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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기도 (누가복음 17 : 5 ∼ 10)

by 【고동엽】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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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기도

누가복음 17 : 5 ∼ 10

 

 

 

여러분이 잘 아는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와 그의 몇몇 학자들이 공저로 내놓은 책 가운데에 "Are You Nobody? 당신은 하찮은 존재입니까?"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Are You Nobody?  이 책에서 인간성숙의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정신적 성숙함이 이러한 단계로 발전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첫째가 망설임의 단계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의 세계에 대한 단계를 말합니다.  말도 못하는 얘들이지만은 아이들 자라는 걸 가만히 보면은 얼마동안 자라면서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 것.  자기 것을 챙깁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자기만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비밀한 것, 아주 짜릿하게 자기 것을 숨기면서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타인과의 구별된 자유롭고 독립한 자기존재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나타내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가지고 있는 내 것이 있어야 되요.  그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존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좀 크면은 이 비밀을 공유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얘들은 그저 어른들과 밤낮 손가락을 걸고 우리 비밀이라고, 어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우리만 아는 비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 약속을 하고 비밀을 가지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아주 짜릿한 행복을 즐기는 겁니다.  비밀이올시다.  이건 나와 너만이 가진 비밀이요.  비밀을 공유할 때 이것을 우정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신혼부부가 여행을 한다 해서 밀월여행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니문(Honeymoon), 밀월 여행이라는 것은 둘 이만이 아는 비밀한 행복을 즐기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세상이 이상해서 신혼여행갈 때 많은 친구들이 따라가 가지고 법석을 떨더라구요.  그건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실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야 됩니다.  둘만 오로지 둘만이 만나고 생각하고 가지고 또 그 어느 장소에 비밀한 장소에 있게될 때 이것을 소위 행복의 극치라고 말하게 됩니다.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는 관계에 있어서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올시다.  여기에 우정이 있고 사랑이 형성되고 상호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그만큼 나의 존재의 영역이 커지는 것이올시다.조금 더 성장하게 될 때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이 비밀이란 '무스페리온'이란 말은 영어로 미스터리(Mystery)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비밀이라고도 하고 신비라고도 합니다.  신비는 꼭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그런 관계, 그런 시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될 때 무한한 신비로운 자기만이 가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또한 '토마스 그룸'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육학자의 이론 가운데는 믿음을 세단계로 말합니다.  Faith as believing, 인지적 차원에서의 신앙을 말합니다.  내가 믿는 대상을 내가 깨달아 가는 것이올시다.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빛 안에서 또 인격과 인격의 만남 속에서 깨달음이 점점 커집니다.  좀더 깨닫고 좀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 좀더 확실하게 사랑을 알게되고 능력을 알게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게됩니다.  자꾸만 깨달아 나가면서 그것이 믿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두번째 단계는 Faith as trusting, 신뢰적 차원에서의 신앙입니다.  믿어집니다.  그리고 신뢰가 갑니다.  이제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가면서 평안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매일같이 받으면서 처음에는 깨닫고 깨닫고 그 다음에는 그 깨달은 자기의 인식한계를 넘어서게 될 때 이제는 다 몰라도 좋아요.  아니 아무 것도 몰라도 좋아요.  그는 나를 사랑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합니다.  그 사랑 안에 나는 평안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정서적인 것이겠습니다.

 

그리고는 Faith as Doing, 이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지적인 것입니다.  믿어지니까 행동합니다.  나의 삶에 힘과 용기를 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무슨 말도 믿을 수가 없어요.  자, 그런데 반대로 믿음이 가집니다.  믿음이 생길 때 걱정이 없어요.  믿음이 생길 때 용기도 창의력도 발동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격과 인격, 그 만남의 관계에서 신뢰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믿음은 곧 생명력으로 삶의 용기로 그렇게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때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 무슨 마음으로 따랐을까?  다시 말하면 First motivation, 첫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처음 무슨 목적으로 따릅니까?  무슨 동기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름지기 세속적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 사람들로 인해서 지금 이렇게 완전히 점령되고 경제 정치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전부 타락하고 눈에 보이는 것 전부다 죄악뿐입니다.  거슬리는 것뿐입니다.  그래 생각이 있는 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메시아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다윗왕 때처럼 그 옛날 솔로몬 왕 때의 영광, 그런 메시아의 나라가 빨리 이 땅에 오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이렇게 소원하고 예수를 따랐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아마 큰 실망을 했던 것 같고요, 부활한 다음에도 또 붙들고 물어봅니다.  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그걸 보면 끈질기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메시아닉 에이지, 메시아의 시대에 대한, 세대에 대한 그런 기대,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동기였다고 그렇게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자, 예수를 따르면서 그들은 생각이 바뀝니다.  그들의 간절히 바랬던 그 처음 동기가 바뀝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신앙의 동기가 바뀌고 또 발전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보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처음에는 병고침 받기 위해 예수 믿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답답해서 예수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뭐 아들을 낳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고요.  구체적으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뭐 좌우간 뭐 무주구천동에서부터 절간까지 안 가본 데가 없데요.  그리고 애쓰다가도 안돼서 누가 말하기를 '예수 믿으면 낳는다더라' 이게 동기예요.  오로지 아들 낳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런 사람도 만나 보았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의 마음속에 something,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동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서 성경을 이해하면서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이 동기가 바꾸어집니다.  변화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 보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생활을 보면서 예수를 권능의 사람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만나게 되면서 동기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자, 예수는 병 고치는 분이요, 능력 있는 분이요,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까이 가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예수는 믿음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오로지 하나의 소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이것은 종래에 가졌던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서 변화된 제자의 모습으로서의 소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을 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저들이 깨달은 것은 믿음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칩니다.  자,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천명을 먹이고 모든 능력을 행합니다.  아주 그야말로 능력의 사람으로 역사하는데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무엇이냐?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병 고칠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했다."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수용하게 만든다 이 말이에요.  믿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네 믿음이" 아, 문제는 믿음이다.  그런가 하면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환자가 있습니다.  그를 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세요.  이러한 장면을 경험하면서 역시 믿음의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놀랐던 것은 무어냐 하면 예수님의 절대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안정, 절대평화.  이런 일을 만나도 평안하고 저런 일을 만나도 평안하고 풍랑을 만나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예수님은 평안합니다.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깨웠더니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다 믿음입니다.  예수님께는 엄청난 믿음이 있거든요.  그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해석하고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이 절대평화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에서 예수님 앞에 구합니다.  조용한 시간에 아주 진지하게 구합니다.  "주여 믿음을 더해주세요.  우리에게도 믿음을 주세요" 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느냐?  저들이 보고 깨달은 믿음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요한복음 16장 32절에서 보면 예수님 십자가를 몇 시간 앞에 놓고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다 나를 떠날 때가 왔다.  떠날 것이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버림받는 게 아니라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런고로 혼란을 당하나 담대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 버릴 것이다.  세상이 나를 버릴 것이다.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고독하지 않다.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그런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뿐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주님께서는 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요, 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는 자요, '나'가 누구냐는 거죠.  그걸 확실히 믿었어요.  요한 복음을 전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요한복음에는 '에고 에이미' 영어로는 "I am" 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다 연구하고 나면 요한복음 졸업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을 이것으로 설명합니다.  "나" 간접요법이 아닙니다.  직접요법으로 "나는"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빛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이 한 말씀 한 말씀 속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그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좀더 극적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6장 64절에 보면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어서 가야바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려고 이미 다 작정해 놓고 체포해온 겁니다.  이 예수님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이런 말로 저런 말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거짓증인을 들어서 말하고, 뭐 이럴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초연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지금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대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어요.  나는 이러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믿음 안에서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제자 가운데는 아시는 데로 예수님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수제자 베드로, 의심 많은 도마, 아주 이치에 밝은 빌립, 많은 시원치 않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다시 돌아와서 내 제자가 되고 내가 십자가로 구속한 이 교회 이 어린 양을 네가 먹이라.  네가 나를 위해서 많은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기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이웃을 믿고 있습니까?  자식을 믿습니까?얼마 전에 나온 책 가운데 "CEO 가 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있습니다.  원문에 제목은 "Running from the top" 그런 책입니다.  거기보면 CEO 50명을 연구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 50명이 전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특별히 그걸 읽으면서 감명 받은 부분은 이것입니다.  아주 장난꾸러기가 되었을 때, 아주 문제아처럼 되었을 때, 오로지 그 어머니만은 자기를 믿어주었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믿는다" 그래요.  이것 때문에 내가 오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얼마나 믿습니까?  집을 나간 자식을 믿습니까?  타락한 남편을 믿습니까?  나 자신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는 이웃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 형편없는 제자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어도" 아주 귀한 말씀이지요.  겨자씨 한 알 만한 고만큼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면 산이 바다에 빠질 거라고 믿음의 소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2차대전 끝날 때쯤에 연합군이 승리하고 독일을 들어가서 구라파 각 나라를 다니면서 독일군의 잔병들을 소탕하고 있을 때 어떤 집에 가니까 지하실에 있는데 그 지하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잡혀가기 전에 갇혀있었던 숨어있었던 곳입니다.  거기에 보니 다윗의 별이 그려있어요.  후레시를 들고 자세히 살피니까 그 바람벽에 그들이 잡혀가서 죽기 전에 써놓은 글입니다.  "나는 태양을 믿는다, 여기에 빛이 비치지 아니하여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그것이 표현되지 아니할 때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아무 말이 없으시더라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히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떡해야 믿음을 키울 수 있는가?  참 유감스러운 것은 모처럼 믿음을 가졌다가 믿음에 손해를 보고 믿음에 상처를 입는 분들이 있어요.  거 왜 그런 일이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여기에 종이 있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왔을 때 종이 수고했다고 해서 사례하겠느냐, 먼저 먹으라 하겠느냐?  종은 여전히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충성된 종의 모습이다' 말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랍니다.  모처럼 바치겠다고 하다가 받고자 하는 마음, 모처럼 수고하겠다고 하다가 또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 이렇게 생각이 바뀌니까 믿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처음부터 "나는 종입니다.  섬기는 자입니다."

 

요사이 결혼 주례하면서 주례사 하나 추가한 게 있습니다.  신랑, 신부를 놓고 이렇게 얘기해 봅니다.  "오늘 저녁 자기 전에 신랑 너는 신부보고 '나는 영원히 당신의 노예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나" 하고 물어보니까 요사이 신랑들이 하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신부보고 "너는 신랑 앞에 '나는 당신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말하라"고 그러니까 하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제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제발 그 마음으로 살아다오."  '나는 당신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출발하면 낙심이 어디에 있고, 실망이 어디에 있고, 나약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 참 좋은 겁니다.  바로 이 마음이에요.  나는 영원한 노예입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아가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믿음, 믿음이 자라는 것이에요. 

 

TV프로에서 백두산에 있는 그 호랑이를 생포하는 장면이 나온 일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호랑이가 거기서 크게 아주 포효를 울리고 있는데,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사냥개 한 마리가 막 따라가서 공격하는 것을 봐요.  이 사냥개가 어찌 그 호랑이에게 대들겠습니까?  문제는 뒤에 주인이 있기  때문이요.  주인을 믿고있기 때문이에요.  겁이 없어요.  호랑이 앞에서도 겁이 없어요.  믿음.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나를 중생 시키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기도응답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습니다.  그 경륜 안에서 현실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을 믿습니다.  이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내가 사는 생 그 자체에 사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할 때에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오직 한가지 '하나님 믿음을 주세요.  믿음을 더해주세요.  믿음을 키워주세요.  믿음을 온전케 해주세요.  이것만이 소원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노라 하면서도 믿음이 없고 주님의 사랑을 늘 고백하면서도 사랑을 확증하지 못하고 있기에 늘 흔들리고 늘 나약해지고 비겁해지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위대한 믿음을 주셔서 저 십자가의 고통, 그 뒤에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위대한 믿음을 주시사 현실을 넘어 저 앞에 있는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늘 승리 생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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