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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 오신 부활의 예수! (요 21:1-18)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약 10번 정도 나타나셨는데 오늘 본문은 7번째 나타나심이고 제자들에게는 3번째 부활의 모습을 나타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무덤에서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님은 바로 천국으로 승천하실 수 있었지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아직도 가르치고 맡길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한다면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걱정스러운 예수님의 마음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확신시키시고 사명을 주시고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으로 뜨거운 오직 예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
(요2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최후 만찬 후에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첫 번째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탁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살아났다 말하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갈릴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살펴볼 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은 기다려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7명의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낸 자는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나는 물고기를 잡으로 가노라” 하고 베드로가 말하자 다른 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지친 몸으로 새벽에 돌아오는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최후 만찬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만난 여자들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가요?
우리는 먼저 갈릴리에서 왜 만나자고 하셨는가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의 연약함을 모두 다 아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를 부인할 것과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3년 반 동안 따라다녔던 그들의 신앙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처음 만났던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갈릴리 바닷가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제자들의 신앙이 왜 이리 연약하였습니까? 1년도 아니고 3년 동안 예수와 동거동락하고 수많은 기적을 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가 눈 앞에서 비참하게 떠나자 예수에 대한 모든 믿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왜 이리 연약합니까? 그것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 어떤 기적을 체험했다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 신앙은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함을 깨닫고 갈릴리로 제자들을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사랑을 잊어버렸다면 우리 또한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이 내 안에 뜨겁게 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에베소 교회에 예수님은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4-5)
성도 여러분 ! 일곱 번째 부활의 모습으로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시죠?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은 믿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거의 날마다 자살자들의 뉴스가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율 1위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자살 수는 하루 35명 한달에 1,050명 1년에 13,000명 정도가 자살로 세상을 끝내고 있습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자살하지만 자살 시도는 여자가 3배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청소년들 10명 중 6명이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까지 생겨서 젊은 사람들의 자살을 부추키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살다보면 낙심되고 좌절하고 실망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프랑스에 유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환자 한 분이 찾아와서 “선생님 저는 도대체 생의 기쁨이 없고 진정한 웃음을 웃어보려고 해도 웃어지지를 아니하니 이 병 좀 고쳐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자 의사는 “세상에 이런 병을 의사가 어떻게 고칩니까? 그런 병은 고칠 수 없습니깐 여행이나 다니시면서 복잡한 생각을 잊어버려 보십시오” 환자는 “저는 세계 일주를 무려 세 번이나 했습니다”
의사가 “그러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저 영국에 가면 챨리 채플린 이라는 유명한 희극배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출연하는 극장에 한 달만 쫓아다니면서 웃으면 그 병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환자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선생님 답답합니다. 제가 바로 그 챨리 채플린입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어떤 먹구름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낙심하고 좌절 속에 앉아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는 다른 차이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에서 좌우됩니다. 모든 인생이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아니한 자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특히 휼륭한 인물들은 모두 실패를 뼈저리게 겪어 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자들과 다른 점은 실패 속에서 주저앉아 좌절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 총장은 외무부 차관 시절 공직에서 갑자기 물러나게 되었을 때 좌절하지 아니하고 당시 현재 국무총리였던 한승주 총리가 유엔 총회의장으로 있을 때 반기문을 의장 비서실장을 하며 유엔에서 얼굴을 읽히게 된 것이 오늘날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녀가 말을 알아들을 정도 나이가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자녀를 냉정하게 대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녀에게 실패와 낙심에 대해서 미리 가르쳐 주고자 하는 교육 차원에서 그렇게 일부러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낙심과 좌절은 절대 금물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능치 못하시는 그 분의 손이 나를 항상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고 쓰러지더라도 또 일어서는 칠전팔기의 오뚜기 신앙을 가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
(요21:5-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 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날 때도 오늘 본문과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그 날도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는데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고 다른 배까지도 고기를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장과 오늘 본문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5장에서는 깊은 데로 가자고 하였지만 오늘 본문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를 몰라보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큰 고기가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 중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이시란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잡아온 생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닷가에서 아침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예수님이 손수 아침을 준비하고 같이 식사를 할 때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기적을 보여주시고 표적을 보여주신 것은 오직 예수를 확실히 알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기적을 보여주신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오직 예수로 열매 맺지 아니하면 그 기적은 곧 사단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이 한가지만이라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다면 영의 세계를 분명하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예언대로 많은 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예수 이름으로 주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삶이 오직 예수를 위한 삶인가? 아닌가? 만 살핀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로 악한 영에 잡힌 자는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예수를 위해 살지도 못합니다. 악한 영들은 절대로 예수를 위해 살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 스스로 영광을 받도록 미혹합니다. 미혹 된 자는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고 자신의 이름이 높임받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그들이 이제 앞으로 오직 예수를 위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왜 구원하여 주었습니까? 나를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의 종으로 택하셨습니까?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왜 치료하시고 살려주셨습니까? 오직 예수를 위해 살기 위함입니다. 나를 왜 고난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를 위해 살아가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할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린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홍해 바다를 가르신 기적을 보이시고 철벽성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하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하신 기적을 보이신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안타깝게도 저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살지 못한 저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 받았고, 남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고 북이스라엘보다 더 비참하게 멸망 받았습니다.
신약 때에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습니까? 왜 보여주었습니까?
오직 예수를 위해 살아가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저 유대인들은 표적만 보았지 예수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들의 악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은 다시는 표적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오늘날도 표적을 쫓는 자들은 표적만 바라보지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신 것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세 번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
(요21:15-18)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식사를 다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이것은 곧 베드로의 신앙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지도력을 모든 제자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 제자들이 주의 일을 하는데 필수적인 것 하나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필수적인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세상 사람들 입에 흔하게 오르내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의도적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깨달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천한 어부에서, 천한 집 아들이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 시몬에서 베드로가 되었지만 그는 예수님이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직함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다시 새롭게 사명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또한 누구들이었습니까? 마귀의 자녀들로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들인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주의 종이라는 직함을 받았습니다. 이 이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세 가지 질문은 각기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 자신과 이들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는 제자들일수도 있고 베드로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 주위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아가페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새로운 종류의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 사랑이 곧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원수까지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만이 나오는 아무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필레오로 즉 형제의 사랑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베드로는 이번에도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하고 필레오로 대답하였습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인간적인 차원의 사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진실로 내가 주님을 필레오 사랑합니다”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사랑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아가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6-10)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아가페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네 가지 의미를 가진 사랑이 있습니다. 스톨케라는 부모의 사랑, 필레오인 친구의 사랑, 에로스인 연인들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을 제외한 모든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지만 그 스톨케 사랑 속에도 안보이는 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세 가지 사랑은 모두 영원한 사랑이 아니고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적인 사랑들이 온전히 승화할 수 있는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필레오 사랑하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필레오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레오 사랑으로는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필레오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양을 돌볼 수 없으므로 아가페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순애보 사랑으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정한 아가페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곧 그러한 아가페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그러한 아가페 사랑을 받은 자들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들의 신앙도 미지근한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많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자는 사랑을 많이 받은 자만이 가능하듯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범죄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이렇게 된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문제점은 그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범죄는 총 범죄 중 36%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영적 세계도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땅에 영적 범죄가 끝을 모르고 무섭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 영적 범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저 악한 세상을 녹여버리는 역사가 우리 안에 불 같이 타오르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로 갈릴리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전에 보이셨던 기적을 다시 보이시며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고 치라는 막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절대로 각자에게 작은 사명일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을 잡기를 원하시면 절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일어서서 이제 진정한 사랑을 예수께로부터 받아서 저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전해지는 곳에는 그 어떤 악한 세력도 머무를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자고 내미시는 예수님 손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손이 우리를 강하게 담대하게 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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