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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부활신앙의 부활! (행 5:33-42)

by 【고동엽】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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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부활! (행 5:33-42)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뛰 어난 명작이라고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탠버그 의 십
자가'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도 그림 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그림 이 그려지
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가 일화로 전해지고 있 어서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해줍니 다. 스탠버그라고 하는 유명 한 화가가 성 베드로성당 위 고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는 성당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조
심스럽 게 그려갑니다만은 얼마동안 그리다가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생각
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불만 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림 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그는 다른 그림을 또 그렸습니다. 집시 페피타라고 하는 모델을 놓고 그는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나체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쉬게 될 때, 이 모델 페피타 라고 하는 여인이, 초안만 만 들어놓고 완성하지
않은 그림 을 보면서
"저 그림은 무엇이 에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 는 모습이군요."

"그렇습니 다."
"무슨 사연입니까?"
교 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한 집시여인의 질문입니다. 좀 귀찮지만 설 명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통속적인 성경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예수 님은 베들
레헴에서 오셨고 이 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고 착 한 일 많이 하시다가 십자가 에 돌아가시
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이 페피 타는 그 십자가에 대한 이야 기를 들으면서 그
냥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 면서 슬퍼합니다. 너무너무 슬퍼하니까 화가인 스탠
버그 는 그 우는 집시여인을 위로 할 마음으로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가 다시 부활하셨으니
까 울지 마세요."
그랬더니 눈을 번뜩 뜨면서
"정말로 부활 하셨습 니까?"
이 여인의 얼굴이 다 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에 요. 그렇게 기쁜 낯을 하는 것이에요. 이걸
보는 순간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인에게 예수는 만백
성을 위 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 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생명 력을 얻는데 내가 정말 예수 의 부활을 믿고 있느냐? 정 말 내가 부활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정말 믿는 것인가?' 하 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았 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다시 부활
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 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 게 준다
고 흥정을 하고 있어? 이 나쁜놈아.....'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꼈어요. 감사한 마 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하 고 부활신앙을 부활시켜서 그 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 서 '스탠버그의 십자가' 이 그 림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에 전해지고 있습니 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 교...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 이것은 신비입 니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 지 신비입니다. 신비라는 것 이 뭐냐하면 사실은 사실이로 되 우리의
지식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을 때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또 때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대로 알거나 모르거
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내가 믿 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
러분 내가 안 믿는다고 사 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되겠습 니까? 내가 모른다고 해서 있는 사
실이 없는 사실로 되 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 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 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로 존 재합니다. 엄연히 존재합니 다. 보세요 이해 못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예수께 서 십자가를 지셨느냐?' 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 수께서 왜 죽으신 것입
니까?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빌라 도까지도 그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 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 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 하
지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해할 것도 같고, 어떤 때에 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바 로 이
것입니다. 자, 보세요 병자를 고쳤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오천명 을 먹였습니
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 능력 많으 신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 합 니까? 십자가 밑에
서 소리지 르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서 내 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
그러나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 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아니하
시고 침묵하고 조용히 그리고 비참하게 무능한 자처럼 죄인 처럼 죽어갔느냐는 것입니까?
이 십자가 사건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때로 우 리는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합
니다. 주고 싶은 것도 못 줍니다. 몰라서 우리는 어리석어 지지만 예수께서는 능력도 계시고
할 수 있는데 왜 안 했을까요? 오늘도 우 리는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러나
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지 않습니 다. 거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예수께 서는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 인데 왜 십자가에 죽으셨느 냐?' 는
겁니다. 그것이 신비 요. 또 하나는 '그렇게도 비 참하게 죽으신 예수께서 어떻 게 부활했느
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비, 참으로 이해하 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 서 성경에 볼 것
같으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다고 하는데 만나 보았기 에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불구하고 유독히 도마는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에 요..."
아주 고집도 셉니다. 모두가 다 예수를 만나 보았 다 해도
"아니에요. 나는 눈 으로 보아서는 못 믿겠습니 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못
자국이 있는 그 손을 내가 만져 보고야 믿겠 노라. 눈으로는 못 믿겠다. 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으니 까..."
고집을 부립니다. 그 럴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얘기
입니까?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께서 다 시 살아났다니 도대체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여기에 두 번째 신비가 있고 요. 세 번째 숨겨진 신비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를 만 나 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가 부활 하셔서 자기 앞에 나왔습
니 다.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 이면서
"자, 믿는 자가 되라.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 는 자가 되라."
고 말씀하십 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 습니다.
"주는 참으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부 활하신 예수를 확실하게 만나 보고 믿게 됐는데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 까? 그 예수를 버리고.. 이 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에요. 그 놀라운, 신비로운 사건이 눈앞에 있는데 특별히 성경 얘기를 보면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 라."
그러니까 그 다음 사람 들
"나도! 나도! 나도! 나 도!...."
일곱 사람이 따라갑 니다. 따라가는 모습을 가만 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 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만 나 보았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습 니다. 그러나 저들은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 점이 납득이 안가요. 또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옛날 직업으로 돌 아갔던 사
람들이 다시 생각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 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 하면서 예루
살렘으로 모여들 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됩 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 이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됩니 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의 증인이란
순 교자를 의미합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증거하려면 내 가 아깝지 않게 죽을 수 있어 야
합니다. 죽음의 선을 훌 쩍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순교자 만이 진정
한 의미에서 부활의 증인입니다. 자, 여기에 신비 가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신비를 한평
생 풀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이 어떤 때에는 이해 될 것도 같고,
어느 때 에는 이해되지 않고, 어느 때 에는 믿어지고, 어느 때에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한평
생 풀어 가는 신비의 수수께끼입 니다. 여러분, 부활절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
다. 그 다음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 다. 이 부활절과 오순절은 신학적으
로 아주 중요한 의미 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절 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 건이고, 오순
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속,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사건입니 다. 그래서 부활절
이 없는 오순절을 생각한다면 이건 단 순한 신비주의 운동에 불과합 니다. 주관적인 것입니
다. 오순절 없는 부활주일을 생각 한다면 그것은 이성주의에 불 과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
건을 인정하는 지식에 불과합 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 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합 쳐질
때 이것을 '부활신앙'이 라고 합니다. 부활사건과 부 활신앙은 같은 것이 아닙니 다. 내 속
에서 확실한 부활 신앙으로 부활 될 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이에 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 다. 사도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 아 닙니까? 아주 초라하
기 그지 없는 사람이지요. 부끄러웠 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까? 어떻
게 해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 다.
성경은 여기 저기 이 사실 을 증거해줍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 님의
생애에 동참했다는 겁니 다.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 의 전도생활에 3년 동안 같이 합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모르는 얘기가 많았겠지요.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 고.. 여하튼 예수
님과 함께 3 년 동안 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 서 이러한 사람들로
키워낸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적 오 리엔테이션을 받은 것이에요.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
니 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 3년 동안 함께 했다는 것! 그 다음에는 부활사건에 대한 확 실
한 믿음을 가지게 됐다는 겁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났 다는 사실이 너무 중요한 것 입니다.
다 믿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님을 만난 그 감격, 그 사건 은 그들의 마
음속에 깊이 뿌 리박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 한 것입니다.
'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기독교 잡지에 편집장이 였던 마티목사라고 하는 분이 젊었
을 때 교회 주일학교 3학 년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활절 때입니다. 아이들에 게 부활신
앙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빈 상자 하나씩을 주 면서 모두에게
"새 생명을 담 아 오너라."
했답니다. 그랬 더니 어떤 아이는 가만히 생 각하다가 거기에 계란을 하나 넣어오고, 어떤
아이는 꽃을 넣어오고, 어떤 아이는 나비 를, 어떤 아이는 종자를.. 이 런 것들을 다 넣어 가
지고 와 서 자기 나름대로
"이것이 새 생명입니다."
라고 가지고 왔 더랍니다. 그런데 스티브 라 고 하는 아이 하나는 상자를 열어 보니까 빈
상자에요.
"너는 어째서 아무 것도 가져 오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이 목사님이 젊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증명 할
증거가 있습니까? 생명은 오로지 생명으로만 증거 하는 것이에요. 생명은 여전히 신 비입니
다. 당신들의 생명이 지만 당신 스스로의 생명을 설명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 육체도 내가
설명을 못합니 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생 명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부 활은 예수그리스도의
사건, 그 하나 뿐입니다. 어느 것 도 비유가 될 수 없고, 어느 것도 비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놀라운 생명은 부활생명일 뿐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비 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거
란 말입니다. 여러분, 오 늘도 그렇습니다. 부활사건 은 역사 한가운데 딱 한번 있 는 사건
입니다. 쓸데없는 논 리를 추구할 것도 없고 잔머 리를 굴릴 필요도 없습니다. 부활생명은
그대로 생명일 뿐 이니까요. 모든 증명, 과학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 다. 또 하나는
그 십자가 사 건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것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 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 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 은 내가 부활한다는 것입니 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내 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부활이요.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는 첫 열매 가 되셨다."
생명의 세계로 문을 연 것입니다. 신학자의 용어를 빌리면 문을 연 것입 니다. 새로운 생명
의 시작입 니다. 그의 부활이 나의 부 활이요. 이것을 믿게 될 때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용
기 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사 도행전입니다. 여러분, 로마 를 방문하십니까? 로마를 방 문
할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카타쿰'입니다. 저는 고
향 생각을 해서 우리 고향에는 산에 굴이 많아요. 어렸을 때 굴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해
고생도 하고... 굴이 많아서 그 생각을 했어 요. 산 속에 굴이 있어서 그 곳에 숨어서 예수
믿는 사람 들이 있었나보다. 전혀 그것 이 아니에요. 시내 한가운데 평지에 있을 뿐만 아니
라 자 연적인 굴이 아니라 인공적인 굴이에요. 사람들이 파 들어 간 것이에요. 그리고 역사
가 들의 설명대로 보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어요. 누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러나 그들은 그 카타쿰 속 에서 살았어요. 왜? 부활신 앙 때문이에요. 유무상통 했 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고 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집 잘 짓고, 옷 잘 입고, 권 세누리고...아무
소용없어요. 그들은 카타쿰 속에서 깨끗하 게 공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 다가 주님 앞에 가
기를 소원 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 아니고는 전혀 설명할 수 없 는 부분입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을 읽 어 나가면 사도들의 용기가 있고 유무상통하는 도덕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활 신앙으로만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계신 주 님을
믿었습니다.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 'Living Christ' 오늘 살아 계신 그리 스도의 생명력
을 지금 체험하 게 될 때 욕심은 사라졌습니 다. 세상 화려하게 살고 싶 은 생각도 없습니
다. 얼마의 시간을 살던 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주님 앞으로 가고 싶 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부활신 앙을 얻고, 부활신앙이 간간
히 어려움을 당할 때 다시 부 활신앙이 부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오 늘 성
경에 보면 성령이 충만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부활신앙이 다시 솟아나요. 또 하나는
핍박 속에서... 참 이상합니다. 평안할 때는 아 무래도 신앙이 약해집니다. 핍박을 받아야, 적
당하게 핍 박을 받아야 또 간간히 어려 운 핍박을 받아야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신앙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핍박 없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맥 빠진 것 이에요. 사도들이 핍박을 받
게 되니까 반 역동적으로 점 점 강해집니다. 환한 얼굴에 천사의 얼굴에 그 용기... 기 탄없
이 말을 하구요. 그 뿐 만 아니라 매를 맞고 죽어가 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누구 말을 들어야 옳으냐?"
큰 소 리칩니다. 이것은 핍박 속에 서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이것
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핍박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
다. 히틀러 때에 순교 하게 된 보네코라고 하는 목 사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마지막으
로 쓴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신앙에 대하여 확 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감옥
에 서 저는 기뻐하는 법을 배웠 습니다. 이 핍박 속에서 기 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시간 에도 말합니다.
"이로써 끝 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생 명의 시작이다."
핍박과 환난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의 생명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부활신앙이 부활되
게 되었습 니다. 또한 그렇게 확신하게 될 때 이적이 나타나게 됩니 다. 많은 이적이 나타납
니다. 베드로 앞에서 나면서부터 앉 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납니 다. 예수의 살아 계신 이름
이 살아 역사 하는 것을 보면 서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많 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제 야말로 부활신앙의 부활이 있 어야
할 단계입니다. 부활사 건에 대한 논리, 그 과학적 증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 다. 문제는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 확실해질 때 미래 가 보입니다. 종말이 보입니 다. 현재가 보입
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 는 것이 보입니다. 또
한 내 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환하게 보입니다. 부활신앙 의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이
아침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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