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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의 의미 (요한복음 13:31-35)

by 【고동엽】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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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의 의미
요한복음 13:31-35
 
  한국 소설가 중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양귀자씨의 소설 "모순"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재미있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있는 모든 전화 앞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전화의 구속은 점령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집요하다.  전화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것 같고  또 전화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 걸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그  사람인 것 같고 오랫동안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그 전화가 고장났나  생각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또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 받는 내가 소중해서, 잘생겼든 못생겼든 사랑 받는 나는  소중하니까 거울을 보지 않고 못 견디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그랬어요. 사랑은 기다리며 행복합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행복합니다.  그를 보면서 행복합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무엇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고통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미국의 예방의학 권위자인  피터 한센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이 건강하려면 몇 가지  조심할 것이  있다.  첫째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하고, 둘째는 적당하게 운동을 해야 하고, 세 번째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한다."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담배, 술, 화내는  것, 게으름 피우는 것, 이런 것들,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러면  건강하다."  거 상식적인  얘기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이것은 50%고 나머지 50%는 사랑"이라 그랬어요.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해야  건강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이웃 사랑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건강상 문제다" 그랬어요.  여기에 저는 한 계단  더 붙여서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생명문제다.  행복하고 불행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결국은 사랑의  문제는 생사의 문제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 곧 계명이라는 것이올시다.  엔톨레, 계명, Commandment, 명령이요.  명령과 계명, 하나님의 명령, 여기에  내 생명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신 이 계명을 내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이것을 지켜가느냐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축복된 계명에 대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계명은 주로 부정적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말라 말라 하는 말이 주로 되어 있습니다.  "말라" 하는  것은 계명이요 이건 절대 명령입니다.   나머지 부분, 말라한 것 외에 남는 부분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건 내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도 보면 주로 어렸을 때  "하지 말라!  하지 말라!" 그럽니다.  하루종일 하지 말라는 말만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하지  말라는 말속에 하라는  말이 들어있고,   또 좀 더 커서는  하지 말라고  부모가 지적해 준 것은 그대로 지켜가며 그 위에 아무 말씀도 없었던  것, 그것을 내가 스스로 지켜가면서 높은 차원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올시다.  이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 금기, 하지 말라고 한 이 명령, 여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부자유한 가운데 억지로 노예적  순종을 하며 끌려갑니다.  심지어는 '팔자거니' 생각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 어떤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이 결혼이 못 마땅합니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이 '이거 팔자거니'  하고 그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랑하고  봉사하고 싶지 않은 일에 봉사하고 그렇게 그렇게 한 평생을 다 살았어요.  어찌 생각하면 하지 말라! 한  말은 지킨 것 같은데 거기에 매여 살았다고 하는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금기에 대해서 무조건 반항하는  것이 자기 자유를  찾고 자기  정체를 찾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애들은 하지 말라는 거 할 때  통쾌감을 느낍니다.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이게문제란  말입니다.  하지 말라는 걸 통해서 기쁨을 얻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서 자기 정체를 느끼는 이러한 행동이  바로 불행의 요소요 구제 불능한  것이올시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제게 큰 고민을 말한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이 의과 대학을 다니는데, 아 이거 상당한 이제 지성인인데 이 녀석이 의과 대학까지 다니는  녀석이 꼭 담배를 피워요.  또 거기다가 목사 아들인데…….   그래 목사님 아들을  놓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놈아 거 목사 아들이 담배  피우면 되냐?  너 내가 네게 준 돈이 말이다 이게 설교하고  번 돈이다  이게……  목사가 받은 이 거룩한 돈을 가지고 이놈아  너 담배  피워서 되겠냐?" 그러니까, 이 녀석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담배 산 돈은요 아르바이트한  겁니다.  그거는 아닙니다.   아버지 돈 아닙니다."  "야 그래도  너 아버지를 봐서라도……"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버지, 저는 목사 아들이기 때문에 담배를   꼭 피워야   됩니다."  이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대학  교수인데도 이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얘기를 듣고 나서  "목사님 이거 무슨 소립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면 담배 피워야겠소." 그랬어요.  왜요?  지금 목사 아들이라는 게 굉장히 무겁거든요.  무겁게 느끼는데, 자 목사 아들로 살지 않고 나  아무개로 살려면 독립해야죠.  독립하려면은 담배 피워야죠.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의 자세, 이건 참 문제거든요.  모든 일에서 꼭 "아니요" 해야만 내가 제대로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지요.  누구 말을 들을 때  좋게 받아들이지 않고 꼭  일단 "No" 하던지 아니면 "픽" 하던지 이거 못된 체질이에요 이거는요.  꼭 그래야만  내가 살고 내가 잘난 게 됩니까?  이거 아주 배냇병신이요 이거.  참 힘든 사람입니다.  이거 고쳐야  됩니다.  이걸 아셔야 되요.  자 그대로 남편의 말을 내가  듣고 "네"  하면 내가 죽는 겁니까?  인권이 유린당하는 겁니까?  그래 아내 말을 들으면 남자 체면 아예 구겨 버리는  겁니까?  어째서 이게 잘못이요.  이걸 못해 본, 이게 바로 유교적 배경에서 온  것인데요 큰   문제올시다.  이거 아주  비틀어졌어요.  그래서 기쁨이 "네" 하는 온순한 마음에 있지 않고 "아니요" 하고 버티고 일단 반항을 하는, 그것은 참으로 참으로 이거 구제 불능한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순종의  덕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은 영영 불행한 것이올시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 금기에 대하여  일단 순종은 하는데 마음에서부터  충만한 마음으로 그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감성이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이렇게  순종하는 게 아니에요.  때로는  순종하기는 하는데 그저 마음에  안들지만은 명령하신 분의 그 인격이나 체면을 보아서  순종해 드리는   거죠.  이런 경우가 많아요.  우리  자녀들이 특별히 부모님의 체면을  보아서 이렇게 순종해 드리는 거예요.   순종해주는 거예요.  결코 마음에서부터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주 소극적인…….   성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나가셔서 베드로를 향하여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베드로가 그때 대답하는  말이 아주 애매합니다.  "밤새껏  수고하여 물고기를 잡은 것이  없습니다만은 말씀하시니 내리리이다." 그랬거든요.  거기 괄호하고  한 말씀  딱 집어넣었으면 좋겠어요.    "밤새껏 수고해서 잡은 것 없고,  이제도 못 잡을 것입니다만은 말씀하시니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보아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일단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가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에 예수님 앞에 가서 꿇어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어요?    방금 죄를  지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지키질 못하고 이렇게 의심하며 아주  못된 마음으로 지켰더란 그 말이요.   이게 죄인이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순종하십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새 계명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새 계명.  새 계명이란 말은 옛날 계명이 있단 뜻입니다.  옛날 계명은 주로 "하지 말라" 하는 스타일입니다.   이에 비해서 새 계명은 "하라" 하는  말씀이올시다.  이건 자발성을 말하고  선택적 순종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둘이 계명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 계명에 대한  인간의 자세의 성격이  구별되는  것이올시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게 첫째요, "이웃을 사랑하라" 둘째다.  십계명이 있고 많은 계명이 있지만은 계명의 요지는 사랑이다 이거야.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에 대한, 낡은 법에 대한 원초적인 아주 근본적 해석입니다.  그 법 정신의 근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오리지널 Meaning,  본래적인 의미라는 것은 낡은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그 계명은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계명의 속성입니다.
  계명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예수님은 이거에 대하여 엄청난 명령, 그 명제를 말씀하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즉 다시 말해서 계명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계명을 위해 있느냐?  그런 고로 우리는 이  계명을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소중하게 해  주신 축복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계명에 대해야 된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새 계명의 속성은 이렇게 전제됩니다.   먼저는 "그가  사랑한  것 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 하는 그것이 동기요 근본이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았다는 것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의  뿌리가 있어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권사님 제가 아는데  참 그분, 그 자녀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해요.  어떻게 하면 자녀가 셋인데  하나같이 재수 삼수요.  그러고도  떨어져요.  아 그래 뭐 정말로  어떻게 학교를 제대로 딱 들어간다든 가 하는 것은 그 집안엔 없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참 공부를 잘 못하고 어려운데 전 만났을 때 위로할 말도 참 드
리기가 어려워요.   그랬는데, 아무 때 보아도 이 권사님은 얼굴이 밝아요.  환해요.  너무너무 밝아요.  그것이 알고 싶어요.  도대체  아이들이 이렇게 못났는데 왜 어머니는 이렇게 늘 밝으냐 이거예요.  그걸 알고 싶잖아요.  그래 어제 한  번 물었어요 제가.  "참 걱정거리가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밝으십니까?"  "그거요?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요 저를 엄청나게  사랑했거든요.  제가 제들만 했을  때요 제가 보통 말썽을 부린 게  아니에요.  제들은 그래도 집은 안 나가요.  나는 들락날락 했어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 저를 나무라지 않았어요.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뜨겁게 저를 사랑해 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비해서는,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랑 받은 데 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핵심이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들 옛날에 가난하고 어려운 때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목숨보다  더 사랑했어요.  대신 죽는다면 당장 죽으실 분들이에요.  그렇게  극진한 사랑을 받은 당신들이 이제  와서 그래  그 아이들 좀 뭐 그러기로서니 뭘 실망을 하느니, 뭘  무슨 뭐  싹이 노랗니…….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째서 이렇게 쉽게 절망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어떤 것인데 말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사랑의 모드를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내가 네게 대하듯 내가 네게 대할 것이다.  이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이것은 율법입니다.  내가  어떻게 대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이것은 독선입니다.  쉽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문제가  많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좋은 맘 같지요, 이건 무서운 집착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이것만이 신앙적 사랑입니다.  사랑이 병들 때  고칠 길이  없습니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병드는 것이올시다.  참 사랑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여기에만 사랑이 있고 여기에만 사랑의 진리가 있고 여기에만 사랑의  자유가 있고 사랑의  능력이 있는   것이요.  여기서 떠날  땐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신 것이 뭡니까?  또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서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사랑의 모델, 사랑의  속성, 사랑의 길, 사랑의 지혜, 사랑의  가능성, 사랑의 결과까지 환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사랑의  가장 귀한   진리올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는  죄인을 사랑한 겁니다.  절대로 의인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의인을 골라서 사랑한다고 하다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애당초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요 원수 같은 자를 그대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어요.  그의  사랑은 감상이 아닙니다.  사랑 그대로가 행동이었습니다.  액션입니다.  또한 그의 사랑은    의롭다   하시는    겁니다.    Justification 이올시다.  값을  그가 대신 지불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가 받습니다.  내가 값을  지불해야 할  것을 그가 지불하십니다.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랑이요.  이 사랑에 무한한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  사랑을   기뻐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도다.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사랑에서 징징 울고 짜고 그런 게  아니예요.  이 사랑을 기쁨과 감사와 영광으로 그렇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는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에 감격하고 이  사랑에 충만할  때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저는 늘 가보겠다고 하면서도 기회를 얻지 못해서  못 갔다가  바로 작년엔가 스탠포드 대학을, 명문 대학인 스탠포드 대학을 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유례가  있습니다.    로렌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라고 하는 켈리포니아 출신의 상원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자요 상원의원으로서 명예를 겸하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낙심하게 됩니다.  "이제 살 목적을 잃어버렸다." 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이렇게 슬픔을  당한 그 날 밤에 그 아들이  나타났습
니다.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이  세상에는 아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내 대신   저들을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꿈에서 깼습니다.  굳게  결심하고 재산을 다 털어서  스탠포드라고 하는 유명한 대학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유서  가운데도 내  남은 재산 하나도 남김 없이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 써 달라고 부탁하고 세상
을 떠납니다.  그는 진정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 내가 사랑 받은 대로  을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이 그런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에 새 계명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거기 자유가 있습니다.  아무 두려움도 근심도  걱정도 없습니다.  의무이면서 이것은 자유입니다.  희생인 동시에 기쁨과  감사가 있고 엄청난 수고 그러나 거기에 무한한 창의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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