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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예화 36편

by 【고동엽】 2022. 12.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종교적 감정

한 유명한 설교자가 한무리의 청중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설교자의 모습은 대단히 열정적이며 제
스츄어도 대단했다.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에는 충분할 정도
의 유창한 설교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정말로 심판자가 와서 최후의 심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소리내어 울며 고함까지 지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설교자는 소란
스러운 장내를 진정시킨 뒤 잠시 후 조용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
갔다.
"지금 이 후로 몇분 이내에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가진 감정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와 함께 여러분들은 충분하게 한 무서운 심판의 사실에 대해
서도 잊어버리고 잠시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 각자의 일을 하며 또 다시 죄 속에 빠지게 될 것입
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태도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우리 생
활에 활력을 줄 수 있다. 이런식의 충동 같은 것은 종교적으로 무익한 감
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분노의 감정

 
성경: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29:11)

어느 날 한 목사님이 분노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한 부인이 목사님께 다가갔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가 성질이 너무 급해서 고민이라며 목사님에게 자기 문제를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작은 일에 가끔 폭발을 하지만 그리고 나서는 뒤가 없습니다. 금방 풀어버립니다. 마음에 두고 꿍하고 있지는 않지요. 일분도 안 걸려 그 사람하고 그 자리에서 다 툭툭 털어 버리고 끝납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그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정중히 말했습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한방이면 끝나지요 그러나 한방만 쏘아도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다 박살나지요."
사람은 모두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을 느끼는 정도와 표현하는 여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감정은 감정을 즉시 표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희노애락의 감정 중에 기쁨과 즐거움은 표현을 하든지 안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다툼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물론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나. 분노가 치민다 해서 그대로 표현했다가는 후회할 일만 생깁니다. 그러므로 노를 잘 다스려서 억제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십니까? 

 

 
 

실패를 부르는 감정

 

우리가 실패하게 되는 대개의 경우는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때입니다.

소련 수상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초프가 쓴 회고록 「후르시초프」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하던 당시 그가 정치 장교로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 독일군은 소련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가 워낙 방대한 땅이라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잡기 위해 70만 명의 대병력을 투입했으나, 아무리 전진을 계속해도 독일군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전진하다가는 오히려 작전의 실패를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야전 사령관은 정치 장교인 후르시초프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때 소련의 수상은 스탈린이었는데, 그는 계속 전진하라는 일방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야전 사령관의 의사를 무시한, 다분히 감정적이며 일방적인 명령이었습니다.

 

후르시초프도 그때의 일을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명령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결국 그 당시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작전 명령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당해 70만 명 가운데 30만명의 병사들을 잃는 참사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충격적이고, 감정적이고, 일방적 태도는 실패를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 Our daily bread 

 
 
 
 
 
 
감동의 원천

국민 에디코의 김영철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임무는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직원들을 더 잘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는 직원들이 특별한 유니폼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 사병이 장교를 보면 경례를 하듯이 특별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나는 존경합니다. 내 임무는 ‘직원을 즐겁게 하자’입니다.

출근하면서 어떻게 하면 직원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직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같이 회의도 하고,전략도 세우고,여행도 함께 합니다.직원을 즐겁게 해주다보니 위엄을 보일 때보다 회사가 더 잘됩니다”


경영자들은 ‘직원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미국의 트레이닝 잡지에 따르면 5% 미만의 경영자만 실제로 행동을 한다고 한다. 감동된 직원은 감동된 고객을 창출해낸다. 인간은 감동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보다 감동에 의해서 움직일 때 맹렬한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원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과 신뢰다.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인간은 감동하게 된다

 

 

 

 
 

연쇄반응

 

어떤 사람이 편지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가서는 3전짜리 우표 하나를 사려고 10전짜리를 내놓았다. 창구에 앉아 있는 우체국 직원은 창백한 얼굴을 한 위장병 환자였는데, 거스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단 내놓았던 우표를 다시 집어 넣고는 시치미를 떼고 아래만 내려다보며 글만 쓰고 있었다. 아침 일찍 우표 한 장을 사러 갔던 이 사람은 우체국 직원의 이와 같은 불친절한 태도에 몹시 기분이 상하고는 모처럼 써가지고 부치려던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분한 마음으로 우체국을 나섰다.

 

마침, 그때에 잘 아는 사람 하나가 우체국 앞을 지나가다가 반가이 인사를 했다. 잔뜩 화가 난 이 사람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인사를 했던 사람이 화가 났다. "내가 제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신세를 진 일고 없는데 참, 몹쓸 사람이네,"하고는 투덜거리며 집으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더욱 속이 상해서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관문을 힘껏 밀어 버렸다.

 

집 안에서 재봉일을 하고 있던 부인은 집이 무너질 듯한 요란한 문닫는 소리에 놀라 달려나와보니,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남편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눈치만 살피던 부인은 부인대로 화가 나서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꾸지람을 퍼붓고는 방으로 들어 갔다. 그러자 말없이 집안 일을 돌보고 있던 가정부는 "내가 돈이 없어 가정부 노릇을 하니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수도가에 나가 앉아서는 수도물을 틀어 놓고 한참이나 울고 나니, 집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불평스런 우울한 생활 태도가 여러 사람을 괴롭혔던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히말라야에 가면

히말라야에 가면 삶은 티끌이다.
샹그리라에 갈 것도 없이 히말라야 자체가
영원의 다른 이름이다. 찰나적인 이 삶 속에서
우리가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은 사실은 얼마나
하찮은 욕망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그리 많지 않다. 아우성치며, 온갖 것으로
무장하거나, 온갖 치장으로 본성의 얼굴을
가린 채 달려가는 삶의 끝은 사방이
꽉막힌 욕망의 감옥일 뿐이다.
그 욕망의 감옥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면서 지르는 가파른 비명을
히말라야에서 일주일만 걸으면 들을 수 있다.
- 박범신의《히말라야가 내게 가르쳐 준 것》중에서 -

* 조금만 높은 데서 보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큰 것도 작게 보입니다. 작은 손해, 작은 상처, 작은 불행에 부르르 떨거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습니다. 좋은 말 한마디, 좋은 시, 좋은 그림 하나에도 감동과 행복을 느끼고, 인생을 관조(觀照)할 수 있다면 굳이 히말라야에까지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감수성
 
"당신은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요. 이지도르.
처음엔 그게 당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만,
나중에 가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요."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중에서 -

* 감수성은 인생의 모닥불입니다. 언 몸을 덥혀주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풀어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그러나 너무 거세게 타오르면 안 됩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철한 지성이 동반돼야 합니다. 자기 절제와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균형과 조화도 요구됩니다.
그래야 슬픔을 녹여 기쁨으로, 기쁨도 슬픔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감수성을 이유로
희노애락(喜怒愛樂)의 감정을 여과없이 토해
내면, 자기도 남도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의 돌쩌귀

 

자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돌쩌귀는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돌쩌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때 문제에 빠집니다. 의기 소침, 편집증, 정신분열, 강간, 자살,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불안증세는 고립감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분 경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경영자들에게 매일 최소한 1분 동안 고용인들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매일 단지 1분 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면 많은 회사들에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고용인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며, 점차 자동화되어 가는 작업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쩌귀에 기름을 칩시다. 매일 다른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두 가지 일을 시작합시다.

그것이 음식이든, 전화든, 편지든, 카드든, 1분 간의 감사의 말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 당장 그 일을 합시다.

누군가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거든, 그를 칭찬합시다. 누군가 일을 철저히 하고 있거든, 그를 격려합시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감수성

 

부활절이 지난 어느 주일. 교회학교 교사가 가운데가 벌어지는 플라스틱 달걀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새 생명을 나타내는 물건들을 하나씩 골라 그 달걀 안에 넣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 날은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아이들은 차례로 나와 달걀 안에 넣어 온 것이 왜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한 아이는 꽃을 담아왔다. 아이들은 모두 새로운 생명을 보여주는 그 아름다운 상징물에 ‘와아’ 혹은 ‘어머’ 하며 감탄했다. 어떤 달걀에서는 나비가 나왔다. 또 다른 달걀을 열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 있어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지막 달걀을 열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한 아이가 ‘멍청이’라고 말했다. 그때 누군가 선생님의 소매깃을 당기고 있었다. “선생님 그거 제거예요. 제가 그랬어요. 무덤이 비어있기 때문에 제게 새 생명이 있어요” 평소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던 9세 아이였다.
앨리스 그레이의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이야기’ 에 수록된 이야기 중 하나인데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글이다. 문득 인생은 획기적인 변화보다 올바른 깨달음이 중요하는 생각을 했다. 올바른 깨달음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얼마나 많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있는걸까.


처음 본 꽃 한송이의 향기를 맡을 때, 들어 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가 들려 올 때, 밟아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을 향한 깊은 갈망이 느껴질 때, 또는 선잠 든 막내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줄 때, 하교할 아이의 간식을 준비할 때…우리는 예견하지 못한 뜻밖의 깨달음과 맞닥뜨린다. 일상속에서의 이런 ‘뜻밖의 깨달음’은 종종 잃었던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 행복이란 바이러스가 온몸에 스멀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왠지 모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많은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는 현대인들,특히 사이버공간에서 음란·폭력물에 익숙해진 자녀들의 심성은 날로 황폐해져 가고 있다. 기괴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온갖 첨단 폭발물로 건물을 파괴하는 공포영화와 무협영화에 익숙하고 엽기만화와 인터넷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은 점점 감수성과 거리가 멀어진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감탄하지 않고 슬프고 가슴아픈 사연 앞에서 안타까워 하지도 않는다.
자녀의 감수성은 창의력 지도력 판단력 등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미래를 좌우한다.

 

따라서 감수성 개발은 중요하다. 어린시절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지르는 탄성,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느껴지는 사랑이 삶의 자양분이 된다고 한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고 자녀들이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시간은 돈이 아니라 행복이다.그러나 행복은 막연한 기대로 이뤄지지 않고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해서 얻어내야 할 과제이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를 우리가 깨달을 때 세상은 긍정적으로 다가오고 사랑이 품안에 다가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행복과 감사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 

 
 
 
 
 

뜨거운 가슴, 냉철한 머리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교회는 깨끗한 사람만 걸러내어 그들만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말이 많으신 높은 분들이 와서 남에게 의를 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병든 자가 와서 병이 나음을 얻고, 약한 자가 와서 강함을 얻고, 외로운 자가 와서 주님의 위로를 얻고, 가난한 자가 와서 주님의 부유함을 얻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과 죽고 싶은 사람이 삶의 희망과 목적을 얻고, 온갖 상처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나와서 화목을 얻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목입니다. 말수가 줄어들고 말씀이 충만하면 그 인생과 교회는 은혜 넘치는 인생과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내 안에 화평이 있고, 교회 안에 화목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번은 곽선희 목사님이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잘 될지 한경직 목사님께 물으니까 한경직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안 싸우면 교회는 잘 됩니다." 교회에 화평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은혜의 삶을 살려면 머리가 뜨거워지기보다는 가슴과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성적 활동을 우습게 알라는 말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의 지성이나 과학보다 믿음을 더 중시한다는 것은 결코 신앙인이 무식해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으로 추구할 것은 추구하되 그 위에 믿음과 은혜를 더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분은 종교와 과학이 반목의 관계가 아님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학은 사실을 설명하는데 종교보다 우수하고, 종교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가르치는데 과학보다 우수하다. 과학이 지식이라면 종교는 지혜이다. 과학이 증명이라면 종교는 믿음이다. 과학적인 지식은 지혜가 아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지혜는 과학적인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적인 지식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길은 지혜의 길이 아니다. 지혜는 지식과 신앙이 상충적인 관계 안에서 종합된 것이다. 지혜는 현실과 이상을 다 이해하며 실제로 그 둘을 종합하여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기여한다. 종교와 과학이 이질적인 것으로 서로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드러낼 뿐이며 독선을 자아낼 뿐이다."


신앙과 과학은 반목의 관계, 모순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주는 관계입니다.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학의 문턱에 들어간 사람은 과학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과학에 깊이 들어간 사람은 과학 때문에 신앙을 찾는다." 현대 과학이 풀 수 없는 수많은 미스테리를 목격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신앙심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특히 천문학자치고 무신론자는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놀랍고 오묘하고 완전한 질서를 보면서 신앙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신앙을 존경한다고 해서 신앙이 과학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간혹 영적인 비밀에 정통했다는 사람들 중에 과학을 멸시하는 자세를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안수하면 손에서 불이 나가는데..."하고 마음이 높아져 과학적 사실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슨 연탄불이 나간단 말입니까?


또한 어떤 영적인 비밀에 정통했다는 분은 의사 선생님들을 '돈벌기 위한 마귀의 사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의사 선생님들이 과학적인 진단을 해서 환자에게 어떤 병이 걸렸다고 하니까 그 정통한 분은 이사야 53장 5절과 베드로 전서 2장 24절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우리가 다 나았는데 무슨 병이냐? 그것은 마귀가 의사를 통해 들려주는 거짓말이다"고 하며 과학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해석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여 과학의 원리를 무조건 정죄하는 사람은 '화목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미성숙한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심을 깊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골방>도 필요하고 그 신앙의 열매를 타인에게 실천적으로 나누어주는 <사랑방>도 필요하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의 지성을 개발시키는 <글방>도 또한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감정의 기복 속에서

 

한 공수부대 요원이 처음으로 공중 낙하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교관이 그에게 말했다. “제로니모라고 외치면서 비행기에서 뛰 어내려. 그런 다음 줄을 잡아당겨. 그러면 낙하산이 펴질 것이 다. 낙하산이 펴지지 않을 경우, 남아 있는 나머지 줄을 잡아당 기라. 그러면 보조 낙하산이 펴질 것이다. 땅에 내리면 너를 부대로 데려다줄 트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군인은 “제 로니모”라고 외치면서 뛰어 내리며 낙하산 줄을 잡아당긴 후 위 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낙하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보조 낙 하산 줄을 잡아 당 겼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펴지지 않았다. 그는 소름이 끼쳐 아래 땅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교관이 말한 대로 낙하산이 안 펴진 걸 보면, 장담하건대 저기엔 트럭도 없을 거야! ” 이 이야기에서 두 개의 낙하산이 모두 펴 지지 않은 것과 트럭의 존재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관성도 없 다.
그러나 일어난 것은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끼 는 감정적 반응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스스로에게 “내가 그리 스도인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느끼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한 사건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라는 느낌을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그 느낌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사실들, 특히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관계 된 사실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표 전, 30일을 기다리라

 

40년의 목회 기간 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사임하려는 최종 결정을 잠시 보류하고 기다리게 하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거의 언제나 당사자에게 사임 결정을 30일 동안 기다리면서 다시 생각해주기를 부탁한다.

그 30일을 기다리는 동안 화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몸이 좀더 건강해질 수도 있고 병이 치료될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 중 반은 마음이 변한다. 이 말은 사임이 즉각 수리되었다면 그들은 후에 실망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임하기 전에 적어도 30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는 자신 이외에 아무도 그의 생각을 알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용인이 그만두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개의 고용주들은 깊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고용인이 계속 남아 있다 해도 고용주는 그 실망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목회를 했던 친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셔서 그의 교회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침에 그 교회 찬송 인도자가 지각을 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는 오지도 않았다. 잘못될 수 있는 일들은 다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일어나 강단에 섰을 때는 실망도 하고 약간 화도 났다. 그래서 그는 다음 주일이 그의 마지막 주일이 될 것이라고 광고를 해버렸다.
정말로 다음 주일이 그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곳에서의 사역과 같은 일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도 그때의 결정이 평생의 실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도 감정적으로 사임을 해서는 안된다. 

 

 

 

 
 

콩나물 파는 할머니

 

"할머니, 오십 원어치 주세요."나는 백 원짜리 동전을 내밀며 "할머니, 거스름돈은 그만 두세요."했더니 할머니는 웃기만 하대요. 그리고 십원짜리 동전 5개를 내밀지 않겠어요.
나는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발길을 돌리는데 맘은 행복에 가득찬 듯 유괘했습니다.
첫째는 할머니가 비굴하지 않아서 기뻤고,
둘째는 내가 거지냐? 하고 따졌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어요?
내 자신의 존엄과 남의 마음을 동시에 존중하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거북이의 목을 끌어내는 법

 

거북이의 목을 끌어내는 법
 
 거북이는 여하한 강압적인 방법으로도 거북이의 목을 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거북이를 불 가까이 놓는 것이다. 온 몸에 따뜻함을 느끼면 거북이는 스스로 머리를 내놓는다. 이것은 인간 사회도 같다. 우정과 형제애의 따뜻한 분위기가 선행되어야 해결이 온다. 주먹으로 우격다짐으로 해선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기도할 줄 몰랐던 박사

 

기도할 줄 몰랐던 박사
 단 4:16; 겔 11:19; 36:26; 엡 4:23
 
 독일 베를린에 불신자 박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전도사를 찾아가 신앙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후에 전도자가 박사에게 기도하라고 했으나 박사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못했다. 전도자가 박사에게 말했다.
 "아이들도 하는 기도를 왜 못하십니까?"
 낙심이 된 박사는 돌아오다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박사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너희들 기도할 줄 아니?"
 "예."
 "그러면 한번 해볼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아이가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 박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고 몸과 마음을 헌신하여 인도선교에 나섰다. 그는 나병환자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다정한 벗이 되었다.
 이처럼 아이의 기도에 감동한 영혼이 예수를 믿고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높은 지위를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미천한 자들의 종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설교

 

누구에게나 필요한 설교
 갈 4:19, 20; 딤전 1:12-17; 요 3:16
 
 어던 목사가 지방 형무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남부 지방을 순회하였다. 하루는 그가 묵게 된 여관집의 아들을 데리고 형무소를 방문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기독교인이 아닌 그 젊은이가 말했다.
 "죄수들 중에 열 명은 깊은 감명을 받았을 거예요! 목사님의 맘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였겠지요?"
 "내 설교가 너에게는 유익했니?"
 그러자 젊은이는 놀라는 투로 대답했다.
 "목사님, 그 설교는 죄수들에게 하신 거였잖아요."이에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했을 뿐이다. 그분은 죄수들에게만이 아니라 너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분이란다." (The Chridtian Advocate)

 

 

 

 
 

눈물

 
 기도하면 절로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기도하면 자기의 죄가 깨달아 지고 절로 눈물이 쉴새 없이 흐르게 된다. 크리스소톰(John Chrysostom)은 성도에게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렇게 설명했다."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왜냐하면 눈물은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성격상 눈물 따위하고는 거리 만 사람이야" 하고 "현대의 이성적인 남성인데 울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나와 상관없어" 하고 덮어 둘 문제가 아니다. 육신 적인 죽음과 남의 슬픔이나 연속극 앞에서는 쉽사리 감동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영혼의 슬픈 모습이나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 앞에서는 어찌 그리 태연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금 까지 기도를 외면하거나 영혼을 위한 깊은 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사람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도전한다."습관이 습관을 극복한다."겉으로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서 속으로 눈물을 흘리자. 영혼의 마음이 애통하는 자가 되자.
 그리하여 눈물의 세례를 받는 자가 되자. 내게 왜 기도가 없는지를 걱정하고 왜 나는 기도할때 눈물이 없는지 근심하는 자가 되자. 영혼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자가되자."눈물이 눈에서 줄줄 흘려 내리는 그 이유를 이제 아실 것 같소? 나를 위로해 주는 이 하나도 없다오 원수들이 우리를 정복해 버려 남아 있는 우리 동포 찾을 길 없다오"(현대어 성경 애 1:16)

 

 

 

 

 
 

목사와 백화점 주인

 

목사와 백화점 주인
 행 15:32; 살전 5:14; 딛 1:9
 
 어떤 목사가 큰 백화점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그 백화점의 주인에게 말해야 할 것이 떠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양탄자와 침구에 관해서 말한 일은 많지만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아직 못했습니다. 시간을 좀 내실 수 있을까요?"백화점 주인은 사무실로 목사를 안내했다.
 목사는 성경책을 꺼내서 주인에게 가르치며 그에게 신앙인이 되도록 촉구했다. 얼마 후 그 주인의 눈에서 눈물이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저는 올해로 70살이 됩니다. 저는 이 곳에서 출생했으며 지금까지 사업을 하며 수백 명의 목사들과 500여 교회 직원들과 거래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영혼에 관해서 말씀해 주신 유일한 분입니다."

 

 

 

 
 

선해진 도둑

 

폭설이 내리는 밤,한 부인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누군가가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바짝 다가왔을 때 그녀는 얼른 짐을 그 사람에게 주며 말했다. 『선생님,저를 좀 도와주세요. 짐이 너무 무거워요』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은 소매치기로서 가방을 날치기하려 했으나 자신을 믿어 주었기 때문에 차마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사람은 신뢰를 받으면 선해진다.

 

 

 

 
 

설교의 환경을 알아야 한다

 

설교의 환경을 알아야 한다
 벧전 5:2-4; 요 10:14; 21:15, 16
 
 목회 장소와 환경을 기억한다는 것은 설교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조각가 챈트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옛날 사람들은 동상이 세워지게 될 장소를 알고서 작업을 했으며 그 동상이 언 정도의 빛에 노출될 것인지를 예상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설교 대상지역과 그 지역 사람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거의 완전하게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18, 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거우 50명 정도밖에 출석하지 않는 도심지 교회의 어떤 설교자는 "열심있는 성도들이여!"라는 찬송가로 예배를 시작한다. 빈민보호소에서 "너의를 위하여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말라."라는 는 본문으로 설교한 목사도 동일한 망각을 하는 것이다.
 지방 교도소에서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하여 "모두가 이제 각자의 처소에서 떠나게 되기를"열렬하게 바라는 말로 강연을 끝냄으로 기결수들에게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주 어리석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상황을 오판한다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 또한 중산층 사람들과 노동자 계층 사람들과 매우 다르다. 물론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복음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동시적인적응'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서교자라면 민감하고 탁월하며 복있는자라고 하겠지만 거기에는 적응하는 실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W. L. Wa-tkinson)

 

 

 

 
 

성령이 넘치는 설교

 

성령이 넘치는 설교
 시 103:12; 빌 2:1, 2; 벧전 4:11
 
 심프슨 주교가 런던 기념회관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다. 그는 30분동안 아무런 동작도 없이 음성에 억양도 없이 조용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 달려 피흘리신 장면을 이야기할 때 그는 마치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 듯 몸을 굽혔다가 허리를 펴들고 짐을 던지는 모양을 하면서 크게 외쳤다.
 "동편 끝에서 서편 끝까지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멀리 옮기셨습니다."
 그러자 거기 모였던 청중들 전체가 다 감동을 이기지 못해 23초 동안 일어나 서 잇다가 주저앉았다. 그 청중 가운데는 웅변학 교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심프슨의 설교를 비평하기 위해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옆에 잇던 친구가 교수에게 "주교의 설교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웅변이었죠?" 하고 물었더니 그는 "웅변이 다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성령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쓰여진 말의 힘

 

쓰여진 말의 힘
 롬 16:25; 딤전 2:7; 사 60:6
 
 웬델 필립스는 훌륭하고 품위있는 웅변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할 때의 모습은 조용조용했고 몸짓은 거의 취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중들을 감동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잇는 인물이엇다.
 그가 보스턴에서 연설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연설을 들으러 온 군중들은 그에게 모두들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연설할때 그들은 야유를 보내고 노래를 부르며 아예 웬델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방해를 하였다. 그러나 웬델은 이러한 그들의 훼방에 대하여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그는 강단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던 기자들에게 아주 낮은 목 소리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그의 태도를 주시하고 흥분했다. 군중들은 과연 그가 기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것인가 주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웬델이 군중들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계속 말씀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저의 연설은 여러분의 귀가 필요치 않습니다. 자, 그러니 여러분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십시오. 나는 다만 3, 000만 명에 달하는 독자들에게 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의 말에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들은 쓰여진 말의 힘을 알기 때문이었다. (SPEAKER'S LIBRARY)

 

 

 

 
 

 

어린이가 바친 벽돌 두 장

 

어린이가 바친 벽돌 두 장
 요 6:9; 겔 43:26; 수 6:18; 게 27:28
 
 어떤 큰 교화가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교인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지을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기만 하면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좀처럼 일이 진척되질 않았다.
 이에 낙답한 목사는 어느 날 저녁시간을 정해서 교회 건축문제를 놓고온 교인이 함께 기도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막상 기도회에 참석한 인원은 극소수였다. 그 중 한 여인은 아이를 맏아 줄 사람이 없어서 다섯살난 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기도회가 시작되었으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 꼬마 아이도 이 기도회가 교회 건축을 위한 기도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그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 만에야 알아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 꼬마 아이가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딸을 찾아나셨는데 얼마 후 교회 사택 마당에서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였다. 목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고 옆에는 벽돌 두 장이 실려 있는 아이의 장난감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 그 두 장의 벽돌은 교회 건축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아이가 목사에게 가져온 것이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목사는 이 일에 대해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아이가바친 두 장의 벽돌은 크고 아름다운 새 교회로 태어나게 되었다.(Sunday School Times)

 

 

 

 
 

존의 성령교회

 

존의 성령교회
 히 8:5; 창 22:2, 3, 9; 신 1:33; 행 10:28
 
 라이베리아 가가다에 존이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아주 미신 적이어서 무당의 굿을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그는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미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예베당을 지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며칠 동안을 고민하다가 끝내 그 음성을 따라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존은 결심을 굳힌 다음날부터 교회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동네 사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당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은 20일 동안 집에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
 꿈의 성취와 동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20일의 기도를 마친 존은 동네에 나가 교회 건축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네 사람들이 마음의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교회건축을 도왔다.
 `존의 성령교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교회는 그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개심하게 하고 세례를 주어 훌륭한 교인이 되게 하였다. 이리하여 존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며 생명의 길을 찾게 하였던 것이다.

 

 

 

 
 

피로산 죄인

 

피로산 죄인

벧전 1:18-20 롬 12:10; 고전 6:20

아프리카 오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한 토인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장의 노여움을 샀 다. 추장은 화가 치밀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을 명했다. 이 사실을 안 선교사는 비싼 보화를 싸가지고 가서 추장에게 주면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추장은 보기보다 완고하고 냉담했다.
 "저런 물건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아나 금, 은, 노예 따위는 부럽지 않소. 그런 것들은 저쪽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빼앗아올 수 있소.
 더구나 백인의 물건은 갖지 않겠소. 내가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피요. 다른 것은 소용없소."
 추장은 다시 부하에게 죄인을 죽일 것을 명했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선교사의 가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인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가 화살에 맞았다. 순간 선교사는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뽑아 땅에 던졌다.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추장에게 다가갔다.
 "자, 당신이 구하고 있는 피요. 받으시오. 그리고 그를 살려 주시오."선교사의 행동에 감동한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소. 당신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그를 샀소. 그는 당신의 것이오."그 때에 죄인은 선교사의 발밑에 엎드려 감격에 떨면서 부르짖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피로 저를 사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그 후 선교사가 가는 곳마다 그 토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에도 결코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두 마리의 뱀

 

두 마리의 뱀

 

인간의 모든 성질 중에서 질투는 가장 추한 것이고, 허영심은 가장 위태로운 것이다.

마음속의 이 두 마리의 뱀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하기는 그것을 쫓아낸 후의 장소를, 인간 경멸과 교만이라는 또 다른 두 마리의 뱀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질투와 허영심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이 점에 대해 조심해야한다

 

 

 

 
 

감정에 귀를 기울이라

 

감정에 귀를 기울이라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있게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져 있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다.
그렇게 춥고 쓸쓸해 보였던 그림이 졸지에 훈훈한 그림으로, 손짓하는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두 번 덧칠을 하자 그 그림의 감정이 살아난 것이다.
인간은 감정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감정이 죽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삶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패를 자초한 감정적 명령

 

많은 경우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때 실패하게 된다.

「후르시쵸프 메모아」란 책이 있다.

소련의 수상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쵸프가 쓴 회고록인데 그 회고록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했을 때 니키타 후르시쵸프는 정치 장교로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어서 쳐들어갔으나 워낙 방대한 땅이라 감당을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때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서 전진을 하는데 70만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아무리 전진을 계속해도 독일군과는 접전이 없었다.

소련의 야전 사령관은 더이상 전진하다가는 오히려 작전의 실패를 가져올까봐 정치 장교인 후르시쵸프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연락을 했다. 그때 소련의 수상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전진을 계속하라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렸다. 야전군 사령관의 작전 의사를 무시한 다분히 감정적이요, 일방적인 전진명령이었다.

후르시쵸프 자신도 그 일에 대하여 감정적이고 충격적인 명령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면 그 당시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작전명령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 때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해서 70만 가운데 30만의 병력을 잃어버리는 참사를 당했던 것이다

 

 

 

 
 

주님을 영접한 감정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어젯밤 모임에서 기쁨에 충만해 있었소.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마치 한밤중처럼 캄캄하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나는 무척 기쁘군요”라고 대답했고 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사님을 바라보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고 되물었다.

“어제 하나님은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셨소.

그런데 오늘 당신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당신의 감정에 의지하는 것을 보고는 그 즐거움을 없애버린 것이오.

기쁨을 잃은 대신에 당신은 주님을 얻은 것이오. 기차 터널을 지나가 본 적이 있지요?”

“예”

“그곳이 어둡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불안한 적이 있나요?”

“아뇨, 전혀 없었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다시 밝은 빛을 보았지요?”

“아! 지금 나왔어요.” 그는 목사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외쳤다.

“하나님은 나의 감정에 따라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A. E. 얀젠)

 

 

 

 
 

분노와 미움을 버리자

 

한 저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나를 죽이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왔다.

그가 하루는 의학협회에 나가서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한참 발표하는 도중 한 의사가 일어나서 그의 논문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평하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게 논문을 발표하던 그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를 비난한 사람을 큰 소리로 공격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분노와 미움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청소해야겠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목사. 조용기)

 

 

 
 

향수의 감정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윌리암 하우엘즈는 그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에서, 소년 시절에 그의 형과 함께 근처의 도시에서 직업을 얻기 위해 오하이오에 있는 집을 떠난 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그를 여관에 데려다 주고는 집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역으로 갔다.

그러나 기차가 도착했을 때는 윌리암도 역으로 달려갔으며, 그는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먼 나라에서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역에 나타난 그때는 겨울 오후였으며 하늘은 푸른 사과빛으로 보였다.

하우엘즈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 겨울날에 느꼈던 향수와 황량감이 가져다 주었던 하늘 빛깔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C. E. 매카트니)

 

 

 

 
 

끝까지 참는 인내의 감정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인내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이다.

즉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참을 수 있는 감정이다.

인내는 양면에서 참아야 한다.

첫째, 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하여 참아야 한다. 즉 주관적인 인내이다.

둘째, 바깥에서 도전하는 환경과 사건에 대하여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즉, 객관적인 인내이다.

청지기는 참을 줄 알아야 하되 반드시 끝까지 참아야 한다.

한 두번 참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참아야 한다. 또 안팎으로 참아야 한다.

젓가락은 반드시 두 쪽이 있어야 유용하다.

혼자서는 이중창이 불가능하듯이 한쪽만 참아서는 언제나 부족하다.

모두가 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훌륭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젊은 개종자들을 위해

 

젊은 개종자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감정과 종교의 근본을 구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기에 그분께 복종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면 나는 이것을 그 근본이라 부른다.

많은 젊은 개종자들은 거의 철저히 의무에 앞서 자신들의 감정 상태에 의지한다. 몇몇은 마치 자신들이 능숙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개종자들은 자신들 앞에 의무가 놓이면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중히 배워야 한다. 하지도 않고 느낌을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이 기다릴, 가령 그럴듯한 바로 그 느낌은 여러분이 자신의 의무를 시작하는 그 예배 가운데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젊은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그들은 편협적인 차별을 강조하거나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게끔 교육받아서도 안된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중요도에 따라 각자 적당한 시기에 그리고 적당한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강조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의 출발에서 그것들을 중히 여기게 가르쳐선 안된다.

젊은 개종자들에게 내가 이러한 말을 듣게 될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당신은 ‘신에 의한 선택’의 교리를 믿습니까?”라거나 “당신은 세례를 믿습니까” 또는 “당신은 침례를 믿습니까?” 나는 이보다 더 나빠진 개종자를 결코 본적이 없다.

 

 

 

 
 

가장 감격적인 순간

 

유명한 흑인 성악가 메리언 앤더슨의 일화이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 성악가에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었다.

메리언 앤더슨의 가장 감격적인 순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 기자는 메리언 앤더슨이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 부처를 위한 백악관 음악회 때나, 또는 자기 고향에서 필라델피아를 빛낸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을 때를 상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리언 앤더슨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음악회를 성공리에 마친 뒤 집에 달려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제 빨래감을 받지 않아도 되요’ 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감격스러웠을 때는 ‘정죄 의식이라는 빨래감’에서 해방되었을 때이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민족끼리 통하는 언어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곳곳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는 ‘울밑에 선 봉선화’가 있었다.

이 노래는 그 이후로부터 아직까지도 우리 민족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고 불려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이 가사는 우리의 독립을 사모하는 한 민족의 마음을 잘 묘사해 주었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노래뿐만 아니라 시를 비롯한 문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민족적인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노래와 시들을 통하여 서러움을 통감했고, 앞으로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뭉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외워도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민족적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고 그 나라 백성들끼리 통하는 감정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잘 안다고 해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나라 언어를 안다고 해서 그 감정까지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하늘나라의 백성들만이 알 수 있는 영감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이 아니면 감정이 없기에 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사모, 이혜영)

 

 

 

 
 

감정의 파도, 참는 것이 능사 아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뇌의 작용인 감정은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수시로 일어난다.하지만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라는 말처럼 감정을 침묵 속에 억제하는 것은 스스로를 감정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억제된 깊은 감정은 그 탄생의 긍정적인 목적을 위배하고 사람을 해할 수 있기에 감정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에 두려움 없이 맞서도록 우리의 감정이 태어난 곳, 뇌에서 그 해결점을 찾아보자.


■■   뇌가 표현하는 마음의 소리, 감정

뇌과학에서 감정은 뇌의 변연계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마음의 상태이다. 기쁨, 슬픔, 공포, 분노와 같은 감정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뇌의 정보처리 방식으로 변연계의 편도와 인슐라, 앞쪽 대상 이랑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감정은 사고를 처리하고 기억을 분석하는 대뇌피질의 발달로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해왔다. 두려움의 감정으로 위험을 피하고, 분노로 불의에 맞서 싸우기도 하며, 사랑하는 감정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또한 기대 심리와 보상에 따른 즐거움은 가치를 매기고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감정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표현을 억누르면 감정은 무감각해진다. 감정이 무딘 사람은 감정적인 행동과 연관된 편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뇌에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수용체도 활성화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정서는 주로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서 형성되는데, 정서적인 반응이 적은 아이들의 경우 뇌에서 감정 인지와 관련 부분인 대뇌 변연계의 물질대사가 활발하지 않다고 한다.

■■   복잡 오묘한 감정에 대처하는 정석, 억제하기 위해 표출하라?

그렇다면 감정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감정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조절이나 재해석 같은 적극적인 방식과 억제 등의 소극적 방식이 있다. 적극적인 방식에는 문제의 중심을 바라보고 자신의 행동이나 환경을 바꾸는 것과 감정 조절을 통해 나 자신 및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정서 중심적인 대처가 있다.

문제 중심 방법은 때로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 자체나 자신의 현실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서의 방법은 객관적 상황에 관계없이 나 자신의 감정 조절에 따라 모든 것이 달리지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감정의 억제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억누르는 것으로, 심리적으로는 정서가 인지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억제하려는 정보는 억제하면 할수록 커지고, 오히려 표현을 할 때야 비로소 억제된다고 한다. ‘하얀 북극곰’ 실험이 바로 그 예이다.

이 실험에서 한 그룹(자유 그룹)은 하얀 북극곰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하고, 다른 한 그룹(억제 그룹)은 하얀 북극곰과 관련하여 조금도 생각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실험 후 설문 작성에서 자유 그룹은 하얀 북극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반면 억제 그룹은 하얀 북극곰을 과도하게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   감정 재해석하기 VS. 감정 억제하기

감정의 원인을 재해석하거나 감정을 참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노력의 흔한 방법이다. 최근 스탠퍼드 대학의 필립 골딘Philippe Goldin 박사 연구팀은 감정 조절에 관한 뇌 영상 연구를 통해 감정의 억제가 실제로는 감정을 더 키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하나인 ‘혐오’에 대해 ‘인식의 재해석’과 ‘표출의 억제’라는 두 가지 감정 처리 방법을 적용했다.

인식의 재해석은 인지-행동 치료에서 쓰이는 기술과 유사한 것으로 무언가의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의사가 부상당한 어떤 환자의 팔을 꿰매는 과정을 보고 있다고 하자. 그 장면을 보면서 많은 양의 피와 적나라한 치료 과정에 섬뜩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그 치료가 환자의 부상이 회복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다시 맞춰보는 것이 인식의 재해석이다. 표출의 억제는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소리나 얼굴 표정 등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경험하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대신 감정을 꾹꾹 누른다. 이를 뿌득뿌득 갈거나 입술을 깨물어 참는 것으로 말이다.  

■■   감정 뿔났다! 억누르면 폭발하는 감정

연구 참가자들이 혐오스러운 이미지들을 보고 생기는 감정과 그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에 따른 반응을 조사하는 실험이 진행되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이미지에는 감정 활동과 관계된 편도와 인슐라 두 부분이 감정 조절 방법에 관계없이 모두 밝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재해석 때에 비해 억제를 하는 동안 편도와 인슐라의 신경 활동이 크게 증가해 있다는 사실. 재해석 때는 부정적인 감정이 줄었으나, 억압을 할 때는 감정 반응이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재해석이 항상 최고의 방법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만일 누군가와 부당한 억압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도 상대의 행동에 시정을 요구하지 않고 그 관계를 정당화하는 재해석을 한다면 나의 상처는 무섭도록 커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억제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화가 난 직장 상사와의 대화가 그렇다.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겨를도 없이 마구 퍼붓는 상사를 보면서도 우선 일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 눈 한번 질끈 감고 참는 것이 낫다.

감정은 뇌의 운동이라고 한다. 감정을 잘 느끼고 반응할 때 적절한 감정 처리도 가능하다. 감정의 파도를 잘 탈 때 감정은 스트레스가 아닌 뇌의 윤활유,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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