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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표적과 믿음(요 4:43~54)

by 【고동엽】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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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믿음(4:4354)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고향인 갈릴리로 내려가시는 중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교만한 유대 사람들이 행하는 것처럼 사마리아 땅을 더럽게 여겨 피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마리아로 가셨고 또 사마리아 성에까지 들어가서 이틀을 유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상징으로 사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걸음걸이에서부터 그 분의 모든 행위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사마리아 여인과 우연히 만난 주님의 대화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 심령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든지 어디를 가든지 모두가 말씀에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뒤에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고향이라고 하는 곳을 넓게 보아서는 갈릴리요 좁게 보면 가버나움입니다. 어쨌든 고향으로 가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계셨습니다. 우리도 흔히 경험하지만,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기로 했으면 도착하기 전에 또는 만나기 전에 생각이 먼저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만나서는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되어질 일을 먼저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 도착하시기 전에 생각하며 하신 말씀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4)는 내용입니다. 상상하시기를 아마도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았지만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것을 미리 생각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구약에서도 여러번 나왔습니다.

그러면, 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그 분에 대해서 무엇인가 좀 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가령 부모님은 자기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큰 일을 하는 아들일지라도 어머니에게는 항상 어린애로 보이는 것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연세가 60이 넘어섰는데도 목사님의 어머님은 아들이 실수할까 하고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외출할 때는 반드시 한 말씀 하신답니다. "길 조심해라" 아직도 아들이 어리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기에 어떤 의미에선 자기 아들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로 아내들은 남편의 위대함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더 소중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고향도 이와 같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13:57, 마가복음 6:4, 누가복음 4:24 4복음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대단히 마음 아파하셨던 일인 것 같습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믿음을 가지길 원하셨지만 잘 되질 않았습니다. 이유는 공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그의 어머니가 여기 있지 않느냐, 형제들이 다 여기 있지 않느냐,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걸 배웠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이 조금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에 큰 방해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목사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교인들이 옛날 전도사 때 생각을 하고 있기에 권위 있게 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혜롭게도 해방 전에 북한에서 목회 하신 분들은 대부분이 이남 사람이요, 이남에서 목회 하신 분들은 대부분이 이북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드시 목사님들은 고향을 바꾸어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힘이 드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좀 안다는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것, 더 위대한 것, 꼭 알아야 될 것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있다가 무엇인가 하나가 들어가면 딱 닫아버리고 마는 조개껍질과도 같습니다. 일단 닫고 나면 다시는 열지 않는, 즉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안다는 것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지식이란 신앙에 많은 손해를 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아는 지식과 체험한 것을 절대화하는 과오가 있습니다.

흔히 어른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로써, 젊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나는 다 안다, 다 해보았다"는 등 과거의 자기 체험, 지식으로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십년 전에 경험한 것으로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이란 좋은 것이지만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빠지는 잘못이 있는 것이 흠이기도 합니다. 대개 나이가 많아지면 고집이 강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고향 사람들은 그 분의 어머니를 알고 형제를 알고 나이를 아는 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되고 그가 곧 말씀되는 것과, 예수님의 육친의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식의 상대성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은 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아는 것과 저 사람이 아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나는 나대로 옳고, 저 사람은 저대로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의 불완전함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진리란 없습니다. 어떤 중요한 원리도 바꾸어지고 변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의지가 약하고 지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서 실천력이 약합니다. 동시에 지식으로 교만하고, 감정까지 무디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어거 스틴이 말하기를 "내가 안다는 것은 아이들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 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 내가 아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겸손해야 내가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됩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전문화시대가 되어서 자기 전공 외에는 다른 세계를 잘 모릅니다.

언젠가 의학 전문잡지를 보니 현대 의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의학이 너무 전문화되어서 자기가 전공한 분야 이외의 것은 진찰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화된 세상에서는 나의 것 외에는 어차피 무식하게 되어 있으니 지식이 많은 자나 적은 자나 무식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지식에다 새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의 지식을 부정할 수 있는 용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풍토에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남이 가진 것만 좋게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이는 내 아이가 잘나 보이고 곡식은 남의 곡식이 잘되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가진 바, 자기 가까이에 있는 진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 박대 받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갈릴리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을 잘 영접했습니다. 영접한 이유는, 예수께서 전에도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 이적이 소중한 것을 몰랐다가 그들이(고향 사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서야 위대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 가까이 계실 때는 그 분에 대해 잘 몰랐다가 멀리 내놓고서야 위대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접하는 것입니다(4:45). 유감스럽게도 예루살렘에서 행한 것을 보고야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적이나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마리아 여인의 말대로 그녀의 과거를 알아서 말씀하셨다는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신앙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본문 46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가나에 이르시기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46-47). 아들의 병고침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5이나 누가복음 7:1 이하에도 백부장이 예수님께 자기 종(slave)의 병을 위해서 간구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과는 상황이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종에 대한 병이고, 또 하나는 왕의 산하의 아들에 대한 병입니다. 여기서 왕은 분명히 헤롯왕으로서 헤롯왕의 신하라면 아주 높은 귀족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지금 병에 걸렸는데 지체 높은 아버지는 자기의 체면, 위신 상관하지 않고 갈릴리 목수 청년에게 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필자는 625 전쟁시 육군병원에서 보조군목으로 잠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환자들에게 전도하며 느낀 바가 많습니다. 저는 항상 밤 10시경 병실을 둘러보곤 하는데, 부상을 많이 당하고 어려움이 큰 환자일수록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군목을 맞아줍니다. 그 당시 저는 신학교 1학년이었지만 환자들은 목사님, 목사님하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부상당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도박이나 하며 전도하는 것을 귓전으로 흘렸습니다. 심지어는, 거부와 비난까지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가야만 교만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 다. 본문에서도 귀족의 아들이 죽게까지 되었습니다. 이 정도에선 체면이나 위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단순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꼭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성적 판단은 필요없습니다. 단순한 마음과 겸손은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귀족이었지만 고난 앞에서는 천한 목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귀족이 가능하냐 아니냐고 비판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교회에 처음 나온 동기에 대해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처음 동기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만은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이제 방법이 없어 나왔고, 친구 따라 나왔고, 결혼하기 위해 나왔으며, 때로는 친한 사람이 하도 조르니까 산 사람 소원이나 들어준다고 나왔습니다. 순수한 동기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의 동기는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입니까? 병고치기 위해 나온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못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48)고 답답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동기가 좋지 않음을 아십니다.

또한 그 동기가 해결되면 딴소리 하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불순한 우리들의 동기를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왕의 신하도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사정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4:49). 불순한 동기였지만 주님은 나무라거나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5:22 이하에 보면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께서 이에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비록 개라고 할지라도 무엇을 먹어야 살 것 아닙니까 하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 역시 좋은 목적으로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도 단지 병을 고쳐보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어떤 신앙고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가 모두 바람직한 것들이 아니였습니다만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처음에는 일단 반 거절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동기가 좋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왕의 신하가 그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교만이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께 한 마디 항의라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왕의 신하인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오라면 와서 일단 손을 얹고 안수기도나 하시오"라고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오소서" 죽기 전에 와서 제발 좀 도와주시오 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4:50)고 오직 단 한 마디의 말씀만 하십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분명히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왔는데, 기도 한번 없이 살았다고 하시면 이제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참 어려운 시간입니다. 왕의 신하가 구한 것은 주님께서 내려오셔서 살려달라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았다니 믿어야 합니까, 안 믿어야 합니까? 필자의 경험을 외람되게 예수님의 일에 비해서 말씀 드리려니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듭니다. 흔히 우리들은 가족 중에 누가 병이 들어 입원하면 달려와서 "목사님 오셔서 기도 좀 해주세요"하고 부탁을 합니다. 저는 "여기서 기도할 테니 어서 가보세요"라고 말하면 아마 모르기는 해도 그냥 돌아서는 교인은 없습니다. 혹 돌아선 다 해도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섭섭해서 갈 것입니다. 병이 낫든, 안 낫든 무조건 따라가 주어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왕의 신하는 참 훌륭합니다. 처음 본 갈릴리 젊은 청년이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이 말을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을 믿고 가더니"(4:50 하반절) 그 말을 믿고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때에 믿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가자면 갈 것이지" 하며 예수님께 달려들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믿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훌륭한 믿음입니다. 멀리 있었어도 말씀의 능력을 믿었기에 살았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침을 땅에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장님은 지팡이를 짚고 실로암까지 갑니다. , 그가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당장 이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할 수도 있을텐데 멀리까지 가라고 하시나 하는 불평과, 장님의 눈도 눈인데 하필이면 흙을 바르다니, 또는 연못까지 가서도 눈을 뜨지 못한다면…… 등등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종해서 갔고, 씻으라 하셨으니 씻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다가 믿지 못하여 도중하차 하였다면 눈은 영영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도 아주 어려운 시간을 잘 견디었습니다. 믿고 가는 자세가 훌륭합니다. 사실 처음 예수님께 갈 때부터 체면을 버리고 갔으며, 표적과 기사없이는 믿지 아니한다는 예수님의 책망도 넘기기 어려운 고비였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은 가장 넘기 힘든 큰산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혹은 내 죄가 사해진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까? 무슨 표적이나 증거가 있어야 합니까? 죄를 사했다고 하시면 사함 받음을 믿고, 살았다고 하시면 살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가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라"고 하셨을 때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칩니까 하며 어떤 종류의 표식이나 마패라도 주시길 원합니까? 권능을 준다 하면 그 권능을 내가 받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주시겠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오늘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응답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종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당장 달라고 했을 때 내일 주겠다고 하면 계속 떼를 씁니다. 오늘 줄 수도 있지만 내일 준다고 했으면, 반드시 내일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고 사흘 후에 주겠다 하면 사흘 후에 되는 시간적인 개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 실패했든 성공했든 병들었든 건강했든,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면 그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의 소원은 당장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내려오셔서 거창하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방법을 거절하시고 당신의 방법으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지 아니한 시간, 내가 생각지 아니한 방법으로 응답받을 줄 아는 믿음,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아들이 살아있었으므로, 살아났던 그 시간을 물어보니 제 7시쯤이었습니다(4:52). 7시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때였으므로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갈 때의 믿음과, 지금 온 집이 다 믿었다는 믿음은 조금 다릅니다. 처음 믿음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의지적 믿음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여 믿습니다" 하는 무조건적인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정말 아들이 낳은 것을 보고,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믿은, 지식을 겸한 신앙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알고도 믿고, 모르고도 순종하며 믿습니다. 모르고도 믿고 나가면, 다음에는 그것이 확실해지고 사실이 사실되어 합리적으로 이해하면서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겸비된 완전한 믿음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처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으며, 지금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한번 뒤돌아봅시다. 왕의 신하는 믿음이 점점 발전해서 마지막에는 완전한 믿음에 도달했습니다.  

표적과 믿음(4:4354)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고향인 갈릴리로 내려가시는 중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교만한 유대 사람들이 행하는 것처럼 사마리아 땅을 더럽게 여겨 피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마리아로 가셨고 또 사마리아 성에까지 들어가서 이틀을 유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상징으로 사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걸음걸이에서부터 그 분의 모든 행위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사마리아 여인과 우연히 만난 주님의 대화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 심령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든지 어디를 가든지 모두가 말씀에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십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뒤에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고향이라고 하는 곳을 넓게 보아서는 갈릴리요 좁게 보면 가버나움입니다. 어쨌든 고향으로 가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계셨습니다. 우리도 흔히 경험하지만,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기로 했으면 도착하기 전에 또는 만나기 전에 생각이 먼저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만나서는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되어질 일을 먼저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 도착하시기 전에 생각하며 하신 말씀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4)는 내용입니다. 상상하시기를 아마도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았지만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것을 미리 생각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구약에서도 여러번 나왔습니다.

그러면, 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그 분에 대해서 무엇인가 좀 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가령 부모님은 자기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큰 일을 하는 아들일지라도 어머니에게는 항상 어린애로 보이는 것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연세가 60이 넘어섰는데도 목사님의 어머님은 아들이 실수할까 하고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외출할 때는 반드시 한 말씀 하신답니다. "길 조심해라" 아직도 아들이 어리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기에 어떤 의미에선 자기 아들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로 아내들은 남편의 위대함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더 소중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고향도 이와 같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13:57, 마가복음 6:4, 누가복음 4:24 4복음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대단히 마음 아파하셨던 일인 것 같습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믿음을 가지길 원하셨지만 잘 되질 않았습니다. 이유는 공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그의 어머니가 여기 있지 않느냐, 형제들이 다 여기 있지 않느냐,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걸 배웠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이 조금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에 큰 방해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목사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교인들이 옛날 전도사 때 생각을 하고 있기에 권위 있게 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혜롭게도 해방 전에 북한에서 목회 하신 분들은 대부분이 이남 사람이요, 이남에서 목회 하신 분들은 대부분이 이북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드시 목사님들은 고향을 바꾸어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힘이 드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좀 안다는 것 때문에 더 중요한 것, 더 위대한 것, 꼭 알아야 될 것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조개가 입을 열고 있다가 무엇인가 하나가 들어가면 딱 닫아버리고 마는 조개껍질과도 같습니다. 일단 닫고 나면 다시는 열지 않는, 즉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안다는 것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지식이란 신앙에 많은 손해를 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아는 지식과 체험한 것을 절대화하는 과오가 있습니다.

흔히 어른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로써, 젊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나는 다 안다, 다 해보았다"는 등 과거의 자기 체험, 지식으로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십년 전에 경험한 것으로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이란 좋은 것이지만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빠지는 잘못이 있는 것이 흠이기도 합니다. 대개 나이가 많아지면 고집이 강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고향 사람들은 그 분의 어머니를 알고 형제를 알고 나이를 아는 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되고 그가 곧 말씀되는 것과, 예수님의 육친의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에 대해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식의 상대성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은 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아는 것과 저 사람이 아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나는 나대로 옳고, 저 사람은 저대로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의 불완전함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진리란 없습니다. 어떤 중요한 원리도 바꾸어지고 변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의지가 약하고 지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서 실천력이 약합니다. 동시에 지식으로 교만하고, 감정까지 무디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어거 스틴이 말하기를 "내가 안다는 것은 아이들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 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 내가 아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겸손해야 내가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됩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전문화시대가 되어서 자기 전공 외에는 다른 세계를 잘 모릅니다.

언젠가 의학 전문잡지를 보니 현대 의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의학이 너무 전문화되어서 자기가 전공한 분야 이외의 것은 진찰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화된 세상에서는 나의 것 외에는 어차피 무식하게 되어 있으니 지식이 많은 자나 적은 자나 무식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지식에다 새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의 지식을 부정할 수 있는 용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풍토에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남이 가진 것만 좋게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이는 내 아이가 잘나 보이고 곡식은 남의 곡식이 잘되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가진 바, 자기 가까이에 있는 진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 박대 받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시면서 갈릴리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을 잘 영접했습니다. 영접한 이유는, 예수께서 전에도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 이적이 소중한 것을 몰랐다가 그들이(고향 사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서야 위대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 가까이 계실 때는 그 분에 대해 잘 몰랐다가 멀리 내놓고서야 위대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접하는 것입니다(4:45). 유감스럽게도 예루살렘에서 행한 것을 보고야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적이나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마리아 여인의 말대로 그녀의 과거를 알아서 말씀하셨다는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신앙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본문 46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가나에 이르시기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46-47). 아들의 병고침을 위해 예수님께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5이나 누가복음 7:1 이하에도 백부장이 예수님께 자기 종(slave)의 병을 위해서 간구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과는 상황이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종에 대한 병이고, 또 하나는 왕의 산하의 아들에 대한 병입니다. 여기서 왕은 분명히 헤롯왕으로서 헤롯왕의 신하라면 아주 높은 귀족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지금 병에 걸렸는데 지체 높은 아버지는 자기의 체면, 위신 상관하지 않고 갈릴리 목수 청년에게 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필자는 625 전쟁시 육군병원에서 보조군목으로 잠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환자들에게 전도하며 느낀 바가 많습니다. 저는 항상 밤 10시경 병실을 둘러보곤 하는데, 부상을 많이 당하고 어려움이 큰 환자일수록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군목을 맞아줍니다. 그 당시 저는 신학교 1학년이었지만 환자들은 목사님, 목사님하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부상당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도박이나 하며 전도하는 것을 귓전으로 흘렸습니다. 심지어는, 거부와 비난까지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가야만 교만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 다. 본문에서도 귀족의 아들이 죽게까지 되었습니다. 이 정도에선 체면이나 위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단순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꼭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성적 판단은 필요없습니다. 단순한 마음과 겸손은 고난이 주는 선물입니다. 귀족이었지만 고난 앞에서는 천한 목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귀족이 가능하냐 아니냐고 비판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교회에 처음 나온 동기에 대해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처음 동기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만은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이제 방법이 없어 나왔고, 친구 따라 나왔고, 결혼하기 위해 나왔으며, 때로는 친한 사람이 하도 조르니까 산 사람 소원이나 들어준다고 나왔습니다. 순수한 동기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의 동기는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것입니까? 병고치기 위해 나온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못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48)고 답답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동기가 좋지 않음을 아십니다.

또한 그 동기가 해결되면 딴소리 하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불순한 우리들의 동기를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왕의 신하도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사정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4:49). 불순한 동기였지만 주님은 나무라거나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5:22 이하에 보면 가나안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께서 이에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비록 개라고 할지라도 무엇을 먹어야 살 것 아닙니까 하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 역시 좋은 목적으로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도 단지 병을 고쳐보겠다는 생각뿐이었지, 어떤 신앙고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가 모두 바람직한 것들이 아니였습니다만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처음에는 일단 반 거절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아니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동기가 좋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왕의 신하가 그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교만이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께 한 마디 항의라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왕의 신하인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오라면 와서 일단 손을 얹고 안수기도나 하시오"라고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하는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오소서" 죽기 전에 와서 제발 좀 도와주시오 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4:50)고 오직 단 한 마디의 말씀만 하십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분명히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왔는데, 기도 한번 없이 살았다고 하시면 이제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참 어려운 시간입니다. 왕의 신하가 구한 것은 주님께서 내려오셔서 살려달라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았다니 믿어야 합니까, 안 믿어야 합니까? 필자의 경험을 외람되게 예수님의 일에 비해서 말씀 드리려니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듭니다. 흔히 우리들은 가족 중에 누가 병이 들어 입원하면 달려와서 "목사님 오셔서 기도 좀 해주세요"하고 부탁을 합니다. 저는 "여기서 기도할 테니 어서 가보세요"라고 말하면 아마 모르기는 해도 그냥 돌아서는 교인은 없습니다. 혹 돌아선 다 해도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섭섭해서 갈 것입니다. 병이 낫든, 안 낫든 무조건 따라가 주어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왕의 신하는 참 훌륭합니다. 처음 본 갈릴리 젊은 청년이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이 말을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을 믿고 가더니"(4:50 하반절) 그 말을 믿고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때에 믿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가자면 갈 것이지" 하며 예수님께 달려들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믿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훌륭한 믿음입니다. 멀리 있었어도 말씀의 능력을 믿었기에 살았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침을 땅에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장님은 지팡이를 짚고 실로암까지 갑니다. , 그가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당장 이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할 수도 있을텐데 멀리까지 가라고 하시나 하는 불평과, 장님의 눈도 눈인데 하필이면 흙을 바르다니, 또는 연못까지 가서도 눈을 뜨지 못한다면…… 등등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종해서 갔고, 씻으라 하셨으니 씻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다가 믿지 못하여 도중하차 하였다면 눈은 영영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의 신하도 아주 어려운 시간을 잘 견디었습니다. 믿고 가는 자세가 훌륭합니다. 사실 처음 예수님께 갈 때부터 체면을 버리고 갔으며, 표적과 기사없이는 믿지 아니한다는 예수님의 책망도 넘기기 어려운 고비였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은 가장 넘기 힘든 큰산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혹은 내 죄가 사해진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까? 무슨 표적이나 증거가 있어야 합니까? 죄를 사했다고 하시면 사함 받음을 믿고, 살았다고 하시면 살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가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라"고 하셨을 때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고칩니까 하며 어떤 종류의 표식이나 마패라도 주시길 원합니까? 권능을 준다 하면 그 권능을 내가 받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주시겠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오늘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응답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종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당장 달라고 했을 때 내일 주겠다고 하면 계속 떼를 씁니다. 오늘 줄 수도 있지만 내일 준다고 했으면, 반드시 내일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고 사흘 후에 주겠다 하면 사흘 후에 되는 시간적인 개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 실패했든 성공했든 병들었든 건강했든,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면 그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의 소원은 당장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내려오셔서 거창하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방법을 거절하시고 당신의 방법으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지 아니한 시간, 내가 생각지 아니한 방법으로 응답받을 줄 아는 믿음,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아들이 살아있었으므로, 살아났던 그 시간을 물어보니 제 7시쯤이었습니다(4:52). 7시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때였으므로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갈 때의 믿음과, 지금 온 집이 다 믿었다는 믿음은 조금 다릅니다. 처음 믿음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의지적 믿음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주여 믿습니다" 하는 무조건적인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정말 아들이 낳은 것을 보고,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믿은, 지식을 겸한 신앙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알고도 믿고, 모르고도 순종하며 믿습니다. 모르고도 믿고 나가면, 다음에는 그것이 확실해지고 사실이 사실되어 합리적으로 이해하면서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겸비된 완전한 믿음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처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으며, 지금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한번 뒤돌아봅시다. 왕의 신하는 믿음이 점점 발전해서 마지막에는 완전한 믿음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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