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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생명 걸고 한 모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는 조그만한 비행기를 타고 서른 몇 시간 동안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 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회사 사장이 '이것 참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이 들어 자기 회사 담배를 광고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린드버그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담배 한 개피를 주면서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불을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 5만불이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담배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담배라는 용어가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피워도 그만이고 안 피워도 그만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죄가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철저히 금했고, 심지어 죄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회를 더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공기만 들이쉬라고 구멍 두개를 뚫어 주셨는데 그것으로 연기통을 만들고 있으니 좋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할 수 있으면 피우지 마라.'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담배 회사 사장이 그렇게 엄청난 제안을 하자 린드버그가 얼굴 표정을 싹 바꾸고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이 말이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 당시에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자기들이 성금을 모아 서 10만불을 린드버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루이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더 선하다, 좀더 낫다, 좀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마음의 상태가 교만이요, 마음에 무엇인가 가득히 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가 교만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욕
키에르 케고르는 기독교 철학자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 사람은 평생 독신으로 있었기 때문에 창녀들의 유혹을 자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그가 마음에 드는 어떤 창녀 때문에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거기에 말려 들어가면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도 잘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자꾸 끌리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몹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일기장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마음의 깨끗함, 진정한 마음의 깨끗함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목적에 내가 몰두 할 때에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슴이 불 탈 때면 마음이 더러워질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면 내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흰 담비
북구라파에 사는 흰 담비는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흰 담비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즉, 흰 담비가 사는 굴입구에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담비를 굴 속으로 모는 것입니다.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기보다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거룩한 여인
가끔 나는 새벽기도회 때에 그런 생각을 한다.
새벽기도 나올 때에 남편과 아내가 둘 다 나오는 집도 있지만 대체로는 한쪽만 나오는 집이 많다. 집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그 중 하나만 교회에 나온다. 나머지 네 사람은 지금 자고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새벽기도 나와 여기서 기도를 할 때 그 자녀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하겠는가? 이게 거룩한 것이다. 가족들이 설사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다.
왜?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간절히 위해 기도하는 아내가 있지 않은가?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거룩하니라 한다. 영적으로 거룩하고,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는 다 남편이 지배하는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양심 깊은 속에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아내가 지배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더욱 그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악을 이기는 거룩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망나니' 딸 괘티 데이비스(48)가 10대 때 마약에 빠져 자살 직전까지 갔던 사실을 고백하며 마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체험담을 공개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인 데이비스는 시사주간지「타임」7일자 최신호에 실린 "마약중독'러브 스토리"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열다섯 살 때 나는 마약과의 '깊은 사랑'에 빠졌다."며 "마약에 취해 피가 욕실 바닥에 넘쳐나는 것을 상상하며 손목에 면도날을 댄 적도 있다."고 털어왔다.
그는 또 "한때 마약 때문에 남의 처방전을 훔치기도 했다."며 "직장마저 잃는 등 최악의 상태에 빠졌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굳게 결심하고 마약을 끊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 「플레이보이」 지에 누드모델로 출연하기도 했던 데이비스는 "아직도 혀끝으로 마약의 맛을 느끼고 있으며 영화에서 마약 복용 장면을 볼 때마다 충동이 일곤 한다."며 "이처럼 강력한 마약의 유혹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극복 수단'이라고 고백했다.
독수리 이야기
깊은 산마을 한 소년이 뾰족뾰족한 산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소년은 바위 틈 사이에서 새 둥지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새 알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좋다구나 하고 그 새알을 가지고 집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닭장 속에 그 새알을 넣어 두었습니다. 암탉 은 자기 알과 함께 그 새알도 잘 품어주었습니다. 얼마큼 지난 후 다른 알과 함께 그 새알도 부화되어 새 생명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노란 병아리들과는 달리 그 큰 새알에서 나온 병아리는 유독 검으칙칙하고 덩치도 컸습니다. 암탉 은 < 별일도 다 있다. 어디서 저런 별종이 나왔누 > 하였습니다.
어미 닭은 어린 병아리들에게 모이 주워 먹는 법, 물 먹는 법, 지렁이가 많은 곳, 벌레 많은 곳, 쪽제비 피하는 법, 등등 닭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법이 아닌 닭생법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별종인 그 병아리도 다른 병아리들과 같이 닭생법에 따라 뒷발질로 땅을 헤쳐 지렁이도, 벌러지도 잡아 먹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병아리들은 잘 자랐습니다. 별종인 그 병아리는 다른 병아리보다 훨씬 크고 윤기나는 검은 깃털과 투명한 두눈을 가진 중닭이 되었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 아침, 파란 하늘 위에 이제것 못보던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웅장한 날개짓으로 공중에 큰 원을 그리며 날고 있습니다. 어미 닭은 호떡 집에 불난 듯 새기 닭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 얘들아 저기 저 하늘을 나는 새를 좀 보아라. 저 새는 새 중 왕이신 독수리란다. 저 새가 뜨면 모두 꼭꼭 숨어야 한다. 알았지? >. 모두들 경외하는 눈빛으로 공중을 나는 독수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별종인 그 검고 덩치 큰 닭은 때때로 날개죽지 아래로부터 알 수 없는 강인한 힘이 용트림하는 것을 느꼈고, 어떤 때는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고 걼다는 열정이 세차게 밀려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별종 닭은 어미 닭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도 새는 새잖아요. 우리는 저 새처럼 날 수 없나요? >. 어미 닭이 대답하였습니다.
< 얘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이야. 아예 그런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아라. 옛말에 못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단다. 저 새는 새 중 왕인 독수리고 우리는 닭이야 닭! 그러니 그저 닭생법대로 사는 것이 제일인 게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 어미 닭은 닭생의 이치를 잘 일러 주었고 그 별종 닭은 고개를 주억 거렸습니다.
또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깊은 산마을 닭장 속에는 아직도 그 이상한 닭 한마리가 있습니다. 투명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게슴츠레해진 눈, 검고 큰 덩치에 날개가 축처진 닭입니다. 생기기는 꼭 독수리같이 생겼는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닭입니다. 석양이 붉게 물든 어느날 저녁 무렵 그 이상한 닭은 모로 픽 쓰러져 고단한 닭생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거룩은 지키기 어려운 것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대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대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반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겔 22:26)
미국 롱아일랜드 북쪽 끝에서 몇 km 떨어진 황량한 섬이 있다. 이 섬은 '플럼 섬 동물질병센터'로서, 10년 전부터 구제역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미국에서 유일한 구제역 연구소로서, 안전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인다. 이 섬에서 바이러스 샘플 하나라도 유출되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섬에서 나온 하수나 쓰레기는 모두 열처리를 한다.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공기도 필터로 정화된다. 실험실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연구소 내의 기압을 낮추어 놓는다. 이곳에 오는 외부인은 40년 동안 거의 없으며, 출입하는 연구원도 안에서 입은 옷은 밖으로 가져갈 수 없으며 연구실을 나갈 때마다 코를 풀고, 침을 뱉고, 샤워를 해야한다. 이곳의 안전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예산은 한 해 1천 1백만 달러로 백신 개발 예산의 10배 정도이다
의사가 손을 씻듯이
뉴욕에 있는 브릭 장로교회의 저명한 목사인 몰트비 바브코크에게 그 교회에 다니는 의사 한 사람이 찾아갔습니다.
그 의사는 바브코크의
건강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바브코크에게 극장표 몇 장을 건네 주면서
"받으십시오. 목사님은 이 연극을 보면서 좀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바브코크는 극장표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표들은 자기의 양심상 관람할 수 없는 연국인 것을 알고 친절해 대답했습니다."고맙
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연국은 관
람할 수가 없습니다.""왜 안되는 거죠?" 하고 의사가 물었습니다.
"박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의사이시죠, 그것도 외과 의사입니다.
선생님이 수술하실 때면 손을
아주 꼼꼼하게 닦으시죠? 그것이 깨끗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아마, 더러운 손으로는 수술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
다. 저는 사람의 귀중한 영혼을 다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감히 더러운 삶을 살면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뜻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후레드릭 미코니우스라는 친구가 있었 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루터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격려와 위로와 기쁨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후레드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
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친구 루터에게 최후의 유서를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루터는 깊은 감회에 빠졌으나 곧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하루를 온전히 기도 함으로 성령께서는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도 죽을 때가 안되었다는 사실을 루
터의 마음 속에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루터는 후레드릭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
으로 너에게 살 것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종교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아직도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지 않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하
나님의 뜻이 네게서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자 추구하므로 이를 확신한다."
거룩함을 방해하는 것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살고 있었던 어느 성직자를 유혹하여 쓰러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악한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 사
람은 범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람의 육신의 정욕을 건드려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졸개들의 완패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탄은
직접 나섰다.
"너희들의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사탄은 그
성직자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主敎)가 되었다고!" 이 말은 듣고 있던 성직자의 얼굴은 금새 험악해지면서 먹구
름이 드리워졌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군대에게 말했다. "시기! 바
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이게 최후의 무기지!"
인격건설
최근 들어 학자들 사이에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의 일부를 고쳐야 한다 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내용이 얼마간의 투쟁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다 가 그보다는 국민교육이라지만 그 속에는 국민의 인격교육이나 인격건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얘기로 인도의 유명한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에게 어느날
영국인 기자들이 "인도에서 시급한 과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인도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경제적 부강
이나 사회복지의 건설이 아니라 국민들의 올바른 인격건설 입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 인격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아름다운 인격을 세워나가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친구들로부터 떠난 죠지팍스
1643년 영국의 레이스케스터샤란 곳에서 구두를 짓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어느날 다른 친구들과 술집에를 갔는데 술을 마신 뒤 그 중 한사람이 술값은 마시지 않은 사람이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가 일어나 얼마간
의 돈을 지불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밤 그는 하나님의 앞에 나가
울었다. 그러자 그에게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방황하여, 늙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았느냐?
그러니 이제는 그들고부터 떠나
모두에게서 구별되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지체하기 않고 그 말에 순종했다. 그 젊은이는 후에 궤어커교를 창시한 죠
우지팍스였다.
화니 크로스비
찬송시를 8천여편이나 지은 것으로 잘 알려진 화니 크로스비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장님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시력을 주신다해도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기 위해 저절하겠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신의 불행을 오히려 하나님의 주신 축복이 하고 믿으며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성결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거룩하다는 것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하늘에서 천사들이 밤낮 쉬지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그분(계 4:8,9)을 닮는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거룩하신분" "거룩하고 악의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세 떠나 계시고 하늘 보다 높이되신 그분. 곧 그리스도" 를 닮는다는 것이다(히 7:26).이것은 단순히악의나 악한 세상과 구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거기에사용되던 모든 기구들이 다른 물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던 것과 같은 뜻의 구별이다. 모든 세속적인 관습으로부터의 분리요 영원한 계약의 피로 말미암은 분리이다.
* 가정에서 먼저 경건을 배울 것
사도 바울은 과부들에게 그들이 먼저 가정에서 경견을 보이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아마도 어떤 다른
일을 맏기에 앞서과부들은 가정적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한번은 주님에 의해 귀신에게서 놓인 한 사람이 주님과 동행
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그의 달라진 행위로써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라고 하셨다. 세상조차도 사람들이 가족과 친
구들에게는 그의 가장 추악한 자아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의 한 훌륭한 희극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참으로 좋 은 친구"라 불린다. 다른 한 사람이 "당신은 이 좋은 친구들 중의 한 명을 집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이
단순한 질문속에서 얼마나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가! 그는 먼저
집에서 이타심과 순종과 경외심-한 마디로 말하면 경건-을 보이
는가?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전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전
하나님은 신성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었 으며 이사야서에만 기재된 것도 30여 번이다.
하나님은 거룩하 신 주시다. 신성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정결하시다 는 것이다.
이 신성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체를 대표한 말이니 하나
님께서 신성하신 것은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요, 예수교의 기초
적인 진리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니 죄를 미워하시며 의를 사랑하시 고신성을 소유하시고 불결을 물리치신다. 그래서 우리 사람이
죄악과불결에서 떠나 순진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또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니 그 분이 계신 가정이 거룩한 것이며, 그교회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그 좌석이 신성해야 할지니 가정이나 교회나
단체가 맡은 일, 개개인이 합하여 된 것이니만치 그 기초인 개
인의 마음중심이 신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급한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
* 시간 속에서
빈센트 감독은 매일 아침 지키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지만 우리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인데 이런 문구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순수하고 진실하게 생활할 것이다. 불만족, 불순한 생
각,자기만의 추구 등등은 모두 물리칠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과 정열 과 환희와 거룩하고 조용한 행위를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쓰며 주의 깊게 행동하고 또 화
해하는 삶을 살 것이다. 봉사하는 데는 근면하고 모든 살마을 믿으며
하나님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한 믿음을 갖도록 애쓸 것이다.
(Christian Observer)
거룩함의 단어 연구
Walter C. Kaiser , 신앙부흥의 영적 원리들, P.40.에서
거룩함은 사람의 다른 모든 면을 제외한 오직 한가지 면으로만 충족되지 않는다. 이 점은 불주파은 떨기 나무에서의 모세의 경럼으로 예증될 수 있다. 모세는 신발을 벗으라는 명을 받았을 때 신발을 신고있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왜 그는 그것을 벗어야만 했던가? 여호와께서는 그 분이 그곳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과 모세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하기 때문에 그 분의 그런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거룩함다은 온전함(wholeness)이라는 것이다.
사실, 거룩함(holiness)과 온전함이라는 두 단어의 영어 어근은 하나이며 같다. 그리고 세속적(secular)이라는 단어와 종교적(/sacred)이라는 이 두 단어도 같은 어근에서 왔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 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든가 이와는 반대로 실제적인 내적준비를 도외시하고 단지 외모만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은합당치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시대에 신앙부흥을 기대한다면 거룩함은 모든 신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 진정한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축복이 아닌가 ? 그러므로 "성화되기를 축원합니다"해야 옳은데 요즘 교인들은 축원합니다하면 물질적인 의미로만 이해할 때가 많다. 그러나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애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지도에도 표시하기 힘든 아주 작은 마을이 있습 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직합니다. 그곳에 사는 보
이드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
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갔
는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 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당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
능할까요 ?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결코 속이지 못합니다.
"주님, 저희는 늘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로 주님을 진정으로 경외할 수 있도 록 하시옵소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생활하고 계십니까 ?
기독교의 정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예수님의 방안에 들어오시면
문학가 회원들이 어느날 런던의 어떤 클럽에서 만나서 흘러간 과거의 빛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 중 사람이 물었다. "만약
밀턴이 이 방안으로 걸어 들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가 지상에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 던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열렬한 환영으로 맞이하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첫번째 사람이 "그럼 세익스피어가 걸어 들어온다면 어떻게들 하시
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모두 일어나서 문학과 노래의 거장으로서 그에게 영광스러운 관을 씌워야겠죠"하고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또 첫번째 사람
이 물었다. "그러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 들어오신다면 어떻게 하
시겠습니까?"
이때 차알스 램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그의 발 아래에서 얼
굴을 땅에 대고 경배드려야 할 것입니다."
암 환자의 심리변화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 : 23-24)
미국 정신과 의사 퀴블로 로스는 <인간과 죽음>이라는 책에서 임종환자 심리를 5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1단계는 의사 진단이 잘못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부정의 시기>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노의 시기>가 제 2단계, 제 3단계 '내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만 살게 해 준다면...'식으로 생각하는 <타협의 시기>다. 4단계는 슬픔과 침묵에 젖어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는 <우울의 시기>. 마지막 단계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시기>이다.
서울대병원 사회사업실 이영숙씨는 "각 단계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여러가지 단계가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패료,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두려움, 자기 신체가 없어지는데 대한 두려움, 병에 따른 자기지배 능력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주체성 상실의두려움, 병들어 어린애처럼 될지 모른다는 퇴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구분했다. 카톨릭대 간호대 노 유자 교수는 "한국사람은 죽어서 외로 울 것과 죽은 뒤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특히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바른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어떠한 것도 인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답을 자포자기하는 것 외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 실존의 문제,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에게로 우리가 향하게 될 때, 그 출구를 찾게 될 것이다.
악을 이기는 거룩
성 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망나니' 딸 괘티 데이비스(48)가 10대 때 마약에 빠져 자살 직전까지 갔던 사실을 고백하며 마약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체험담을 공개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인 데이비스는 시사주간지「타임」7일자 최신호에 실린 "마약중독'러브 스토리"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열다섯 살 때 나는 마약과의 '깊은 사랑'에 빠졌다."며 "마약에 취해 피가 욕실 바닥에 넘쳐나는 것을 상상하며 손목에 면도날을 댄 적도 있다."고 털어왔다. 그는 또 "한때 마약 때문에 남의 처방전을 훔치기도 했다."며 "직장마저 잃는 등 최악의 상태에 빠졌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굳게 결심하고 마약을 끊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 「플레이보이」 지에 누드모델로 출연하기도 했던 데이비스는 "아직도 혀끝으로 마약의 맛을 느끼고 있으며 영화에서 마약 복용 장면을 볼 때마다 충동이 일곤 한다. "며 "이처럼 강력한 마약의 유혹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극복 수단'이라고 고백했다.
바다로 간 소금
염전을 하시던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일을 하다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다에 빠뜨렸다 금세 건졌는데,커다란 가마니 속 소금이 모두 녹았습니다.
소금이 물에 잘 녹는 건 알았지만,김장때 배추를 절이기 위해 소금을 물에 녹일 때면 힘껏 휘젓고도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었기에 장로님은 매우 의아해졌습니다.
그러나 의아함도 잠시,소금은 애초에 바다로부터 취한 것이기 때문에 담수에서와 달리 금세 녹아버린 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로부터 취한 소금은 순전하게 구별되었다가도 바다를 만나면 금세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취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면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의깊음이 필요합니다. 항상 세상의 유혹들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자신의 구별됨을 순전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설수 있는 사람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
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 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5∼17.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
라.”-벧전 1:15.
어느날 어떤 목사가 한 탄광촌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귀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갱도 입구에 있는 시커먼 땅 위에 눈부시도록 아
름다운 흰 꽃이 피어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 동안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목사는 문득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이 꽃은 표면이 무척 매끄러워. 그래서 어떤 먼지도 앉을 수 없었던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석탄 가루가 날리는 탄광촌보다 더 시커먼 곳
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깨끗함을 유
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
신이 세상의 것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자신의 색깔로 당신을 시
커멓게 물들일 것입니다.
“주님, 세상은 저희에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때 마다 진리의 말씀을 저희에게 먹이시사 저희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
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참 모습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
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 이다" -시 19:12,13.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
서 " -시 119:29.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소성케 하
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시 119:36~38.
우리는 종종 "그 사람 알고 봤더니 가정에서는 형편없는 남편이래."라는
식의 쑥덕거리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쑥덕거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정에서의 모습과 가정 밖에서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한 예로, 가정에서는 철저한 폭군이지만, 가
정 밖에서는 완벽한 자선가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참모
습은 어느 것일까요 ? 아무래도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가족들은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정합니까 ?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 리의 참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러
나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과 같이, 우리는 거룩함을 결심할 뿐이요
,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새롭게 지음 받은 의와 진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무사 알라미는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사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치 파동이 일기 전까지는 사업을 잘 운영했다. 그는 팔레스탄이 난민들과 함께 피난민 캠프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게으른 자가 아니라 낙천가가 되기로 했다.
어느 날 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모압 일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푸른 물이 황무지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요단강이 갈릴리해를 통해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물이 좀더 풍부하다면 캘리포니아처럼 지하수를 개발할 수는 없을 까.'하는 위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용기있는 친구들 과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땅을 판 결과, 수개월 후에 지하수를 발견하였다. 무사는 오늘날 사막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마음을 새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개선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확신한다
부끄러움 없는 생활
영국 런던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자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런던 시내에 있는 저명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각각 띄웠습 니다. [당신의 사생활이 모두 들통이 났습니다. 그 사진을 폭로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이 귀하의 집을 방문할 것이니 이 해가 가기 전에 런던을 떠나십시 오]
그후 편지를 띄운 저명인사 집을 모두 찾아가 봤는데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자기의 감추어진 생활이 드러나게 되면 견딜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 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치겠다는 사람들 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 음 8:7)고 말씀하시고 허리를 굽혀 땅위에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
자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젊 은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도망치고 그 여자만이 남았 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 므로 항상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함으로써 부끄러움 없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서전
리로이드 죤 오길비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해 먼저 나 의 귓속을 소제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귓 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 장애가 없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 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떡이 되면 그때에는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 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챤과 같아집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이 마음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조금씩 외면하다 가 보면 필연코 양심이 무뎌져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귓전에 들리지 않게 된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적인 귀머거리요 장님이 되어서 몸은 살아 있으나 영은 죽은 자와 같아집니다.
친구들로부터 떠난 죠지팍스
1643년 영국의 레이스케스터샤란 곳에서 구두를 짓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어느날 다른 친구들과 술집에를 갔는데 술을 마신 뒤 그 중 한사람 이 술값은 마시지 않은 사람이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가 일어나 얼마간 의 돈을 지불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밤 그는 하나님의 앞에 나가 울었다.
그러자 그에게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방황하여, 늙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았느냐?
그러니 이제는 그들고부터 떠나 모두에게서 구별되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지체하기 않고 그 말에 순종했다.
그 젊은이는 후에 궤어커교를 창시한 죠 우지팍스였다.
의사가 손을 씻듯이
뉴욕에 있는 브릭 장로교회의 저명한 목사인 몰트비 바브코크에게 그 교회에 다니는 의사 한 사람이 찾아갔습니다.
그 의사는 바브코크의 건강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바브코크에게 극장표 몇 장을 건네 주면서 "받으십시오. 목사님은 이 연극을 보면서 좀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바브코크는 극장표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표들은 자기의 양심상 관람할 수 없는 연극인 것을 알고 친절해 대답했습니다."고맙 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연극은 관 람할 수가 없습니다.""왜 안되는 거죠?" 하고 의사가 물었습니다. "박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의사이시죠, 그것도 외과 의사입니다.
선생님이 수술하실 때면 손을 아주 꼼꼼하게 닦으시죠? 그것이 깨끗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아마, 더 러운 손으로는 수술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 다. 저는 사람의 귀중한 영혼을 다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감히 더러운 삶을 살면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민감성을 갖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한 시계공이 열심히 자기 집 마당에 있는 잔디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고용주가 보게 되었습니다. “자네는 늘 자네가 직접 잔디를 깎 는가 ?” 『그럼요.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잔디를 깎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잔디깎는 사람을 소개해 줄테니까 그 일은 이제 그만두게.” 얼핏 보기에는 시계공에 대한 고용주의 태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공의 솜씨는 예민한 손끝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시계 공의 손끝에 굳은 살이 배기면 시계공은 시계공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게 되 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시계공의 손끝이 늘 예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늘 영적으로 예민해야 합니다.
그 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늘 사단의 손아귀에서 끝없이 혼란스러워지고 말 것입니다. 영적인 민감성 !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주님, 혼탁한 이 시대에 저희가 영적으로 예민하기를 소원합니다.” ⊙ 당신의 영적 생활은 건강하십니까 ? 사단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영적으로 둔감한 자이다.
영적 무감각의 큰 죄
W. C. Kaiser, 신앙부흥의 영적 원리들,나침반사,P. 17-18.에서 챨스 피니(Chales Finne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앙부흥이란 교회가 타락 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제하여 그러한 상태로 부터의 교회의 돌이킴과 죄인들의 회심에 있다"
비록 피니가 죄인들의 회심을 신앙부흥에 대한 그의 정의의 일부로결론짓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저서로 볼 때 그 같은 회심을 신안부흥의 주된 과업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 보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피니는 다음과 같이 경고 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린도인들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지않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만 할일이라는 것이다"
산 제물로 드리자
링컨 같은 사람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물론 사업도 열심히 했을 것이고 법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계 정치사에서 성스럽다고까지 할 링컨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를 해방하고 미국의 건국사의 초석을 놓았던 그러한 링컨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가 '예스'를 하면 유럽이 전부 '예스'로 진동이 되고, '노'를 하면 유럽이 '노'쪽으로 진동을 할 정도로 지진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K목사님은 아주 불량한 깡패였습니다.그는 시장에 가는 사람마다 괴롭혔습니다. 시장에 가는 사람들이 오늘은 K를 안 만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내고 갔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국 초대교회의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참회록을 보면 나쁜 짓이란 나쁜짓은 다 했습니다. 가장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모세가 왜 없었습니까?
한국의 이사야가 왜 없겠습니까? 한국의 베드로나 바울이 왜 없겠습니까? 한국의 에스더나 룻이나 한나 같은 여성이 왜 없겠습니까?
사람들만 잘 키워 낸다면 인간의 위대한 교육자이시며 위대한 예술가이시며 또한 창조 주이시며 부활의 주 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생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격의 모든 병을 낫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께 우리의 생애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소경들이 예수께로 갔을 적에 예수님은 "내가 그 일을 능히 하실 수가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이 일을 능히 하실 수가 있나이다"하고믿으면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지 중에 주님 영접
미국 노쓰캐로라이나 주 와타우가군 남부 산악지대에서 이 었던 이야기다. 믿음이 독실한 가난한 노부부가 어떤 날 주 님의 저녁까지 지어 놓고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 고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않고 웬 늙 은 거지가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를 데리 고 들어와 자기의 저녁을 대접했다. 할머니는 저녁을 굶게 되었다. 거지는 고맙다고 하고는 떠나갔다.
또 기다리고 있 는데 이번에는 남루하게 입은 소년이 찾아왔다. 몹시 굶주려 보였다. 할아버지가 내 저녁을 주라고 했다. 그 소년은 노인 의 저녁을 먹었다.
자고가라고 했으나 가야 한다고 하여 코 트를 입혀 보냈다.
그들은 또다시 불을 쬐며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주님이 오셨다.
그들은 나가 영접하 며 주님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하자 주님은 "내가 이미 여기에 두 번이나 왔었노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부서진 꽃병
한 영국의 귀족이 우수한 도자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기 위하여 조시 야 웨지우드씨 (1730-1790) 공장으로 갔습니다.한 젊은 수련공이 그 귀 족에게 공장 내부를 구경시켰습니다.
그들이 공장 내부를 돌아보고 있 을때 그 귀족은 쌍스런 말을 쓰고, 안내자에게 통명스런 말들을 했습니다. 이 공장을 다 돌아본 뒤에 이 귀족은 자기 마음에 맞는 특별한 그 꽃병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 니다.
이 아름다운 꽃병을 그에게 건네 줄 때에 일부러 땅바닥에 떨어 뜨려 깨지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 귀족은 몹시 화를 내면서 저주스런말 투로 [내가 진정으로 이 꽃병을 원했는데 그만 당신의 실수로 이것을깨 지게 하다니!]라고 말했습니다.
[각하! 세상에는 이 꽃병보다 몇배나값 진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꽃병은 다시 만들수 있어도 당신의 불 경한 언어로 인하여 상처 받은 수련공의 그 마음을 회복시킬 수 는 없습니다.] 라고 웨지우드씨는 말했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 고후 6:16.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 고후 7:1.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 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바퀴벌레 두 마리가 각기 다른 식당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A라는 바퀴 벌레가 간 식당은 입맛을 돋구는 것들이 아주 많은 지저분한 식당이었습 니다. 그런데 B라는 바퀴벌레가 간 식당은 밥알 하나 발견할 수 없는 너 무나 깨끗한 식당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B라는 바퀴벌레는 잽싸게 A라 는 바퀴벌레가 있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헐떡거리며 말을 했습 니다.
"얘, 지금 내가 갔다온 식당이 어떤 곳인 줄 아니 ? 정말 기가 막히 게 깨끗한 곳이야. 파리가 낙상할 정도라구." 그러자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던 A라는 바퀴벌레가 불쾌한 듯 말했습니다.
"야, 너는 내가 먹고 있 을 때 꼭 그런 얘기를 해야겠니 ? 밥맛 없게 !" 얼핏 보기에 우스갯소리 같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적용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 속을 여행하면서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
사단도 바퀴벌레와 마찬가지로 너무 깨끗한 곳은 싫어 합니다. 사단이 입맛을 잃을 정도로 청결한 마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 주님 보시기에 깨끗한 마음이고 싶습니다." 경건을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은 훈련입니다. /// 죄에 빠지는 자는 사람이요, 그것을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인 이요, 죄를 자랑하는 자는 마귀이다.
도덕보다 구원의 능력
독일의 `라인란트 선교회'는 수마트라 선교를 위하여 논멘젠 박사를 파송하였다. 논멘젠은 1864년 바탁지방에 들어가 추장을 방문하고 그 의 부족에서 2년간 만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추장은 그 청원을 받아들였다.
논멘젠과 함께 생활한 지 2년 후에 추장은 그를 불러 그 동안 한 일에 감사한다고 말한 후 놈망빛선교사 가 가르친 것은 자기 족속의 법률에도 있으므로 더 이상의 교훈이 필 요없으니떠나라고 하였다.
"우리 법률에도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씌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나도 말하지 않았 습니다." 논멘젠이 말을 듣고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다. 그는 바탁 족의 윤리 적 기준이 너무 낮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 율법의 금지명령을 강조하 였으나 그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실패했던 것이다.
그는 구원하시는 능력을 선포하는 데만 힘쓸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추장에게 여섯 달 만 더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여섯달 이지나자 추장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몇 달 동안에 당신은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율법이라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우 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 결과 바탁 지방에서는 수천 명이 구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바 탁지방은 수마트라에서도 살기 좋은 지방으로 변하여 맣은 이웃 지방 의 사람들이 이주를 희망하고 있다.
네 이름 혹은 네 삶을 바꾸라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졸병이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그의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아무렇게나 불리워졌 습니다.
이 소식을 안 알렉산더 대왕은 예고 없이 졸병의 막사를 방문 하여 겁에 질려 경례를 하고 있는 졸병 알렉산더에게 "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내가 두 가지를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경건한 자의 고민
프린스톤 대학의 어떤 학생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고 한 다.
"나는 날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며 성서를 읽고 암송까지 합니다.
학교 의 신앙집회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내 전도를 받 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제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아마 이 학생의 고민은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대다수 기독교인이 겪는 공통 된 고민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정한 능력은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이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 나온다
거룩함을 방해하는 것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살고 있었던 어느 성직자를 유혹하여 쓰러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악한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범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람의 육신의 정욕을 건드려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졸개들의 완패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탄은 직접 나섰다.
"너희들의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사탄은 그 성직자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이 말은 듣고 있던 성직자의 얼굴은 금새 험악해지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군대에게 말했다. "시기! 바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이게 최후의 무기지!
거룩한 삶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 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 기 십자가]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자기 십자가란 자기를 극복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동안 [주님의 길을 택할 것이냐, 육신의 길을 택할 것이냐 ]의 기로에서게 됩니다. 또한 [진실을 말할 것이냐, 거짓을 말할 것이냐]하는 문제에 부딪칩니다. [거룩하게 살 것이냐, 방탕하게 살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만일 우리가 육신의 길을 택하고 거짓을 말하며 방탕한 생활을 택한다면 우리의 육은 살고 영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길을 택하고 진실을 말하 며, 의롭고 거룩한 삶을 택하면 우리의 육은 죽고 영이 살아 하나님 의 은총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란 주님을 좇기 위해 자원해서 짊어지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란 주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말합니다. 자신의 문제로 당하는 핍박이 아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 은 진정한 십자가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와함께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 때는 조금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런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하늘에서 천사들이 밤낮 쉬지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그분(계 4:8,9)을 닮는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거룩하신분" "거룩하고 악의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세 떠나 계시고 하늘 보다 높이되신 그분. 곧 그리스도" 를 닮는다는 것이다(히 7:26).이것은 단순히악의나 악한 세상과 구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거기에사용되던 모든 기구들이 다른 물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던 것과 같은 뜻의 구별이다. 모든 세속적인 관습으로부터의 분리요 영원한 계약의 피로 말미암은 분리이다.
* 가정에서 먼저 경건을 배울 것
사도 바울은 과부들에게 그들이 먼저 가정에서 경견을 보이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아마도 어떤 다른 일을 맏기에 앞서과부들은 가정적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한번은 주님에 의해 귀신에게서 놓인 한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그의 달라진 행위로써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라고 하셨다. 세상조차도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그의 가장 추악한 자아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의 한 훌륭한 희극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참으로 좋은 친구"라 불린다. 다른 한 사람이 "당신은 이 좋은 친구들 중의 한 명을 집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이 단순한 질문속에서 얼마나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가! 그는 먼저 집에서 이타심과 순종과 경외심-한 마디로 말하면 경건-을 보이는가?
영국 성직자 창조론 안 믿어'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고린도전서 15:17)
영국 BBC 제4라디오가 20세기말 기독교 신앙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사회지도층 인사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의 성직자들 대부분은 창조론 등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 조사결과에 따르면 영국성공회, 카톨릭, 개신교, 감리교 등 1백3명의 성직자들 중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 는 성경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단 3명뿐이었다.
80명은 '믿지 않는다' 고 답했고 나머지는 '모르겠다' 고 답했다.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는 성직자들도 13명에 그쳐 오히려 정치인들보다 더 낮은 믿음을 보여줬다
. 예수의 탄생과 직접 관련된 성모 마리아의 '처녀수태' 마저 4분의1이 믿지 않는다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지만 예수의 부활과 십계명의 현대사회 적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성직자 대부분이 긍정적 답을 했다.
적 용 집이 서기 위해서는 터가 굳건해야 하듯이 신앙의 터는 성경이라는 굳건한 터 위에 서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이성이라는 터 위에 서 있을 때는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여지없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성이 계시를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은 이성의 잣대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와 부활의 역사적 진실성이 부인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역사성이 부인될 때 신앙은 생명 없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란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 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되고 완성됩니다.
냄새(향기)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 (고린도후서 3:15)
생과 사의 전쟁터인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저에게 새삼 생명과 사랑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준 30대 부부가 있습니다. 아내(30)는 95년 4월 운동신경이 마비되고 호흡장애가 오는 '근위축성 축삭경화증'이라는 희귀 질병으로 입원한 이후 오늘도 인공호흡기를 단 채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링거 주사와 혈액검사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는 그녀에게도 땅거미가 어둑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행복이 있습니다.
남편(32)이 찾아올 때입니다. 그는 막노동을 하며 아내의 병원비와 딸(7)의 생활비를 대느라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지만 3년 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복 차림으로 중환자실을 찾고 있습니다. 힘이 들고 지쳣지만 우울한 얼굴이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일자기를 찾아 지방으로 가게 될 때면, 그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습니다.
병원비 부담도 힘들테고 딸과 함께 10만원짜리 월세방에 살고 있지만 남편은 지금도 아내의 기적같은 회생을 믿으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치열하고 힘겨운 중환자실에서 그 부부가 발산하는 사랑의 향기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다른 환자들에게는 용기를, 간호사들에게는 일의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적 용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향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신선한 꽃내음이 나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서는 삶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진한 땀냄새를 맡은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세상의 모든 악취를 제거하는 향기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벌들이 꽃향기를 맡고 모여들듯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우리에게서 발견하고 교회에 모여들도록 하여야 한다.
방송을 통한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 : 1)
작년 3월부터 프리랜서로 활동중인 전문 방송인 손범수씨, 방송국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시간 사용과 조정면에서 훨씬 자유스로워졌다고, 이렇게 자유스러워진 시간 사용으로 손범수씨는 지난 8월 베트남을 다녀왔다.
기독의료인의 봉사모임인 '글로벌 케어'홍보대사로 이촉되어 그곳 환자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고, 사실 방송일을 해오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 사용하고 계시다고 고백한다. 그는 얼마전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여러 교회에서 간증요청이 왔다. 처음에는 그는 사양을 했지만 '아 저렇게 방송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구나'라면서 청소년들에세 도움이 많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위한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자신을 오늘 이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일 거라는 마음에서다. 방송을 처음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지금도 프로그램 시작전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방송인 손범수씨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기도를 드린다. 감동과 사랑과 그로 인한 기쁨이 전달되는 방송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적 용 세상에는 여러자기 다양한 직업들이 많다. 이러한 모든 직업은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한다.
우리가 가진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행하실 일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있는 일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행하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수행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최선의 삶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편 62 : 5)
세계적인 과학자 에디슨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소리를 듣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였기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에디슨의 친구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여보게, 내 아들인데 이놈에게 평생 좌우명이 될만한 이야기를 좀 해주게"라고 말했다.
그 때 에디슨은 빙그레 웃으면서 "젊은이, 결코 시계를 보지 말게. 이것이 나의 충고일세"라고 말했다. 시계를 보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그만큼 다른데 신경을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해 몰입하라는 뜻이었다.
적 용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등의 영성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나의 영혼이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데에도도 방해만 줄 뿐이다. 세상 일을 위해서도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데 주님을 만나는 일을 이보다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시간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시편 77 : 12)
몇 해 전 한 수련회에 강사로 간 적이 있는데 상담하러 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직장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고, 그 모근 것을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데 보내십니까?" "생각한다구요? 나는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느라고 멈춘다면 나는 뒤쳐지고 말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4세기에 살았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의 모든 흔적을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열이 강할수록 더욱 팽창한다는 영적인 열역학법칙을 발견하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기독교를 박해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더욱 번창했다. 마침내 그는 그의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꼭대기 방에 불러놓고 소기치기를 "젠장! 기독교 우리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단 말이야.
노예들조차 생각을 하니 말이야!" 로마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나 노예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 아래서 생각하는 생활을 했다.
적 용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가 나타난다. 나의 삶이 주님을 향하기를 바라는가? 우리의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내 자신을 그분께 드려야 할 것이다.
영혼의 구도자 테레사 수녀
죽음의 문턱에서 신의 마지막 은총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켈커타의 한 힌두 사원을 종종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힌두사원 근처에서도 하나의 위로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주름진 얼굴에 허리가 굽은 작은 여인, 죽어가는 이들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는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의 상처를 씻겨주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며 그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면서 극진히 보살폈다. "그들은 분명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을 겁니다.
제게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지난 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순간 테레사 수녀의 심장이 멈춘 것은 단지 육체적인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테레사 수녀는 누가 자신의 마음의 주인인지에 대해 언제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자선사업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를 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겁니다. 저는 하루 24시간 내내 그분을 섬깁니다."
적 용 우리들은 경건생활을 개인의 내적인 영성훈련의 영역으고 돌려버리 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건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섬기는 일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섬겼던 테레사 수녀처런 우리의 경건생활도 구체적인 사랑의 섬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약속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미국의 유수한 호텔 중 하나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의 클라이머 전 회장은 수백개의 호텔을 운영하면서 호텔 내에 한 번도 카지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의 간부들은 사세 확장을 위해 뉴 저지주의 호텔에 카지노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클라이머 회장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 중역들은 끊임없이 카지노 설치를 건의했다. 클라이머 회장은 이 문제를 놓고 가족들과 상의한 후 회장직을 포기했다.
은퇴식 때 그는 직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제가 운영하는 호텔에 카지노를 두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약속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제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길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이 무척 평안합니다." 직원들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한 진실할 크리스천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적 용 우리 사회는 불법과 뇌물과 검은 돈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국회의원들도 그러한 작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실로 선한 양심의 부재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부쟁요, 정직과 진실의 부재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지위는 참으로 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이다. 그 달콤한 유혹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양심을 팔아먹고 넘어가기가 쉬운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며, 삶에 있어서 참으로 용기있는 결단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뼈를 깎는 고통과 희생이 요구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양심과 신실한 맹세를 이행하는 자는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의 면류관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게 문제군요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
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분 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믿으면 되겠군요." 노교수는 그에게 물었
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날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점
교인과 그리스도인은 다르답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단군상 철거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단군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낙태 반대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낙태를 안하게 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금연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흡연을 안하게 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자연보호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게 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이단계열의 회사제품 불매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그 회사제품을 사면서 이단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동성애 추방 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동성애를 안하게 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금주 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술을 끊게 됩니다.
교인은 정치인들을 비난하며, 교인이 선거에 나올경우 그를 지지하는 운동을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위정자들과 권세자들의 영혼이 거듭나도록 그들을 위해 중보합니다.
교인은 세상을 향하여 사회인권 운동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은 옆에 있는 이웃을 도와줍니다.
교인은 KBS에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광고가 나오면 KBS에 항의 전화를 퍼붓지만, 그리스도인은 KBS에서 근무하는 영
혼들이 거듭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합니다.
교인은 세상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핍박을 받으나, 그 행실로 인하여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습니
다....
교인은 사회를 개혁하려 하나, 사회는 개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앞으로도 개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며, 거듭난 영혼은 그 안에 개혁이 필요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만
들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마지막으로 ...
교인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강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합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회칠한 무덤
잘 손질한 윤기나는 머리에다 세련된 의상들, 조금 진하다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성들인 화장, 귀걸이에다, 손톱 에는 메니큐어를 칠했습니다. 지
성과 더불어 갖춘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가 나름대로 그들의 멋을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후 나의 마음은 엉망으로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대화때문 이었습니다.
순자:얘얘! 김OO교수 그 XX 골때리더라야. 리포터 안냈다고 학점 날리겠다는거야! 명자:까짓거,배째라하고 버텨! 킬킬대며 시종일관 계속되는 상스럽고 저속한 단어들의 나열!... 나는 문득 구토를 느꼈습니다.
겉은 모두들 그럴듯하게 잘꾸몄는데 그 속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시궁창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주님께선「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들이라고 대노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한데 그 속에는 시신이 썩고 있는 것입니다. 겉껍질이나 외모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인격,교양)입니다.
겉모양은 거룩하고 경건한 체 하지만 실상 그 속에는 온갖 지위와 재물과 명예에 대
한 탐욕과 이기심과 위선이 가득 들어있는 종교인들을 향해서 주님께선 바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
의 영혼속에는 무엇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당신의 의식, 무의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들은얼마나 거룩성을 지니고 있습니까?
또 당신의 진정한 관심은 겉모 양입니까? 아니면 알맹이입니까? †
거룩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상담가들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결코 음주량을 줄이거나 저녁에만 조금씩 마시라는 조언을 하지 않습니다.
판사는 상습 절도범에게 절대로 “좀 참으세요.
주말에만 도둑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결한 삶은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거룩에의 요청 앞에 서있습니다.
생각이 거룩해지고 말이 거룩해야 하며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마치 그것은 선교지를 향한 우리의 소명만큼이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거룩이 없이는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한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거룩은 순간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신자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준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 조건들 중에 몇몇은 고백과 상환, 항복, 성경공부, 기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주를 섬기는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거룩은 우리의 성생활과 언어생활, 기질, 그리고 의복과 연관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히12:14
거룩한 교제를 힘쓰라
그리피스 존은 20년이 넘도록 중국에서 지내면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경건해지도록 힘쓰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1877년 상하이에서 열린 선교회의에서 그는 “선교사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중국사람들은 선교사들이 거룩한 사람이길 기대합니다.
나는 별로 경건하지 않은 채 큰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목회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목회자는 착한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언어와 문학을 익힐 뿐만 아니라 경건해지기에 힘써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바로 이 큰 나라가 우리를 통해 변화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삼위일체시요 거룩하신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가지십시오.
거룩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를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시간을 나누십시오. 이처럼 거룩한 교제를 위해 시간을 내어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친히 우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십니다.
끊이지 않는 교제를 경험하십시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습니다.”라고 했다.
거룩에 관한 성경연구
1) 거룩할 것(레11:44,45, 레19:2, 레20:26, 민15:40, 고후7:1, 살전4:3,4,7)
2) 완전할 것(창17:1, 신18:13)
3) 성결할 것(사52:1, 사52:11)
4) 공의와 겸손으로 행할 것(미6:8, 습2:3)
5) 온전할 것(마5:48)
6) 부정한 것에서 떠날 것(사52:11, 고후6:14-17, 신13:17)
7) 범죄치 말것(시4:4, 요5:14, 고전15:34)
8) 악을 미워할 것(시97:10)
9) 부도덕한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것(엡5:3)
10) 빛의 자녀처럼 행할 것(엡5:8-11)
11) 음란을 버릴 것(살전4:3,4, 7)
12)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것(살전5:22,23)
13) 자신을 지켜 정결할 것(딤전4:12, 딤전5:22)
14) 불의에서 떠날 것(딤후2:19)
15) 죄에 참예하지 말것(계18:4)
16)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을 것(히12:14)
17)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출20:8,9, 느13:22, 렘17:22-24)
18) 순종하는 생활을 할 것(욥6:10, 벧전1:2)
2. 성도가 거룩해야 되는 이유
1)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레11:44,45, 레19:2, 레20:26, 마5:48, 벧전1:15,16)
2)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롬11:16)
3)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고후5:14,15)
4)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위해(벧전1:15, 벧후3:11)
5)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하여(레21:6)
6)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살전 4:7, 히12:14, 벧전1:15)
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롬12:1)
8) 거룩한 길로 다니기 위해(사35:8)
9) 성도의 몸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때문에(고전3:16,17)
10)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딤후2:21)
11) 주님을 보기 위해(히12:14)
12) 하나님 나라와 기업을 얻기 위해(엡5:5)
3. 거룩하게 되는 방법
1)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벧전3:15)
2) 성령의 역사로(롬15:16, 고전6:11, 살후2:13)
3) 하나님의 은혜로(딛2:11, 12)
4) 하나님의 말씀으로(요17:17-19, 행20:32, 딤전4:5)
5) 기도로(딤전4:5)
6) 순종함으로(롬6:19, 롬6:22)
7) 하나님의 징계로(히12:10)
8)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고후7:1)
9) 사랑함으로(살전3:12,13)
10)몸을 구별함으로(레11:44,45)
11)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함으로(민15:40)
12) 악을 미워함으로(시97:10)
13) 부정한 것에서 떠남으로(사52:11)
14) 범죄를 제거함으로(정신적, 영적 -마5:29,30)
15)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아니함으로(고후6:14-17)
16)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림으로(살전5:22,23)
4. 거룩하게 된 자의 결과
1) 영생을 얻음(롬6:22)
2) 하나님을 보게 됨(마5:8)
3) 기업을 얻음(행20:32, 행26:18)
4) 주를 보게 됨(히12:14)
5. 거룩의 정도
1) 하나님처럼(벧전1:15)
2)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도록(살전3:13, 엡1:4, 엡5:27, 골1:22)
3) 온전하게 되도록(고후7:1, 살전5:23)
고넬료의 경건
본문 : 사도행전 10:1∼8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사도행전 10장은 기독교의 복음이 이방나라로 확산되는 획기적인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인 베드로와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람이었기에 이방인들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배타적이며 그리고 좋지 않은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고넬료를 찾아가서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없이 모든 이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게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13절 참조).
하나님은 서로 인종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사도행전 1장 8절을 성취시키려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를 부르셔서 베드로와 함께 이방인을 위한 사역의 장을 열게 하셨는가요? 그것은 평소에 고넬료가 갖고 있었던 개인적인 신앙적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고 누구든지 대상이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아무나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경건은 자기만의 독선적인 경건이 아니라 모든 가속들과 함께 하는 경건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위해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한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아울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소위 신전의식(神前意識) 정신입니다. 고넬료는 이것을 잘했습니다. 그가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경건한 생활만은 철저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노골적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살려고 하고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하면 빨리 그 잡은 줄을 놓는 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지혜일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돈을 주며 구제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이나 재산을 내놓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가 건강해지고 성도의 삶이 건강해지는 비결 가운데 하나가 구제입니다. 구제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눔이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중에 돌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기도: 신앙생활을 한 만큼 변화되지 못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님과 함께 하기를 열망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마음의 변덕스러움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거룩한 삶의 추구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청년에게 일어났던 일이 기억난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몇 년 간이나 만나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그를 찾아 오셨다. 그는 자기가 새롭게 가지게 된 믿음을 아버지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가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그에게 전도를 잘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의 아버지는 열살 나던 해 어느 전도집회에서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모셔들인 적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청년에게, “지금까지 자라오는 동안 아버지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만한 증거를 전혀 보지 못했단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근거로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나이 육십이 가까웠는데 그동안 그의 아들조차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아무런 간증도 없이 살
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거룩한 삶 뿐이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고 말했다(요일 3:3).
또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말했다. 비록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거룩함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것이다.
/J. 브릿지즈
비난은 거룩하지 못한 것
시골 고향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고향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낮예배 기도를 인도하실 때마다 항상 ‘… 하옵시며’ 등
과 같이 ‘며’로 발음해야 할데를 ‘면’으로 발음하시곤 했다. 나는 그 ‘면’이라고 발음되는 게 왜 그렇게 싫던지, 거룩한 척 외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로님 앞에서는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만 역겨운 감정을 말하곤 했다. 그 때 고향 교회에는 세 분의 장로님께서 돌아가며 낮 예배 기도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대략 3주마다 한번씩 ‘며’를 ‘면’으로 발음하는 기도를 들어야만 했고 나는 나대로 예배 후에 ‘면’자 비난을 쉬지 않았다.
물론 내가 ‘며’를 ‘면’으로 쓸 때 고등학교 시절 그 장로님을 비난하던 일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로마서 2:1을 읽으면서 성경이 어쩌면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말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놀랐다.
비난은 곧 죄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비난하는 자가 비난받는 것은 그 일 자체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돼지
어느 돼지가 땅을 열심히 팠더니 보화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그는 보화를 가져다가 신이 나서 친구 돼지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해서 친구 돼지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약간의 돼지들은 보화에 눈이 둥그래져 그것을 얻느라고 정신이 없는 반면 대부분의 돼지들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그에게 가까이 와서 그 보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보화를 받지 않는 친구들을 경멸하였다. 저 친구들은 보화도 모르는 바보들이야. 내가 이렇게 착하게 욕심부리지 않고 나누어 주려는데 받지도 않다니. 그러나 그 돼지는 자기 온몸이 오물로 가득 묻어 있어 더러운 냄새 뿐만 아니라 닿기만 해도 그 오물이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며 능력을 사모하여 열심히 땅을 파듯이 기도하여 귀한 은사들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열심을 가지고 이 은사를 가지고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너무나 원하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무지 길을 잘 열어주시지 않으셨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그의 영혼의 모습은 기가 막히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면서 가르쳐 주시는 자신의 부족함 조차도 굳은 그의 마음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성으로 뿌리 박혀 있는 것인지 깨닫지조차 못한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 조차도 은사일 뿐이지 그것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그는 이전에 몰랐었다.
은사 좀 받았다고 그는 자신이 거의 천상에 이른 그야말로 이제 사람들에게 이 은사를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섬길 길을 열어주지 않음만 이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러움 뿐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기적인 그의 영혼의 모습을 보며 아! 이 오물들이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여태까지 사역을 열어주지 않으셨구나 깨닫고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가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도록 간구하였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시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온전한 성화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으며. . .
그래서 이 더러운 돼지는 보화를 나누어 주기 위해 먼저 열심히 몸과 손을 씻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겸손과 거룩함
죄와 자기애는 눈을 멀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많은 경우 신자는 자기 의지의 통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께서 이것을 계시해주실 때까지, 참된 통회나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얼마나 은밀하게 하나님을 밀어내왔는지를 깨닫게 될 때, 그 심령은 비로소 크게 부끄러워하며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차지하실 수 있도록 자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통회라는 말은 바로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 것,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동안 은밀하게 자아를 높여온 것과 그럼으로써 하나님만 누릴 수 있는 위치, 오직 그분만 복되게 채우셔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거룩하신 자를 밀어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얼마나 죄된 일인가를 깨달을 때, 그 심령은 비로소 온전히 겸비하게 자기를 낮추고 오직 이 한 가지 소망, 곧 자기는 무익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마땅히 취하셔야 할 자리와 찬양을 온전히 그분께만 돌리기를 희구하는 소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겸손은 내게 합당한 자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반면 거룩함은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를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겸손은 거룩함입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 기도: 온유한 자들의 판단을 인도하시며 경건한 자들을 위해 어둠 속에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 의심과 불확신 속에 있는 저에게 온전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당신을 좇아가는 곧은 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
지난 시간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오늘 거룩한 삶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처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산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는 말에는 따로 놓다, 구별되다, 분리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거룩하 다 의 의미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구별되고 분리 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믿음 없는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명 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있고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꼭 같을 수가 없습니 다.
베드로전서 4장 4절 말씀을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그리스도인)가 저희(믿지 않는 사람들)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라고 말씀했습 니다. 여기서 구별되는 두 가지 사람이 누굽니까? 너희 와 저희 입니다. 너희 와 저희 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와 믿지 않는 저희의 삶이 결코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됩니 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우리가 진실로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믿지 않던 때 살던 옛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특성과 무슨 다른 것이 있습니까? 뭐, 예수 믿는다는 너나, 믿지 않고 사는 나 나 다를 게 없구나. 이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주변의 믿 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닙니까? 아니면 역시 저 사람은 무엇인가 우리와 다른 데가 있어 라 고, 우리의 삶이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 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가 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방인과 달리 거룩해야 합니까?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생각한 바 있는 8∼1 2절에 어떤 말씀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복 음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 제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므로 구원 받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르 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 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통해서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가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거 룩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오늘날 가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교( 邪敎)나 사이비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는 다닌다고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 닌 사람이 많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닙 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많은지 아십 니까?
미국 같은 데서는 범죄하고 형무소 안에 들어가면 형무소 안에 목사님이 계시면서 전도하거나 아니면 그 주변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시간에 따라 형무소 안의 예배실과 부대 시설에서 신 앙 생활을 지도합니다. 그래서 책임진 목사님이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 라는 추천을 하게 되면 형량이 줄어들고 빨리 출소하는 특혜를 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목사님 앞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 활동을 열심히 하는 척하고 말끝 마다 주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죄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속을 볼 수 없는 목사님이 이런 사람을 모범수라고 추천을 해서 미리 형무소에서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형무소 생활을 했다고 하면 그것도 절도, 사기, 살인, 강간 같은 죄를 범한 경우 에는 사람들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거룩한 행세 를 해서 자신을 신뢰하도록 한 후에 또 사기를 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겉모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을 명령받고 있습니다.
먼저 마 음의 허리를 동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 마음 의 집중을 의미할 수도 있고 마음의 훈련된 상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엇보 다도 활동의 태세 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태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허리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옷이 내려오기 때문에 편하게 활동할 수 없을 것이고,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옛날 옷은 특별히 길었기 때문에 땅까 지 치렁치렁 내려와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옷을 입으려면 허리띠를 매야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운동을 할 때나 혹은 먼길을 여행하려 할 때는 이 옷의 끝을 끌어올려서 띠를 단단 히 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리띠를 동인다는 말은 활동 태세, 준비 완료의 태세를 갖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므 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다시 말하면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보실 때, 마음에 들어 하실 수 있는 삶을 살려는 준비를 갖추면서 살 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 메시지가 더 실감이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기 12장에 보면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양고기를 먹고 밤중에 떠날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허리띠를 맨다는 것은 중요한 일을 할 때, 위대한 과제를 앞에 놓고 삶을 준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 다.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그러므 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태도에 따라서 삶의 모 습이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보세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소망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히브리서를 쓴 이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소망 은 하늘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11장10절을 보세요.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택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인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에 아브라 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즉 아브라함에 게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왜요? 그의 소망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가 아브라함의 삶의 양식을 얼마나 분명하게 결정했습니까? 그러나 롯의 경우는 그와 아주 반대였습니다. 롯은 그의 소망을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두었 습니다. 그래서 롯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눈 으로 보기에 좋은 곳, 푸르고 물이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인 소돔땅을 택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만을 택했습니다. 세상적인 것만을 택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서운 유황불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 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우리 삶의 양식 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우리 삶의 태도를 가다듬 어야만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십니까?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오늘 오실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오늘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 야 할까요?
책망이 무서워서 숨어 버릴까요? 아니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우리 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말하자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어떤 이들처럼 목욕하고 흰옷으로 갈아입고 산골짜기에 가서 기도하 는 중에 주님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게 기다리던 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고, 형제와 화목하고,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든지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든지 부끄러움 없이 반가이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허리띠를 동이고 있다가 주님을 반가이 맞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맞을 준비하는 사람은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한다 는 말은 본래 술 취하지 않는 다 는 뜻입니다. 대개 술에 취하면 떠들썩합니다.
자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 면 절제력을 상실합니다. 술에 취하면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본인은 똑바로 서서 걷는다 고 하지만 비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고 하는 말은 조용하라, 절제하라, 균 형을 맞추라 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근신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근신하는 삶은 조용한 삶입니다. 떠들거나 시끄러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고 여리고 성을 도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진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과된 여호수 아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드러내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하라고 명령했을까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에게 말하라고 내버려두면 그 들은 성을 돌면서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분명히 그 무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동요되어서 이 행진을 포기하고 이탈하 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하 신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중에 능력을 얻습니다. 마음이 들떠서 흥분하고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조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생각할 수가 있고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내 의무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꼭 실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조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참으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오늘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 삶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조용할 때 들려주시고 조용할 때 보여주십니다. 근신하는 삶은 절제하는 삶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 입니다. 절제라는 말에는 자기 자신을 조정하고 다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우리 의 몸 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이 있습니다. 이 욕망과 본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 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있는데 이것을 잘 이 겨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5절 이하에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말하면서 믿음에 덕을 덕 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 고 했습니다.
옛날 헬라인들이 아덴에 있는 청 년들에게 늘 권면한 말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너 자신을 알라 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 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전에 플라톤은, 사람이 하는 말과 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 말이 끄는 수레와 같다 라고 했습니 다. 흰 말은 사람의 이성을 의미하고 검은 말은 사람의 욕망이나 본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도록 하려면 흰 말에게 수레를 맡겨 나아가게 해야지 검은 말에게 맡기게 되면 그만 그 수레가 외딴 데로 떨어져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 다. 우리 동양의 유명한 성현 공자도 군자유삼계라고해서 군자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했습니다. 1. 젊어서 혈기 왕성할 때 색을 경계하라. 2. 장년 되어 혈기 강한 때 싸움을 경계하라. 3. 노인 되어 혈기가 쇠할 때 욕심을 경계하라. 그리고 생활에 균형이 있습니다. 근신하는 삶은 은혜를 온전히 바랍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나 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를 온전히 계속하되,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인내심을 가지고 온 전히 바라라 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마음 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님이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 늘 주신 말씀 14∼15절을 보세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 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 에게 자신의 성품을 심어주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말씀을 보세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 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 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순종하는 자들입니까? 베드로 전서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순종하며 죄사함을 받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순종 하는 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너희를 부르신 거 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 희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네 번째 이유는 그것이 말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임을 이 구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하는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면 거기서 우리의 모든 이론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믿는 그리 스도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성경에서 거룩하라 고 했으면 거룩 해야 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말씀의 권위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도 이 말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만이 최고, 최후의 권위입니다. 교회의 법이나 규칙, 신도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합니 다. 기록하였으되. 사람들의 모든 주장과 철학은 여기서 끝납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바로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 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했습 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을 보세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할 다섯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7절을 보세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 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의 아버지는 외모가 아니라 행위를 따라 정확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들이 훌쩍 떠나 가는 것을 보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두 려움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건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모든 것을 계산 하고 모든 것을 셈해야 할 판단의 날이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 람들은 흔히 외모로 판단합니다.
심지어 어느 회사에서는 신입 사원을 모집할 때 그의 출신 학 교나 성적은 말할 것 없고 가정의 형편을 다 조사해서 적격 심사를 하고, 면접을 할 때는 생김 새까지 뜯어보기 때문에 남자가 성형수술을 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칭 찬을 할지 모르겠습니다.우리의 외모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당한 호평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사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굉장히 좋게 비쳤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 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 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보세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 자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산 소 망이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 문입니다. 주님이 디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길
고린도전서 9장 24 절- 27 절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 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7∼8).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너 주 안에 있어 늘 성경보고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숙여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것과는 너무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 을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조용히 오후 한나절을 시골길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 그리 드문일이 아니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겨울밤에 난로가 에 앉아 고구마와 밤을 구워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도 과거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 니다. 도시 생활이 우리를 이처럼 바쁘게 만들고 있습니다.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으며 묵상의 시간을 갖고 시간을 내서 기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면 도시 생활이 우리를 경건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까? 경건해지기 위해서 우리 는 시골로 내려가든지 산 속 깊이 들어가야만 합니까? 절대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여유 있고 한가로운 생활 방식을 즐길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에게 그러한 역할을 맡 기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그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도시를 떠나 농촌에 가서 농사를 하 면 좋을거야 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길 밖에 없지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서울같이 복잡한 도시 를 떠나서 농촌이나 산 속 깊은 데 들어가야 합니까?
도대체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경건하다는 것은 깊은 산 속에 혼자 살면서 기도하며 성경읽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까? 경건하다는 것은 나이가 지긋하고, 사리 분별력이 있고, 매일 여러 시간씩 앉아서 기도하며,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는 사람입니까?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 있는 것이 그렇게 불경건해 보여서 극장엘 들어가 보 지 않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입니까?
훌륭한 운동선수나 유명한 연예인이나 부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까? 보석 반지 와 모피 옷을 가지고 있는 부인은 경건해질 자격이 없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외모나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그밖의 다른 소유물로 미루어 경건의 정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을 아셔야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건이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우리 내면의 자세인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그의 심령이 하나 님을 향해 민감하게 열려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시편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이란 살아 계 신 하나님께 대하여 갈구해 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 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니이다 (시 42:1∼2)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갈급해 하 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젊은이일 수도 있고 늙은이일 수도 있습니다.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유식한 사람일 수도 있고 무식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 사람일 수 도 있고 농촌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민족, 어 떤 인종, 어떤 기질을 가진 사람이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거나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문제 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겸손히 하나님을 따르려 고 하는 그 사람의 내적인 갈망인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처음부터 진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러나 적 어도 경건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복종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 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수고를 하든지 그의 뜻 대로 행하려는 것이 바로 경건한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목말라 한 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경건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건이 아닌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고 도움이 되리라 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말씀은 경건의 외적인 조건을 모두 구비하였으면서도 경 건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모세의 지휘 아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해방된 이 히브리 사람들은 왜 참된 경건에 이르려 애쓰지 않았 었습니까? 바울은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9 장의 맺음말로부터 이어집니다.
9장의 끝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 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자같이 아니하고 싸 우기를 허공에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 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것이 경건한 사람의 대답입니다. 그는 인생을 유희하듯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 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자기의 몸을 쳤고 자기의 몸이 상전이 아니라 종이 되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가 말한 바를 다시 살펴보십시다. 그는 실패자로서 삶을 마치기를 원 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온전한 자격이 없어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그 비 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 체계를 통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옹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의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합리화 체계에 빠져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갈급해 하 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의 토대가 될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속 깊이 갈망하였습니다. 그는 하나 님을 따르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옛날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애굽을 떠나는 히브리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 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가 그것을 잃고 그것을 가질 만한 자격까지 잃은 사람 들의 예를 살펴보아야 한다면 히브리민족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본문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 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는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모든 것을 다 가졌었습니다. 저희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희는 초자연적인 구원을 받았습니 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저희는 초자연적인 지도자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 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초자연적인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나 는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히브리 사람들은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특권들을 누렸습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늘 그들 가운데 계셨고 확실한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저희는 지나칠 정도로 권능의 역사를 많이 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어딜 가나 하나님 에 대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날마다 혹은 매 주간마다 은혜스러 운 집회에 참석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은 내적인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그 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했습 니다. 그러나 라는 불길한 말이 그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고 있었 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눈으로 직접 보며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적들은 그들에게 신비하게 여겨지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고, 감격스럽지도 않 았고, 그 의미를 잃어 갔습니다. 그 전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었는데 점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화제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풍성한 가운데서도 심령은 어둠 속으로 퇴보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그들은 그처럼 훌륭한 축복의 요람 속에서 그 심령이 번영하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서 경건한 일은 흔히 하는 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경외심 때문에 입을 벌렸었는데, 이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존경심은 불경심의 나른한 하품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모두가 한숨을 지으며 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세속적인 풍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 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 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 음하지 말자…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너희는 저희와 같이 주를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기록은 두 가지 경고의 말로 끝났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우리 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냉랭하고 무관심하게 변해갔습니다.
갑자기도 아니고 천천히 열심있던 정열의 마음이 점점 식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모든 사람이 불만을 토하며 주먹을 들고 하나님께 대적하게 되었습니 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누구에게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방 사람들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감독의 채찍을 맞으며 지내다가 단번에 노예 생활에서 구원되고 새로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의 미소는 불경의 비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날마다 신선하고 감격스러운 믿음 대신에 너무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갈급하게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름이고 한달이고 햇빛 을 보지 못하다가 햇빛을 보게 되면 얼마나 햇빛이 반갑고 감격스럽습니까? 그러나 매일 햇빛을 보게 되면 당연한 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상정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위험은 어디에나 잠복하여 있습니다. 하나 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는 기독교 가정, 기독교 계통의 학교, 신학교에서 성도 들이 쉽게 퇴보하고 때로는 썩은 상태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서 힘쓰지 아니하면 타성적인 습관에 빠질 위험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고를 들을 때 대체로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12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여기며 참된 경건을 갈망 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다른 하나는, 나는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미 너무 깊이 빠졌기 때문에 회복할 가망이 없 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주 님께 희망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이제라도 주님을 찾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에 이르는 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하지 아니하면 퇴보합 니다. 무뎌집니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격이 사라 지려 할 때 다시금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갈망이 식어지려고 할 때 일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목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함으로 우리의 삶이 경건에 이르 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위기
디모데후서 3장 1 절-12 절
디모데후서 3장은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특히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역사의 단계의 끝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시대, 은혜의 시대의 끝을 말합니다. 그때에는 여러 가지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데 반항과 불법과 자기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가득차게 될 것을 말하였는데 사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기계문명은 고도로 발전하여 육신으로는 편하게 살 수 있으나 이상한 것은 마음은 더 불안하 고 인간 소외의 현상을 자아내고 있으며 위대한 성취도 많으나 헤어나올 수 없는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개의 사람이 불행을 느끼고 마음이 혼란하고 고독 한 가운데 좌절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문란한 성생활과 마취약 그리고 술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아니라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대교육은 이렇게 말합니다.진리는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발견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 고 합니다. 진리는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관계가 있습니 다. 이것이 나에게 사실인가? 이것이 너에게 사실인가? 고 그들은 묻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들 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아니하고 거부합니다. 너 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말씀도 거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이와 같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육철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그와 같은 진리에 대한 경험을 가지도 록 안내하는 것 뿐이라 고 합니다. 그 결국은 이렇게 모든 젊은이들을 비관적인 사회로 빠져들 어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철학은 무서울 정도의 세대차를 가져와 대화의 장벽 을 쌓아버리는 비극을 빚어내게 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만 다녀도 부모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공연한 시간 허비라고 생각하며 대학에 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수에게 지식을 사는 것으로 족하지 그 이상의 어떤 지도를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어른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학생이 대학의 결정 권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학교의 엄격한 규칙이나 필수조건들에 대하여서는 진저리를 내고 나 아가서 반항합니다. 심지어 미국 어느 대학에서는 학사시험을 반대한 것까지 있습니다. 시험치 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고된 연습이나 훈련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시험 때 계엄령이라도 발표되어 휴교하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현대교육의 맹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대 교육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나 사람이 어떻게 살 아가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하여서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떡으로, 새 집으로, 새 자동차로, 새 텔레비전 세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명은 실상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삼위일체입니다. 사람은 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차와 음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영을 가졌습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지난달 Gideon International Camp 총무로 있는 분이 오셔서 한 말을 퍽 인상깊게 들었습니 다. 지난 여름 미국의 어느 우수한 대학의 졸업식에서 있은 일입니다. 4년 동안 그 대학을 다니 며 공부를 잘해서 우수한(최고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고 많은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식에 서 졸업 연설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물론 우수한 성적으로 전부 A학점을 딸 정도로 우 수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었습니다. 또 가정도 상당히 훌륭한 배경에서 자라난 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 연설에서,저를 사년 동안 가르치시기에 수고하신 여러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제가 전공한 전문적인 지식 외에 무엇을 주었습니 까?
4년동안 한 반에서 기숙사 방에서 같이 지낸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나와 같이 운동을 하고 여가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4년동안 저희들의 학비를 조달 하지 위하여 수고하신 부모님들! 이 학교는 미국에서도 우수한 대학인 것을 자타가 공인하며 저 희들도 자부하여 여러 부모님은 자랑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다른 학교보다 학비가 비싸기 때 문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신 부모님이 아니면 자녀를 이 대학에 보내실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저희에게 그만큼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희에게 학비를 조달한 것 외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렇게 영광스러운 졸업식을 하는 마당에서 솔직히 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다면 저는 대 학 4년 동안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들! 학 부모님들! 그리고 오늘 졸업하는 동기생 여러분! 우리는 돈 버는 법,취직하는 법은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사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 부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곤 란을 직면하여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배워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말할 때 모든 졸업생 들은 동감이라고 다같이 일어서서 한창 동안 박수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을 알고 싶습니까? 그런데 보통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우리 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흔히 다른 길로 가기를 원합 니다.
사람이 바로 사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생명의 길은 그 길이 좁고 험하다 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과학을 제 외하고는 보통 넓은 아량 있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이 생각합니다. 가령 달에 우주선을 보내는 Mission Control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량 있는 넓은 마음으로 달 에 가는 길은 여럿이 있으니까,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적당히 가면 될테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 나는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 지께로 갈자가 없다 고 분명히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셨습니까? 나의 실존의 의미와 목적이 무 엇입니까?
니이체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그의 생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거 의 생의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알베르트 까뮈는 사람이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다 고 말하였습 니다. 옳은 말입니다. 오늘 흔히 말하는 비인간화라는 것은 인간이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상 실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비인간화 되어가는 경건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과장하고, 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 음이 없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고,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선 을 좋아하지 않고,배신하고,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교만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고 명령합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요한 칼빈은 참된 경건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참되고 순결한 열 심과 주로서 존경하며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범하기를 두려워하는 생활이라 고 (Instruc tion in Faith)하였습니다. 개혁 신학에 있어서 경건을 도덕주의로부터 엄격히 분리되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우 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경건 은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순종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것이 경건한 생활인 것입 니다. 그런데 이 경건한 생활이 오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압력, 세속적인 압력, 성적인 압력이 강한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건의 위기 (The Crisis of Piety)를 고합니다. 이때야말로 460년전 마틴 루터가 그 당시 낡은 먼지로 쌓이고 쌓인 교회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선명한 새 역사 의 봉화원을 위하여 말씀에 물어보고 말씀에 충실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지향할 길을 찾도록 힘써야 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 크리소스툼 사람이 되는 것은 하 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나그네입 니다.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 았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생활을 위해 힘씁니까? 외 국인이면서 외국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보려 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신문기자가 미국 가서 일년 지내며 미국사람처럼 머리를 기르고 왔는데 어느 아나운서 가 그 이유를 물으니 외국인들과 같이 어울리기 위해서 라고 하더군요. 속으로 웃었습니다. 머 리칼이나 기르면 한국인이 미국인으로 보입니까?
한심하셔요. 위험한 것은 이론적인 유신론자나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거듭나 새 사 람이 되었으면 세상에서 사나 세상에 속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는다 고 말씀하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 어울려 세상 사람처럼 살 수도 없거니와 살아서도 안됩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 변화 를 받으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 개혁 당시의 교회보다 더 위기에 직 면하고 있습니다. 위험과 핍박이 아니라 안일과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여러 분이나 저는 이와 같은 위기에서 교회를 건질 책임이 있습니다.
거룩에의 초대
아침에 일어나서 조간신문을 보는 것이 두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들이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합니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썩는 냄새로 질식할 정도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는 말씀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와 닿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파도에 떠밀려 표류하는 배처럼 세상에서 갈팡질팡하며 하루 하루 생존(survive)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생존(survival)의 존재들이 아니라 부흥(revival)의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소망의 빛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거룩은 훈련되야 합니다. 거룩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본래 '거룩'의 뜻은 '구별됨'입니다. 거룩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에로의 구별됨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그리스도인은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데 전술을 배우거나 무술을 연마하게 하거나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고 성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가나안은 극히 세속적이고 타락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문화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성결'의 옷으로 갈아입히십니다.
사실 이 시대의 문화는 가나안 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이고 반(反)기독교적 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로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라.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혀 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것이 편하기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주민등록증 보다 더 못하게 여기는 넌센스는 사라져야합니다.
둘째로 No라고 말하라.
스펄젼은 "'안돼!'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용기입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No!"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는 예스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노우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소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형성하라.
개인이 혼자 거룩해지려 노력해도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서로 체크해주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룹입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척 콜슨은 "거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일상의 모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깊이 음미해 볼 만한 말입니다. 지금은 '거룩'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예배의 경건
예배는 기독교인의 지고의 의무이다(레 10:1-11참조).
교회에 가서 저녁식사 때의 얘깃거리나 만들어 오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신성해야 한다. 진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말이 내면의 참되고 솔직한 표현인지 마음을 살피고 계신다. 예배시간이 지루하다면 어쩌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감이 상실되고 있는 징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배가 꼭 근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격과 갈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몸과 마음, 안일한 자세 등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는 아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가 진지하게 이 날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를 위해 기도드리기 시작하라.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
거룩한 충격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에 헤론이라는 의사가 있다. 헤론은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로서 그 대학의 교수회가 수련을 마친 후 교수로 남아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는 한국의 선교사로 처음 임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알렌의 제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물러난 후에 그는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 없이 헌신했다.
한국에 온 지 5년 뒤인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을 때,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의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지만 그는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자신도 이질에 걸려 3주간을 앓다가 7월 16일 이역만리 낯선 땅에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놓고 순직함으로써 그의 짧은 생을 선교지 한국에서 마쳤다.
그의 시신은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최초로 묻혀 자신의 생을 밑거름으로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외면적이며 세상적이다. 그들은 수입이 많아졌다고 기뻐한다. 이런 기쁨은 비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추구하고 누리는 외면적인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분별하고 그 일을 하는 데 있는 것이다.
/ 정장복 ·주승중 엮음
* 기도: 주님, 낮아지고 또 낮아져도 낮아짐의 삶에는 ‘여기가 끝’이라는 것이 없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만나는 형제에게 주님께 하듯 섬기게 하시고, 그 만남에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하시며, 높아지려고 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하소서.
바울의 경건
행 16:9-34; 딤전 4:8
디모데전서 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돈독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와 행동" 그것을 경건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경건을 "godly"라고 한 것은 바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면서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것이 경건한 생활이라고 봅니다.
참다운 크리스챤이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늘 깨닫고 캄캄한 밤에 혼자 있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먼 외국 땅에 가 있다고 할지라도 경건한 생활을 해야 올바른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나 교회에 와서는 신자인 것 같은데 누가 보지 않을 땐 거짓말과 위선으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엄연히 보고 계신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줄 알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안보인다고 없는 줄알거나 하나님이 못보시는 줄 아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신자가 되지 못합니다.
공기도 우리 눈에 안보입니다. 라디오 전파도 눈에 안보입니다. 사람의 정신도 영혼도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만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나님도 온 우주에 충만히 계시고 지금 이 시간도 성경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으로 안 보인다고 안계신 줄 알고 못 보시는 줄 알면 그는 큰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봐야 하고 세균은 현미경으로 봐야 합니다. 냄새는 코로 맡아야지 귀로 맡을 수가 없습니다. 색깔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코로는 알 수 없습니다. 맛을 입으로 알아야지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영혼의 눈,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훌륭한 경건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이 어느 길을 가다가 귀신들려 가지고 점치는 여자 아이를 보았습니다. 거기엔 많은 사람들이 점을 치고 돈을 내는데 그 처녀 아이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아이로 주인이 귀신 잡힌 그 여종을 데리고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지나가다가 영의 눈으로 보니까 귀신에 잡혀 있는 그 여자가 불쌍하기 짝이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귀신아 거기서 나오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푹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다가 일어났는데 귀신이 깨끗이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의 주인이 돈 벌이가 떨어진 것이 분해서 관가에 가서 송사를 했습니다. 핑계는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옷을 찢고 벗기고 매로 죽도록 때리고는 감옥에다 가두어 놓았습니다. 온 몸에 멍이 들고 피가 흐르고 게다가 발에는 쇠고랑을 채워 놓았습니다.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어떤 사람 같으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나를 때리고 옥에 가두느냐" 할지 모르나 바울은 거기서 도리어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기쁨으로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계속하던 중 밤중이 됐는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더니 자물쇠를 채운 모든 문들이 모두 철컥철컥 열리고 발과 손에서 쇠고랑이 다 벗어져 나갔습니다. 이럴 때 도망할 수도 있었으나 도망가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노라니까 자기를 지키던 간수가 문이 다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는 죄수를 하나 놓치면 대신 자기 생명을 하나 내 놓아야 하기 때문에 처형당하느니 자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고 말했습니다. 문이 열렸는데 도망도 안간 것을 보고 거기서 엎드려서 "선생님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서슴치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하고 그 뿐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위대한 경건한 생활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마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에 이와 같은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진 아내는 가난할 때 알아보고 충신은 나라가 위급할 때 나타나고 참 신자는 역경에 부딪칠 때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1. 역경 중에도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아 온 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 입에서 우렁찬 찬미가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그러한 역경 중에도 마음이 평강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송이 아무때나 나오는 것 아니요 이러한 역경 속에서 바울이 마음의 평강을 잎지 않고 기도와 찬송을 했다고 하는 것은 위대한 경건의 생활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5:13에 보면 즐거워 하는 자는 찬송하나 괴로움을 당하는 자는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만 어려운 일 당하면 찬송과 기도는 어디로 다 도망가고 불안하고 초조하여 안절부절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기면 거기에 도취되어서 마음에 안정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까? 어떠한 환경 속에서라도 우리 중심의 평강을 잃지 않고 찬송과 기도가 나올 수 있는 이것이 진정한 경건입니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안이 어디 있나. 그대 살아서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시라.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개편 424:4)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분은 그 괴로운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는 직전에도 "찬송을 빨리 불러 주십시오. 내가 이제 하늘 나라에 가야 되겠는데 빨리 찬송을 불러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죽게 되면 흑암의 세계에서 악령이 오고 빛의 세계에서 천사가 와서 내가 마음 속에 믿음을 준비해서 주님을 부르면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주님께로 갑니다만 마음 속에 믿음으로 시인하지 아니하고 옆에서 찬송도 잘 안불러주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흑암의 권세에서 악령들이 끌어가서 영혼이 지옥에 던지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권사님은 찬송을 불러주는 가운데서 찬송을 부르며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는 이러한 진정한 믿음이 되어야지 괴롭다고 예수 잃어버리고 좋다고 예수 잃어버리는 것은 진정한 신앙 생활도 경건한 생활도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나를 어찌하리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낙심하고 절망할 것 같지마는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쌀 한 가마를 등에 지라고 할 부모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주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역경과 풍파는 하나님의 축복을 싣고 옵니다. 실패 속에 각양의 신령한 보화가 들어 있습니다. 풍랑을 타고 예수님이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2. 역경 중에 진실했습니다
바울은 옥문이 다 열리고 쇠고랑이 다 풀어졌으나 그 지긋지긋한 고통의 장소를 몰래 도망가지 않고 진실을 지켰습니다. 우리 같으면 "문이 다 열리고 쇠고랑이 다 풀어졌으니 이건 아마 하나님이 나를 도망가라고 그러나보다" 하고 얼른 도망가기 쉬웠겠으나 바울은 진실하게 허락없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를 죽도록 때리고 가두고 지키던 옥사장이 자살하려는 것을 보고 속시원히 잘 됐다 생각지 않고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도 진실을 지켜야 참으로 경건한 신자인 줄 압니다. 시편 32:2에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진실을 지키도록 힘써야 겠습니다. 사흘 굶고 도적질 않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역겅 중에 더욱 진실해야겠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말하기를 "꿈에라도 진실(眞實)을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반드시 살아야 될 이유는 없어도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 한 마디 잘하면 몇억이 생긴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할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해야 할 것입니다. "Yes"와 "No"를 바로 하는 진실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모든 죄가 이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3. 역경 중에서 충성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에서도 전도했습니다. 간수가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셌습니까? 말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해서 한 영혼이라도 지옥의 평벌에서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역경 중에도 충성하는 목사, 충성하는 장로, 충성하는 권사, 집사가 있는 교회는 부흥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충성하기 어려운 때 충성하는 것이 참 충성입니다. 참 믿음도 역경에 처할 때에 나타납니다. 십일조 하기 어려울 때 십일조하고, 헌금하기 어려울 때 감사하고 헌금해야 기적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어떤 교인은 자기는 충성도 아니하고 역경 중에 충성하는 교인을 비웃습니다. 저런 형편에 무슨 십일조를 하고 심방하고 저런 주제에 무슨 전도를 하냐고 하면서 비웃습니다. 예수는 적당히 믿어야지 너무 잘 믿으면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신앙 생활은 목숨을 내거는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경건의 생활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① 체험적인 신앙에서 옵니다.
바울은 율법적인 죽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뒤부터는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부족한 이 종도 성령의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성경말씀에 확신이 없었고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의심을 가질 때가 많이 있었으나 성령의 불세례를 체험한 다음에 그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계심을 순간순간 느낍니다. 성령의 체험을 한 다음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저의 마음 속에 제일 큰 욕망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해서 예수 믿고 천당가게 해줄까 하는 "영혼 구원"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 전도사, 신학박사 중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안믿고 천국 지옥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안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덕적으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 체험적인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믿음도 충만해집니다. 히브리서 1l: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3:16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하면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사모하고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에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영의 세계는 믿음대로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심을 순간순간 믿을 때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역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즉 성령의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② 중생(重生)의 확신을 가지며 내세관(來世觀)이 확실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확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구원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확신을 가져야 다른 사람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중생의 확신을 가지고 영생과 내세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영생의 믿음이 없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으면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쳤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과 내세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이런 신앙이 없으면 목사 아니라 전도사 신학박사라도 참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이 폭풍을 만나 침몰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얼굴이 새파랗게 길려서 공포에 떨고 있는데 한 할머니는 찬송을 기쁘게 부르더랍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기쁜 찬송을 부르냐고 했더니 "맏딸은 천국에 있고 둘째 딸은 미국에 있으니 내가 여기서 살면 미국에 가서 둘째 딸을 보고, 죽으면 천국가서 맏딸을 만나게 되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레가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는 신학대학을 나오고 옥스포드대학을 나오고 선교사로 나가고 경건한 생활을 다 했지만 폭풍을 만났을 때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서 열심히 예배드리는 그 가운데서 성신의 불을 받은 그 다음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세관이 뚜렷했기 때문에 세상 부귀영화는 다 분토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고 한 사람의 형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하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감옥 속에서 그 고통의 위기에 직면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고 그 온 집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했습니다.
빌립보서 l:23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사는 것과 죽는 것)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하늘 나라에 가고 싶은 소망이 더 컸습니다. 사실은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욕망이 더 크나 육신에 살면 너희들에게 설교 한 번이라도 전도 한 번이라도 더 하니 좋다는 이러한 사생관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40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이 편안하게 잘 사는 것도 좋고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생하는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도 모두 영생과 천국 때문입니다. 구령열에 불타는 마음보다 더 고귀하고 거룩한 욕망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내세관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경건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바울과 같은 신앙의 생활을 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하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하늘에서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그분(계 4:8,9)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거룩하신 분" "거룩하고 악의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 보다 높이 되신 그분. 곧 그리스도" 를 닮는다는 것입니다(히 7:26). 이것은 단순히 악의나 악한 세상과 구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막과 거기에 사용되던 모든 기구들이 다른 물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던 것과 같은 뜻의 구별입니다. 모든 세속적인 관습으로부터의 분리요 영원한 계약의 피로 말미암은 분리입니다. 오늘도 거룩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결한 생활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잠31:3)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한 존 구호가 그의 생애 마지막인,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청년 집회에서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성결한 생활을 하십시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같은 말을 또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의아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사가 똑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존 구호는, "젊은이들이여, 성결한 생활을..." 하며,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단 위에서 그대로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미 늙고 쇠약해진 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 '성결한 삶'을 외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강연자로서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에게 '성결한 생활'을 강조해온 그의 과거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방탕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신앙의 뿌리가 그를 붙들었고 결국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 절에서 지혜자는 성적 방종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왕이 전력을 다해 국사를 보지 않고 민심을 살피지 않으며 색욕을 좇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며, 나라의 쇠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불을 켜라
출 27:20-21
성소에 들어가면 먼저 우측에 진설병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설병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의미하고 반드시 안식일에 이것을 교체하면서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설병을 만들때에는 고운가루에 꿀이나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설병의 의미는 온 인류의 떡이 되셔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죽은 자가 살아나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며 영혼을 소생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소 좌편에는 일곱 촛대로 되어 있는 등대가 있습니다. 성소에 있던 등대는 금으로 만들었으며 한줄기에서 여섯 개의 가지로 펼쳐지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등대의 모습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삶이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의 등을 켤 때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소는 네가지의 덮개를 덮었기 때문에 어떤 빛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즉 이 세상의 빛이 들어올 수 없는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오직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감람유로 불을 밝히는 성소의 등대만이 내부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인위적으로 밝고 아름답게 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령한 빛으로 영원히 비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빛의 종교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영원까지 빛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빛을 만드시고 큰 빛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죄의 어두움이 찾아오고 사망과 저주와 멸망과 불행의 어두움이 온 땅을 덮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다시 비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어두움을 물리치시고 어두
움의 세력을 몰아내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원수 마귀를 내어 쫓으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셋째,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불을 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면 성령님은 온 인류의 심령에 불을 켜서 밝히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에서 보면 어두움의 자녀가 주님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고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불이 켜짐으로 어두움의 문화와 나라들이 변하고 개인이 어떠한 환경이든지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성령의 불이 켜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켜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천번제 새벽기도회에서 기도의 제단을 쌓는 일은 기름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불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기름은 내가 늘 공급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게 될 때에 기름은 떨어지고 어두움이 바로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내 안에 불이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빛을 비출수 있지만 불이 꺼진 심령은 말과 생각과 습관에서 모두 어두움이 드리울 뿐입니다. 모든 어두움들을 주의 빛으로 내어쫓고 빛된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일곱 촛대의 거룩한 불을 켜놓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거룩의 대가
거룩의 대가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모든 이해 관계를 한없이 축소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것은 무한히 증가시키는 것이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거룩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거룩의 의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오니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 오스왈드 챔버스
거룩함에 대한 갈망
Holy Spirit(성령님의 이름으로 비유해 본다면)과의 관계도 같은 이치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인 Holy(거룩)에 의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분의 성씨인 Spirit(성령)에 의해 모든 은사들을 다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거부한다면 성령도 또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며, 또한 거룩한 곳에 거하십니다(레 19:2; 고전 3:16, 17).
우리의 삶 속에 거룩함의 수준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창세 전에 거룩하도록 택함을 입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온 거룩함을 우리가 갈망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은 사역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거룩함이며, 우리의 사역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몫과 우리의 몫
거룩에는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라는 신비로운 혼합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동참 없이는 그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축복의 장소에 두어야 한다. 거룩에 대한 조건 충족 없이 거룩이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대하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우연히 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푸른 초장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판은 아주 분명하다. 우리 다같이 그 길을 가도록 하자. 거룩하기를 원하면서 기도와 헌신을 등한히 하는 것은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면서 서쪽을 향해 걷는 것과 같다.
오직 믿음으로만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도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의지적인 순종에 대한 수백 구절이 넘는 많은 말씀들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승리의 삶은 ‘소명의 제단’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성도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그 자신을 그리스도께 재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제단에 드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일시적으로 제단에 드린 자신의 의지는 지속적인 노력의 뒷받침이 없이는 곧 그 열정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하나님으로 그 일을 하시게 하자”라든지, “약속을 믿으면 충만을 받는다” 또는 “노력하지 말고 신뢰하라”는 등 아주 그럴싸한 구호들을 조심해야 한다. 도날드 캄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은 신자들 안에서 자동적으로 혼자 역사하시지 않고 그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 / 윌리암 맥도날드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힘쓰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결혼 생활에 만족하며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
경건의 연습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곤들메기라는 물고기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심리학자들이 그 물고기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곤들메기를 잡아 커다란 수족관에 넣고 그 수족관 안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며 살게 했습니다. 며칠후 이 곤들메기와 먹이인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막으로 차단하였습니다. 곤들메기는 바로 눈 앞에 먹이가 있었지만 아무리 잡아 먹으려고 해도 유리막에 부딪힐뿐 번번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후 유리막을 치워주었습니다.
푸집한 만찬을 다시 허락받은 곤들메기가 먹이를 향해 돌진을 하여 포식할때까지 사냥을 계속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고도 이 곤들메기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들메기에게 이들 작은 고기들은 이미 잡아먹을수 없는 그림의 떡쯤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곤들메기는 그 풍성한 만찬에의 참여를 거부한채 이 주일쯤되는 어느 날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습관이라는 무서운 것입니다. 경건의 습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오늘도 경건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항상 우리를 역경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우리에게 역경을 감당하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
외딴 섬에 혼자 버려져 있는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먹을 것을 찾아 섬을 헤매다가 쾌속정 한 대가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재빨리 연료 탱크에 연료가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엔진에 시동을 걸고는 멀리 가버린다. 그는 고립된 상태에서 구출된 것이다. 이번에는 똑같은 사람이 다른 처지에 처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그가 보트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버려진 농가와 과수원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과수원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농기구를 발견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록 섬 안에 갇혀 있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혼자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의 경우가 훨씬 더 바람직스럽게 보인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게 구원의 방법이 제공되었다. 다만 그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경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하심으로써 당신의 신실함을 증거하실 때가 종종 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환경을 바꿔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역경을 이기는 법 / 찰스
순종은 거룩함의 길
순종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순종 자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거룩하심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과 자신의 복 된 본성을 거룩하신 자로서 충만하게 계시하시고 전달하시기 위해 인도하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행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순종하심으로써,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그 뜻 안에서, 우리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받아들일 때, 나는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는 거룩하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의 모든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와 생생한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내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님의 내면적인 가르침을 구하고 기다리십시오. 거룩, 이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 앤드류 머레이
* 기도: 나를 정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실 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나 자신을 잘 준비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생생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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