는데 나보다 나이 더 많은 사람을 주례했 습니다. 그랬는데 이사람이 언
젠가 한번 시카고에서 만 났는데 자기가 요새 정구를 친다고 그래요. 잘 친다고 젊은 사람
들하고 해서 내가 이긴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래서 내가 그거 조심하라고 격한 운동인데 그
런말을 하 고 돌아왔는데 몇일 있다고 소식이 왔는데 죽었다고 그 래요. 정구치다 죽었어요.
격한 운동입니다. 영국에서 는 나이 50이 넘으면 정구를 법적으로 못치게 한답니다. 우리나
라에 영화배우 제가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만은 뭐 친구들하고 축구하다가 죽었잖아요. 아
시죠? 그거 아무나 하는거 아니에요. 나이든 사람이 뭐 기분낸다 고 축구한다고 뛰다가 아
이 쿠 하고 죽었어요. 그러니 까 나이에 걸맞는 일을 해야 죠. 나이에 맞는 생각 나이 에 맞
는 행동 나이에 맞는 믿음 나이에 적합한 일을 해 야 돼요. 이제는 생을 정리 할 때에요. 이
제 또 일을 늘어 놓아서는 안돼요. 이 제는 줄여서 나는 이제 무엇 에 집중해야 하는가 남
은 시 간에 그것이 지혜란 말입니 다. 사도바울은 내 전도 사 업을 마치려 함에 나는 어떻
게 해야 되겠는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용기로 하나 님의 말
씀을 최선을 다해 전 했습니다만은 이제 달려갈 길을 다가고 마치려 합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의 죽음이 라고 하는 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스
스로 물 러가지만은 하나님의 사업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내 개 인의 일은 끝나지만은 하나
님의 일은 더 크게 역사될 것이예요. 그는 모든 욕망 을 다 버리고 평안한 마음을 가졌습니
다. 모든 기대감마 저 하나님께 바쳐버렸습니 다.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무엇이 됐으면 좋
겠다. 그 런 욕망도 없습니다. 이제 는 끝나는 시간이기에 불확 실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감
에 그의 모든 생각과 판단력 과 자기의 의지까지 다 포기 해 버렸습니다. 생명을 조 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하 나님께 생명을 완전히 바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의 사람으로 살아갑니 다. 더 위대한 여유가 있었 습니다. 이제는 계획도
없 습니다. 하니님이 인도하는 되로 예루살렘에 가면 가고 로마로 가면 가고 감옥으로 가면
감옥으로 가고 순교의 죽음이 다가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교하고 그럴 생 각이에요. 하
나님께 이미 깨끗하게 헌신해 버렸습니 다. 시작이 중요하지만은 끝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일단 끝을 맺 고 모든 전도사업과 계획을 일단 끝을 맺고 생명을 하나 님께
바치고 남을 생을 삶니 다. 몇일을 살던 어떻게 되 던 빈부귀천간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
명까지 바쳤으 니까 내 주여 인도하는 되로 어디서 죽던 주님 하시는데 로 하시옵소서. 그
렇게 남 은 시간을 살았더란 말입니 다. 이미 바쳤고 그리고 남 은 시간을 살았습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의 포로 생활을 했던 한 영국 장교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1945년 4월 8일 주일아 침에 본훼퍼목사님 독일 복 음주의 교회목사님은 지금 감옥에 갖쳐
있는데 그날 아 침에 아침예배도 마치기전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독일군인 둘이 찾아와서 죄
수 본훼퍼 우리를 따라와 그러더랍니 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가를 모두가 다 알고 있
습 니다. 이제 형장으로 나가 는 길입니다. 그때의 바로 그 영국군인 포로된 군인하 나가 말
하기를 “목사님 이 것이 마지막이군요. 안녕희 가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본훼
퍼 목사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유 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 이 끝입니다. 그러나 나
에 게 있어서는 이것은 내 생명 의 시작입니다. 감옥생활은 끝났습니다. 내 자유의 생 활이
시작됩니다. 세상 고 통스러운 생은 여기서 끝납 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 됩니다. 이렇게
간증하며 형장으로 나갔습니다. 여 러분 미래가 암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잘
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 패하고 오래살고 짧게 살고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그리 중요한게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깨끗하게 헌신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
지 않고 바쳐버리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덤으로 이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창조적 역사가 있고 새로운 용기가 함께하는 것이올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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