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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마음의 회복(시편 51편 1절~1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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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마음의 회복(시편 51110)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를 끝마치면서 다음 주일 설교를 예고했습니다. "설교의 주제는 '거짓말과 정직함'입니다. 성경말씀은 마가복음 17장이니 아무쪼록 읽어오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주일 설교 전에 본문을 읽어온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대부분의 교인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주제에 걸맞는 교인들입니다. 성경에 마가복음 17장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강렬하게 이것만은 꼭 이루어보겠다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 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는 것입니까? 더 좋은 집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입니까? 과연 여러분의 궁극적 소원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보다 최우선적이고 종말론적인 소원은 무엇입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은 나이가 들어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소원을 빌었다고 합니다. "주여, 제가 평생 소원해온 것으로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 소원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간구했습니다.

"허탄함과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게 하옵소서"라고. 여러분, 허탄한 마음 허황한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 된 것도 없으면서 된 척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데 굉장한 듯 꾸며대는 것---이것이 허탄한 마음이요, 허황된 마음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허망한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늘 허황한 생각을 하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짓말을 안하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은 말로 하는 것만이 거짓말이 아니요, 마음의 생각이 진실을 떠날 때에도 거짓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떠나면 거짓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여, 허탄하지 않게,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절하게 소원했던 것입니다.

한때 공산주의가 온세계를 뒤덮을 듯이 확산되자 사람들은 겁을 냈습니다. 온세계가 공산화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만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봄눈녹듯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뒤, 그 이유를 놓고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사회주의 국가는 하나같이 성실성이 없다는 것을 꼽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쉽게 합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거짓말이 죄가 되지도 않습니다. 이는 'The ends justify means.---결과는 방법을 정당화한다'라는 무서운 공산주의 이론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철학입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평등한 나라,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으며, 결과는 방법을 정당화하므로 거짓말해서 그 결과만 좋다면 얼마든지 거짓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체질화해버렸습니다.

모든 일에 성실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대화할 때에도 보면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고, 혼자서 하는 말과 둘이서 하는 말이 다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성실이 떠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회개란 정직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정직성에 대한 진단입니다. 거짓됨의 반성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일곱 편의 참회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말씀인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의 깊은 회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 그는 하나님과 직선관계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혼자서 후회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가서 잘못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라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로 인해서 남을 원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 잘못의 책임을, 그 원인을 결코 사회나 환경에 떠넘기지 않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대부분 다윗보다 밧세바에게 그 죄의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생각에 동조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 다윗은 유부남이자 왕이었습니다. 밧세바도 우리아라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부녀가 왕을 유혹하려고 벌건 대낮에 임금이 바라보는 데서 벌거벗고 목욕을 했으니 요사스러운 여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뿐아니라 왕의 초대를 받았을 때에 그녀는 다윗과 불륜의 관계까지 맺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면 그녀가 나빴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많은 시편, 그 많은 회개 중에 단 한번도 밧세바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날 내가 잠시 실수를 했습니다. 그날 술이 좀 과했습니다……"라는 구차한 변명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할 뿐 다른 말은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회개에 나타난 특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를 하다가도 내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여서 탈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다윗은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죄를 회개했습니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라고 회개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적으로 보면 결코 어머니가 부정한 관계에서 자기를 낳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죄인이므로 오늘의 사건이 우연한 사건이거나 돌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이러한 죄가 누적되어 오늘의 사건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말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1절로 5절은 회개를 말씀함이요, 6절로 12절은 새롭게 됨을 간구함입니다. 죄는 또다른 죄를 낳고 죄에서 다시 죄로 연결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다 해도 스스로 거듭 죄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죄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를 의미하는 '바라'는 창세기 1장에 거듭 나타나고 있는 말로 '천지를 창조하다'creation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세요. 그래야만 이제부터 바른 길을 갈 수 있겠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정직하려고 노력해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는 애시당초부터 정직을 잃어버리고 살았기에 정직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을 생각하고 산 사람은 정직과 진실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가장 귀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모든 문제가 진실에 걸려 있습니다.

다윗은 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성실을 잃어버리는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정직함의 회복을 소원했던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면서 더불어 정직성을 회복시켜주십사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바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팔백 번이나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여주신 별명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 종 다윗' '정직한 사람 다윗'--바로 '정직함'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여주신 별명이었습니다.

소년시절의 다윗은 참으로 정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했고 사람 앞에 정직했습니다. 자연과 자신의 임무 앞에 정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기에 담대했으며 항상 평화로웠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목자로서 양을 칠 때에 맹수가 어린 양을 물고가자 달려들어 맹수를 죽이고 어린 양을 되찾아오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별히 널리 알려진 골리앗 대장과의 싸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라고 소리치며 물맷돌을 내던지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이 역시 정직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윗은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하나님께서 항상 도와주실 것임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의 편이심을 믿었기에 늘 자신만만했습니다.

"나가 싸워서 전쟁의 승리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보여주리라"--다윗은 이토록 대단한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지닌 용기는 그의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군왕으로서 못할 말과 못할 짓을 많이 저지르게 됩니다. 보좌를 지키기 위하여 거짓되기도 하고, 말과 행위가 정치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소년시절의 정직함은 하나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부끄러워지고 약해지고 비겁해지고 두려워지고 마침내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인격의 파탄이 오는 것입니다. 몸도 병듭니다. 정직함은 자기 자신과의 다른 만남이요,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을 상실하면 존재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직한 만큼 자기 정체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행위가 거짓되다면 그의 인간, 그의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허깨비가 살아가는 것일 뿐, 지혜도 용기도 없습니다. 물론 행복도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존재의식이란 정직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정체가 곧 정직함입니다.

또한 정직이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평판, 인간 규례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남이 뭐라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그분께서만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진실을 아신다고 한다면 나에게는 좌우전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을 아신다는 것보다 더 큰 의지(依支)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직함이란 자기 자신에게 운명을 내거는 것입니다. 정직한 연후에 오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정직함으로 인하여 보는 손해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정직해서 다소 손해가 나더라도 정직함을 택하고 손해를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익을 보거나 출세하기 위하여 정직을 버리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 좀 벌어보려다가 진실을 잃고, 출세 좀 해보려다가 정직함을 내동댕이친다면 이제는 양심도 인격도 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름지기 정직과 진실이 최우선임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930년대에 미국은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고 급기야는 쓰레기통까지 뒤지는 거지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 때에 어떤 청년이 구두를 살 돈이 없어 중고 구두를 사고파는 구두수선 가게에서 한달 뒤에 갚기로 하고 외상으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그후 어렵게 돈을 장만하여 가게를 방문했더니 주인은 없고 부인이 앉아 있습니다.

"주인은 어디 가셨습니까?" "며칠전에 죽었습니다." 청년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돈 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길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구두와 그 주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밤새 고민을 합니다. 결국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아가 부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지만 아직 나와의 관계에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 구두값을 받으시오." 이렇게 돈을 주고나서야 비로소 그 청년은 자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가끔씩 마음아픈 일이 생깁니다. 특히나 시험 때에는 조금씩 커닝하는 학생들이 생깁니다. 그것을 보면 즉시 잡아 혼쭐을 내주고 싶지마는 그렇게 못합니다. 학교규정상 커닝한 학생은 퇴학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감아주게 됩니다. '1학년 때 하다가도 2학년이 되면 안하겠지. 3학년이 되면 그만두겠지'하고 참게 됩니다. 그러나 커닝한 그 학생은 늘 머리 속에 기억됩니다. 잊어버려지질 않아요.

그 뒤 그 청년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게 됩니다. 정말 십 년, 이십 년 후에 보면 형편없이 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저는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새삼새삼 깨닫곤 합니다.

어떤 국민학교 시험시간에 우등생이 시험답안을 잘 써나가다가 그만 마지막 한 문제를 못풀었습니다. 그것을 풀려고 애를 쓰는데 바로 옆에 앉은 학생이 자기 답안지를 슬쩍 보여줍니다. 쿡쿡 찌르고 애써 보여줍니다마는 이 학생은 일부러 안보려고 고개를 돌립니다. 이것을 선생님이 멀리서 못본 척하고는 다 지켜봅니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며 쳐다도 안보던 이 우등생이 마지막에는 정 생각이 안나던지 슬쩍 옆 학생의 답안지를 보고는 써버립 니다. 선생님은 '아이쿠, 저놈이 시험에 넘어갔구나'하고 속으로 안타까워합니다. 드디어 답안지를 제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 끝까지 기다렸다가 학생들이 다 내고 나간 다음 선생님 앞에 답안지를 내놓으면서 "선생님, 빵점 주세요"하고 웁니다. 그 선생님, 너무 대견스러워 "네가 마귀의 시험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너는 결국 시험에 이겼다"라며 아이를 붙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후 이 학생은 과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쉽게쉽게 잘 속아넘어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동댕이친 진실이 그대로 있는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진실은 없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의인이 되려는 것도 아니요, 왕위를 유지하려는 것도 아니요, 오래 살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 경제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지능은 있으나 정직함이 없습니다. 기술은 있으나 성실함이 없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교인들이 저에게 과일같은 것을 보내올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과일을 사오기도 하고 남이 예쁘게 포장해놓은 것을 사올 때도 있는데 포장을 열어보면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형편없습니다. 수출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기술이 없어서 무역이 안되는 것입니까? 수출을 해도 물건이 전부 반품되어 돌아옵니다. 이래가지고 무역이 될 것 같습니까? 온세계의 불신을 살 뿐입니다. 정직한 물건을 내놓아야 장사가 되지 눈가림만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실함을 잃어버리면 다 무너집니다. 나라도 망하고 인격도 끝납니다. 정직함이 없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재주는 좋으나 진실이 없습니다. 부지런함이 없습니다. 이러고도 무엇이 되기를 바랍니까?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정직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말은 세계를 반 바퀴 돈다'라고 말합니다. 정직하긴 하겠는데 오늘이 아니라 내일 정직하겠다고 미루는 것입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정직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발을 신는, 그 준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부터, 바로 여기부터, 바로 이 사건에서부터 정직할 것입니다. 정직은 내일로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은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정직함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보증하십니다. 정직함으로 손해보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벌충해주십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재물로 근심합니까? 실추된 명예 때문에 번민합니까? 나이 들고 건강을 잃었다고 고민합니까? 이 모두 언젠가는 없어질, 허망한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가장 귀한 소원은 정직함입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앞으로 며칠을 살더라도 정직한 생을 살게 하옵소서.' 모름지기 내 정직함의 현주소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더는 변명도 말고 누구를 원망도 맙시다. 잃었던 정직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이 최우선입니다. 모든 것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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