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6장20-25 / 너희 가난한 자여, 복이 있다!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1월8일(화)■
 
(누가복음 6장)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묵상/ 눅 6:20-25)
 
◆ 너희 가난한 자여!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는 헬라어로 '프토코스'인데 이 말은 웅크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프토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굽실거리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 한마디로 비굴한 거지를 의미한다. 상대적인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이다. 단순히 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한 빈곤이다. 부자 집 문 앞에서 빌어먹는 거지 나사로를 가리켜 이 단어를 썼다(눅 16:20).
 
사람은 언제 거지가 되는가?
돈이 하나도 없으면 거지가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존심이 있는 한 굶어 죽을지언정 절대로 거지 노릇은 안 한다.
 
사람이 거지가 되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부터다.
더는 자기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자기에 대해서 절대적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는 거지가 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거지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거지가 된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부자를 선망하고 독립적으로 일을 잘 해내는 것을 칭찬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말은 불편을 넘어서 모욕처럼 느껴진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란 결코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 가난한 자들이여'라고 하셨다. 제자 중에는 베드로나 야고보처럼 배를 가지고 있는 자산가들도 꽤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물질적이 아닌 영적인 의미다.
 
사람이 언제 구원받는가?
영적으로 절대적 빈곤을 느낄 때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 자인가를 깨달았을 때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인정했을 때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예수님을 만났다.
집은 가난했어도 마음만은 부자였다. 나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기도 했고, 힘센 아이 앞에서는 비겁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자존심은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자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다. 큰소리 내며 울었다. 과거의 무슨 죄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썩은 생선같이 냄새나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그날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체면을 다 버린 거지였다. 구걸하는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정직하게 나를 대한 날이었다.
 
그날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가 되어주셨다.
 
진정으로 영적인 거지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여전히 그런 말이 불편하다면 당신은 아직도 부자며, 진짜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거지는 무엇을 수행할 능력도 없다. 그냥 도와주어야 그나마 연명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아신다.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의 체면, 자존심은 쓰레기통에 버려라. 그런 것은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나 할 수 있는 겉치레일 뿐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솔직하고, 한없이 겸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정하시든 '옳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선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평소에 도도하고 자존심이 센 어느 여선생님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기도가 시작되자 갑자기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우는 모습은 전혀 평소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듯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정상이다. 그게 진정으로 가난해진 자의 모습이다. 그게 오히려 아름답다. 거지가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꼴불견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한없이 낮추는 게 비굴해 보인다고?
이 사람아, 당신이 아무리 낮춘들 아직 낮아진 게 아니다. 당신은 아직도 멀었다. 당신은 하나님도, 자신도 모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상상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하신 대단한 분이시다.
 
사람들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우울해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우울해한다. 더구나 배신당해본 사람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더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한다. 어떤 분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이 큰 죄책감으로 남았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고 산다. 마치 하나님을 부정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일종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토록 꽁꽁 쥐고 있는 자존심, 체면 모두 소용없다. 내려놓자.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그분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냥 주님 앞에서 '주님, 아시지요? 저를 아시지요? 제 마음 아시지요?'라고 하면 된다.
 
하나님, 저는 거지입니다라고 하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상하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냥 은총과 긍휼을 베푸실 뿐이다.
 
거지가 된 탕자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 15:22)
 
나는 거지로 나아왔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들로 받아주셨다.
 
 
◆ 지금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오늘 본문에 '지금'이란 단어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기회가 없을 것이다.
지금 회개하고,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야 하지,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상황이 좋아지면...하고 미루면 안된다.
 
지금 울지 않고 웃으면, 나중에 통곡할 것이다. 
지금 배고프지 않고 배부르면, 나중에 굶어 죽을 것이다. 
지금 주님께로 나아가자. 그분께 엎드리자. 
은혜가 임할 때 은혜를 받아야 하고, 구원의 날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받아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더욱 풍성하게 해주십시오.
제 언어를 진실하게 하시고, 아버지를 경외함과 사랑함이 더욱 굳건하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6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