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사랑의 확증 <로마서 5장 5절-11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5-11)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그리스도인 된 사람으로서 항상 기억해야 될 귀한 사랑의 확증이 계시된 말씀입니다. 혹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듭니까?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번번이 실수를 하는데, 번번이 넘어지는데, 이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이런 의심이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읽으세요. 읽을 뿐 아니라 외우세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읽으세요. 그러면 분명히 주께서 우리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주실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뒤의 로마서 7장에 나타납니다마는, 보세요.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부르짖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합니다. 은혜를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은혜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25절에서 말씀합니다.
바울에 있어서 은혜란 오직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그 은혜의 핵심이 있고, 중심이 있고,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내용은 일반적이고도 전체적인 교리를 말씀해주는 동시에 구원론을 말씀하고 있지마는 여기에는 바울의 자기 간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가졌던 고민, 바울이 생각하는 은혜, 바울이 파악하는 자기존재,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매일매일 확증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전형-패러다임(paradigm)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말은 결코 추상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확증되어야 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는 정말 final proof of love--하나님의 사랑의 최종 증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아주 최종적인 것입니다. 또, 완전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종합해 말하자면 '창조적'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 헤매시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Create 하시는 것입니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창조적입니다.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고, 매력이 있으니까 사랑하고, 예쁘니까 사랑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고, 키워놓으면 앞으로 뭐가 될 것 같아서 사랑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창조적입니다. 사랑할만한 자로 만드시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부터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할만한 이유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셔요. 창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철두철미하게 주도적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initiative를 가지고 있어요. 그가 먼저 사랑하시는 것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받고서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은혜 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신앙이 율법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은혜적 관계에 있어야합니다. 당신께서 먼저 주도하신다는 것-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삶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보상은 은혜가 아니에요. 은혜는 보상이 아니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그가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무조건적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너무 조건이 많아요. 잘 사랑해나가다가도 어느 시간에 가면 삐딱해지거든요. 보답이 없다는 등 안 알아준다는 둥,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둥, 말이 많아요. 툭하면 낙심했다, 실망했다 하는데 그 실 참사랑에는 실망이란 없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할 때에 건강하다고 사랑하고, 병들었다고 버립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조그마한 그림자인 이 부모의 사랑도 그렇지 않아요. 병신자식 더 사랑해요.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건강하다고만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자녀 된 입장에서도 내가 부모님께 잘하니까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잘하든 못하든 사랑해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지요? 두 형제가 서로 다투었어요. 사실은 동생이 잘못했어요. 그런데 형이 동생을 나무라면서 하는 말인즉 "너, 그렇게 못되게 놀면 아버지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해요. 아버지 이름이 나오니까 동생은 형하고 싸우다가도 정신을 차렸어요. 정말 그런가? 내가 못되게 굴면 아버지께서 나를 미워하시는가?--이렇게 걱정을 하게 됐어요. 때마침 옆방에서 아버지가 이들의 얘기를 엿들었어요. 아버지는 두 아들 앞에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동생보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희들을 다 사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 있다. 너희들이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너희들이 못되게 굴면 슬픈 마음으로 사랑한다. 그것만 다르다. 그러나 사랑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둘째 놈이 뛰어나가면서 "그것 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이것이지요. '내가 못되게 굴지만 사랑하시는 건 틀림없다'-이거예요. 자신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무조건적입니다. 참사랑이란 조건이 없어요.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율법적 관계로 이해함입니다.
율법주의자로 전락함입니다. 은혜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또한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이에요. 어떤 상황에도 관계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에요.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미래적이에요. 그래서 멀리 보는 것입니다.
지금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더 먼 미래를 보고 사랑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요. 그 핏덩이를 낳아놓자마자 사랑해요. 갓 낳은 핏덩이가 뭐 예뻐요? 그렇지마는 오늘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낳아놓자마자 벌써 저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소원이 있어요.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그래서 이름을 붙여요. 기도를 해요. 그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래적이에요. 영원 지향적이에요. 이것이 사랑의 참 성격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이 사랑의 증거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가장 귀한 증거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가페의 증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가페(agape)적 사랑의 증거는 의롭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멀리서 의롭다 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칭하기 위하여 죄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 되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 되시고, 육체 입으시고,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거예요. 거기에 사랑의 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대신 죽으시는 것이지요. 대신 죄를 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실하게 증거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증거를 통해서 그 사랑의 본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의 증거를 통해서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의 증거를 바로 읽어야 합니다. understand, reading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거 읽을 줄 모르면 안돼요. 자, 보세요. 아무리 내가 사랑으로써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 게 사랑입니까? 어떻게 해야 사랑을 알겠습니까? 사랑의 증거를 보이고 싶은데 뭘 보여야 되겠습니까? 답답하지요. 나 나름으로 무슨 증거를 보였다고 합시다. 그러나 저쪽에서 이 증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어요. 그런고로 모름지기 사랑의 증거를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이해 능력이 있어야 돼요.
알겠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가장 큰사랑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바로 수용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생의 과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늘 쳐다봅니다. 이해하고 배우고, 십자가 찬송도 부릅니다. 십자가, 십자가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십자가의 참뜻은 마지막 임종할 때에나 똑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임종 맞는 분들에게 손에 쥐는 십자가를 하나씩 만들어 드립니다. 여러분은 아직 못 받았지요? 이제 받게 될 것입니다. 임종이 가까웠다 하면 딱 갖다드릴 것입니다. 구역장 아니면 목사님이 갖다드릴 것입니다. 손바닥에 딱 들어가는 십자가가 있어요.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새긴 것인데 임종 맞으면 이 십자가를 손에 딱 쥡니다. 보면 임종하는 분마다 이걸 놓치지 않습니다. 꽉 쥐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걸 펴기가 어려워요. 왜요? 말도 할 수가 없어요. 들리지도 않아요. 그러나 이거 하나 손에 있어요. 그 분에게는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반려자가 곁에 앉아 울어봐야 별 볼 일 없어요. 자식들 울어봐야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임종하는 이 시간에는 오직 십자가 하나밖에 없어요. 이것을 꽉 붙들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득히 담으면서, 느끼면서 요단강을 건너가는 거예요.
자, 이러한 이야기야말로 오늘도 우리가 시간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거든요.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확증 받고, 그 사랑의 증거를 내가 똑바로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라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지요. 대신 죽으신 거예요. 내가 죽을 것을 대신 죽으셨어요. 내가 죄인인데 그가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어요. 그가 죽으심으로 내가 살았어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대신 죽으셨어요. 내 책임을 지셨어요. 내 죄인 된 책임을 지셨어요. 내가 받을 저주를 그가 받으셨어요. 여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돈 보따리를 주시든지 수표 한 장을 주시든지 할 것이지, 또는 건강을 주시든지 해야 나를 사랑하시는 거지, 십자가 매달아놓고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니 참 답답하시기도 하네-이리 생각할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돈 보따리라든가 명예라든가 건강이라든가-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시시하고 너절한 얘기들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저것입니다. 그 속에 나를 의롭다 하심이 있어요. 내 죄를 사하심이 있어요. 내 죄를 사하심이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값을 지불하셨어요. 지불한 그 값이 십자가 안에 계시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죄와 사망과 사단, 율법과 진노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확증이 있습니다. 자, 그런고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사랑 받았느냐, 어떤 처지에서 사랑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의 원천적 의미입니다.
내가 사랑 받을 때, 어느 수준이 되어서 사랑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받은 사랑이, 또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랑의 성격을 바로 알아야 돼요. 사람이 참 간사해서 조금만 잘못되면 벌써 율법주의자가 되고, 자기자랑,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해요. 그래서는 '이렇기 때문에' 사랑 받았다는 거예요. '이렇기 때문에'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는 한 벌써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요.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사랑을 정말로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받는 사랑은 언제든지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언제나 없어요. 생각할수록 형편이 없어요. 그런데 사랑 받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사랑 받을 줄도 몰라요. 내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몰라요. 정말 구제불능이지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랑을 받았느냐-첫째,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이 시점이 문제입니다. 어느 수준에서 받았는고 하니 연약할 때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유치하다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유치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이해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무슨 사랑을 한다, 사랑을 준다 해보지만 사람이 몰라요. 알아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요. 유치하고 말입니다. 해서 '에라, 집어치워라'하게 됩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유치한 자가 받는 것이에요. 어린아이 같아야 받아요. 어린아이가 사랑 받아요. 어린아이가 사랑의 뜻을 아나요? 다 이해하는가요? 장차는 이해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몰라요. 아무리 여러분이 머리가 좋아도 네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네 살 이전에 받았어요. 그야말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고…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 엄청난 사랑을 받았는데, 이 사랑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어요. '내가 너 젖먹여 키웠다' 해봐야 헛것이에요. 기억이 없는걸요. 내가 젖 먹은 기억이 없는걸요. 혹 여러분 가운데 누가 젖먹은 기억이 있다면 다섯 살까지 먹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엄청난 사랑은 전부 유치한 때에 받은 것입니다. 모르고 받은 것입니다. 모르는 가운데 받았어요.
그 모르는 자를 사랑하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 알아주기 바라지 마세요. 유치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간혹 남편을 사랑하면서 못마땅하다고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원래 남자라는 것은 여자 앞에 네 살배기거든요. 그러한데 뭘 그렇게 다 알아주기 바랍니까? 네 살배기니까 그렇거니 하고 말일이지요. 이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유치할 때에, 모를 때에 받는 것입니다.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그 뜻을 몰랐어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물 대야를 가져다가 저들의 발을 씻기시는데, 이거 얼마나 중요합니까?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몇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귀중한, 요샛말로 말하면 세족례(洗足禮)를 행하신 거예요. 중요한 사건을 나타내시고 계셔요. 사건을 벌이고 계시며, 교훈하시고 계셔요. 그런데 저들이 몰라요. 알 리가 없지요. 그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하다가 낙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장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대로 투자하세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니까요. 정 모르면 나 죽은 다음에라도 알 것이니까요. 그냥 투자해버리세요. 그냥 바쳐버리고 마세요. 무조건 사랑해버리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래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효도는 무엇 하러 받겠다고 합니까? 자신도 효도 못한 주제에. 그렇지 않아요? 쓸데없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랑해버리세요.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나도 너를 사랑한다-이것으로 끝내고 마세요. 효도하느니 안 하느니, 자식 키워야 소용없다느니 뭐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느니 뭐니 하고 딴소리하지 마세요. 이게 다 유치한 소리입니다. 이게 다 사랑병 든 현상입니다. 그냥 사랑해버리고 마세요. 무슨 이유가 있어요? 유치한 걸 사랑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씀하지 않습니까? 연약할 아직도 내가 유치할 때에, 아무 것도 모를 때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어요. 기약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랑하셨어요. 내가 부족하다고 사랑 취소하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허물이 많다고 사랑 중단하시지 않으셨어요. 내 유치할 때에 사랑하셨어요. 아직도 미흡한,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사랑하셨어요. 그런 가운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아는 사랑을 사랑하라고 하지 마세요. 그래서 사랑에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랑, 내가 모르는 가운데 받은 사랑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저는 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에 가끔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제도 울산에서부터 차를 몰고 5시간 동안 올라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늘 차를 몰고 다니지만 사실 이것은 위험한 일이거든요. 손가락 하나 까딱 잘못하면 곤두박질하고 마는 거예요. 그렇지마는 무사했어요. 오늘까지 무사했어요. 수십 년 동안 무사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내가 잘해서입니까? 내가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우하심으로 무사하게 지나간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깜짝 놀라고 죽을뻔 한 것, 그것만 은혜입니까? 내가 모르는 중에 나타난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겠어요? 그런고로 내가 연약할 때에, 내가 무지할 때에, 그 때에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제 압니다.
이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말 그 사랑에 완전히 취할 수밖에 없어요. 전혀 할 말이 없어요.
또 하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이건 신분에 관한 문제입니다. 시점으로 보면 연약할 때, 유치할 때요, 신분으로 보면 죄인 되었을 때에 죄인으로 사랑을 받은 거예요. 의인으로 받은 사랑이 아니에요. 의롭기 때문에 받은 사랑이 아니에요. 죄인으로서 받은 거예요.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사랑을 받아요.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받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것이지요. 여러분, 내 의에 의해서 오늘 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여전히 죄인이에요. 사랑 받을만한 의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대로 죄인이에요. 아직도 죄인이에요. 그런데 사랑을 이미 받았어요. 죄인 된 가운데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것이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어떤 부잣집에 외아들이 있는데 이 녀석이 돈을 쓸 줄만 알았지 귀한 줄을 몰라요. 아버지한테서 돈을 타 가지고 나가서 자꾸 뿌리고 돌아다닙니다. "너, 그 돈 어디에다 쓰느냐?"하고 아버지가 물으니 "친구 사귑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래,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친구란 참 귀한 것이니라." 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어요. 아들은 돈을 많이 썼어요. 얼마 후에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보고 묻습니다. "친구 사귀었느냐?" "예"하고 아들은 대답합니다. "좋은 친구냐?" "좋지요." "진짜 친구냐?" "그럼요. 시험해보세요." 아들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좋다, 그렇다면"하고 아버지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았어요. 이것을 바베큐해가지고 가마니에 말아서는 지게에 실은 다음 "네가 이걸 지고 나와 같이 그 친구 집에 가보자. 친구집에 들어서거든 그 친구보고 '내가 그만 어쩌다가 실수해서 사람을 죽였네. 자, 이제 시체를 처리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고 말해라"-이렇게 일렀습니다.
아들은 지게를 지고 가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친구한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대번에 "아, 이 사람아, 자네가 죽여놓고 왜 나한테 가지고 들어왔어! 썩 물러가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차례로 다섯 친구에게 똑같이 해보았는데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받아주지를 않아요. 그래 "너는 돈 많이 써가면서 친구 사귀었다는데 어째 다 이렇니 하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번에는 내 친구한테 가보자." 그래서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아버지 친구한테 갔어요. 아버지는 똑같이 말했어요. "내가 어쩌다가 실수해서 그만 사람을 죽였네. 이제 이 시체를 치워야 되겠는데 좀 도와주겠나."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는 "그런가? 어서 들어오게나"하고 서슴없이 아버지를 맞아들입니다. 그래가지고 가마니를 벗기는데 돼지 바베큐라,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아버지와 그 친구는 온 집안 식구를 불러 가지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죄인 되었다고 버리면 사랑이 아니지요.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죄인 된 책임을 같이 지고 죄인 된 저주를 같이 당해야 돼요. 같이 당할 마음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을 사랑하심입니다.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거예요. 그 때에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이지요. 예수 믿은 다음부터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기 전 죄인 되었을 때, 아직도 죄인으로 있을 때, 그 때에 사랑하신 거예요. 하물며 오늘 내가 비록 의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예수 믿고 바로 살아보고자 애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시지 않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어요. 그 사랑이 확실해요. 오늘도 죄 중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 본문에 보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10절)"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이것은 바울의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경우가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영장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입니다. 참 극성스러운 사람이에요. 제가 거리를 생각해보았더니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그때에는 1주일을 가야 했어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1주일을 간다면 참 귀한 일이겠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살겠다고 도망간 것을 잡으러 간다고 거기까지 따라가던 악질이었어요. 보통 악질이 아니에요. 키가 작았다는데, 그래서 악질인지, 아무튼 그렇게까지 독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길에서 가로막으셨어요.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사울이 예수님 앞에 굴복 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거예요. 문자 그대로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사랑하셨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어요? 내가 조금 실수했다고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어요? 내가 넘어졌다고 버리실 분이에요? 내가 좀 지쳤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분이에요? 여러분, 잊지 마세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조금도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말씀해요. 내가 연약할 때에,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때에도 사랑하셨고, 그 때에도 나를 위해 죽으셨고, 십자가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그러므로 오늘 물론 사랑하시지요. 바울이 좀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복음 전하느라고 애쓰고 있잖아요? 동분서주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힘쓰고 있는데 Why not 사랑 아니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만만한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라도, 나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혹 흔들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의심이 있을 때마다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다시 한 번 십자가의 뜻을 읽으세요. 그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하세요.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생각하세요. 내가 유치할 때,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믿는 자가 혹이라도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든 다시 이 본문을 읽으세요.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보세요.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세요. 내가 어떤 때에 사랑을 받았나-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을 바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0, 11절)." 이 사랑을 확증 받은 사람은 오늘 즐거워해요. 이 사랑의 뜻을 아는 사람은 즐거워해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사랑을 받았다면 곧 즐거움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마찬가지예요. 그런고로 우리의 믿음은 곧 얼마나 즐거워하느냐로 평가된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왜 슬퍼해야 됩니까? 왜 걱정을 해야 됩니까? 사랑은 곧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행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벅찬 행복으로 나타나요. 어떤 경우라도 이 사랑만은 확증되고, 또 이 사랑으로 인한 행복만은 절대로 시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 (잠 16:16-20) (0) | 2024.03.19 |
---|---|
성실한 자의 복! (잠 28:10-20) (0) | 2024.03.19 |
감추어진 보화(마태복음 13:44) (0) | 2024.03.19 |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이사야 40장 1절 ∼ 8절 (0) | 2024.03.19 |
은혜의 사람! (고후 12:5-10)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