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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의 힘(사도행전 19:13~2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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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의 힘(사도행전 19:1320)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 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 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이미 보신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되어졌던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말로 복음을 전했다던가 어떻게 설교를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 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권세, 말씀의 능력, 말씀의 승리이런 것을 사건을 통하여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것만이 꼭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별히 몸에 와서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부로 느끼는, 피부로 부딪히는 이러한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본문의 내용은 곧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이것이 단순히 귀에 들려지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시간에 본 바와 같이 이적이 나타나면서 말씀이 전해지는 그 순간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면서 귀신이 내쫓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통해서라든가 일시에 많은 사람이 낫는 기적이 있었다던가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직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 전하는 바울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아주 크게 나타나면서, 심지어는 공간과 시간을 달리해서 바울이 현장에 못 가더라도 바울의 손수건을 갖다 얹어도 낫더라 합니다. 그 앞치마를 갖다 얹어도 귀신이 나가더라 합니다. 그런 사건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지명하시고 계심을 뜻합니다. 바울이 공부를 많이 했는지 안 했는지, 작았는지 컸는지, 인물이 못났는지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명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하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곧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말미에 공부한 것이 이것입니다.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귀로 듣는 것은 바울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바울의 음성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주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바로 이 같은 카리스마적 관계가 구원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요, 지혜가 아니요, 철학이 아니라 곧 능력인 것입니다. 가장 큰 능력은 그실 중생하는 능력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굳은 마음, 못된 마음 버리고 겸손하게 돌아와 마음이 깨어지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것이 기적입니다. 말씀의 능력 치고 가장 큰 능력이 이것인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런 것은 큰 능력이라고 생각할 줄 모르는 게 보통입니다. 여러분, 능력과 기적을 말할 때에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이야말로 천지창조보다도 더 큰 기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참 못돼먹었어요. 어떻게든 안 믿어보려고, 어떻게든 예수로부터 멀어지려고, 심지어는 예수 믿는 집에 태어나고 예수 믿는 자녀이면서 끝까지 안 믿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필경에는 꼼짝못하고 붙들려서 예수를 믿게 되는데 말입니다.

이적 중 가장 큰 이적이 내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런 것은 생각 못하고 사람들은 병 걸렸다가 낫는 것, 그런 것만 기적이라고 합니다.

병 걸렸다 낫는 것은 그실 별것 아닙니다. 병 걸렸다가 나았다고 꼭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꼭 그 심령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낫는 것이 뭐 대수입니까? 얼마 있다가 어차피 죽을 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병 낫는 것을 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을 보고 ', 신통하다! 귀신이 나갔구나. 귀신이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나갔구나'하고 이적으로 생각하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라야 흔히들 이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이적이란 그리 큰 이적이 아닙니다.

가장 큰 이적은 한 심령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받는 이적, 내적으로 영혼이 구원받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저러한 가시적 이적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 고침 받는 일, 귀신이 나가는 일, 그 같은 희한한 능력이 바울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문제가 되는 것이 마술사들이었습니다. 마술사들이 가만히 생각해본즉슨 바울의 '마술'이 저들의 마술하고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일반적으로 마술이라 하면 이것은 귀신놀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재능만 가지고, 남보다 머리가 좀더 잘 돌아서 사람의 눈을 속이는 짓입니다. 눈을 속여서 거짓을 진짜인 양보이게 하는 재능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굉장하다'합니다. 알고도 속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 시대라 그런 속임수를 보고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옛날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했거든.

1960년대에 제가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할 때, 뉴욕에서 세계박람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한국이 이만큼 잘살 때가 아니었거든요. 굉장합디다. 그런데 박람회 구경을 해나가다가 한쪽에 가니까 '과학으로 전도하는 곳이다'해요. 그리고 거기에 'Billy Graham Cru TeCsade Center'라고 써놓았어요. 그래서 '굉장하다. 어쨌든 내려가 보자.

내가 목사이니 이것부터 들어가 보아야지'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별것 없어요.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습디다. 제가 보기에는 절구통 만한 둥그런 통이 있는데 그 통 위에 한 남자가 수영할 때 입음직한 팬티만 입고 올라서 있어요. 손에는 한 1미터는 됨직한 장작개비를 딱 들었는데, 정신집중 하는 것처럼 하다가 ''하고 기합을 넣는데 꽝하고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그 순간 장작개비 끝에서 불이 일어나 생으로 불이 붙는 것이었습니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면서 하는 것이라면 홀딱 반하겠습디다. 그런데 그 사람 얘기인즉 그것은 과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 발 밑에 코일이 있었어요. 그 코일에 전기를 넣어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전달시켜서 불이 붙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한 일입니다 마는 인공적으로 천둥을 치고 번개가 번쩍번쩍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과학적으로 전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재능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미국에 갔던 길에 안내하는 사람이 "목사님, 이것은 꼭 보셔야 됩니다. 굉장한 것이니 꼭 보십시오"해서 굉장히 비싼 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시는 길이 있으면 보세요. 라스베이가스에 가면 거기에 '미라지 쇼'라는 것이 있어요. 보통 쇼는 아무리 비싸보았자 25불 정도 합니다. 그런데 이 쇼는 관람료가 80불입니다. 엄청나게 비싼 그 돈을 주고 들어가면 불과 2시간도 못되게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술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이지요. 커다란, 아주 잘생긴 호랑이를 갖다놓았어요. 상에다 올려놓았는데 ''하고 소리치니까 없어져요. 분명히 없어졌어요. 또다시 한참 있다가 ''하면 호랑이가 생겨요. 아무리 휘저어보아도 없었으니 분명히 없어졌던 호랑이인데 느닷없이 나타나요. 코끼리도 그렇게 하고……몇 가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과학이라는 점입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인데 우리 보통사람이 생각할 때에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기적 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렇듯 마술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 못하는 짓을 해서 속이는 짓입니다. 결국은 저 잘난 척하는 짓인 것입니다. 스스로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새는 이런 것을 볼 수 없습니다마는 옛날에는 이런 마술도 있었어요. 귀신을 힘입어서 귀신을 불러오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서, 귀신을 가지고 역사 하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 병신 만들기도 하고, 올라가 기도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깨끗하게도 하고…… 이런 엑소시즘(exorcism)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를 힘입어서 마귀를 내쫓기도 하고 마귀의 능력을 가지고 역사 하는 짓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술입니다. 문제는 이런 짓들을 할 때에 대체로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도 사람 눈속임을 하기 위해서 거창한 예식을 해요. 그래서 마술사는 이상한 옷을 입잖아요? 그 옷을 입어야 꼭 마술 되는 것이 아니예요. 눈속임을 하기 위해서 유달리 이상한 옷에 이상한 모자에 이상한 화장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눈속임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적을 사용합니다. 우리네도 가만히 보면 부적이 많지 않습니까? 돈 받고 부적을 팔아요. 이것을 가지고 다니면 병이 낫는다, 이것을 가지고 다니면 길 건너 갈 때에 무사하다…… 국민학교 1학년 선생님들이 조사해보니까 학생 중의 40%가 이런 부적을 가졌더랍니다. 부적 하나에 30만 원 짜리도 있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니, 이천 년 전은 오죽했겠어요? 장사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술을 보이고 희한한 짓을 하면 결국은 돈 버는 거예요. 일단은 굉장한 사람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그 다음에는 돈을 버는 거예요. 요새도 세계여행을 해보면 '이것 가지고 다니면 좋고, 이것 가지고 다니면 복 받고, 아이 낳고……' 하며 부적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또 고등 상술로서 '옛날의 부적인데 이것은 골동품입니다'하며 팔기도 합니다.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제 방에도 티베트사람이 사용하던 부적이 하나 있습니다.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수백 년 동안 쓰던 거예요. 어쨌든 이것을 통해서 장사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하나, exorcism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주문이나 주술입니다. 중얼중얼 모르는 소리로 무엇을 외웁니다. 저는 흉내를 못 내겠습니다만 탤런트들은 잘합디다. 뭐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아무튼 그런 이상한 말이 많이 있어요. 이런 말을 하면 병이 낫고, 이런 말을 하면 병에 걸리고…… 이런 것을 주문, 혹은 주술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비밀입니다. 자기만이 아는 거예요. 이 말을 꼭 해야만 하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자기만이 아는 비방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마술행위를 하는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누가 더 큰 마술을 하느냐, 누가 더 굉장한 마술을 하느냐, 누가 더 속임수가 아닌 진짜 마술을 하느냐이것을 진술이라고 합니다. 마술이 아닌 진술, 그런 희한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는데, 자기네들은 다 압니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는 것을 보니까 이것은 진짜거든요. 귀신 내쫓는 것도 진짜요, 병 고치는 것도 진짜입니다. 모두들 ', 참 희한하다'합니다. 이 사람들의 시각으로써는 바울도 마술사로 보는 거예요. 일단 마술사로 보고 나면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 사람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하느냐, 어떤 옷을 입고하느냐, 어떤 주문으로 하느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무슨 주술을 하고 무순 주문을 외었기에 저렇게 희한한 능력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바울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라고 말했다면 마술사들은 '맞다, 나사렛 예수라고 했으니까 귀신이 나갔구나, 만일에 예루살렘 예수라고 했으면 안나갔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했기 때문에 나갔구나!'라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이 말을 주문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만 하면 귀신이 나갈 게 아니냐 합니다. 또 바울이 한 것처럼 손짓하고, 바울이 한 것처럼 소리지르고, 그러면 될 것 아니냐합니다. 자기네들의 방법대로는 그도 그럴 것이 아니겠어요? 저 행사와 저 의식과 저 주문이면 저런 능력이 나타난다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처럼 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13)"'바울이 전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안나갔습니다. 분명히 예수의 이름으로 했는데 안나갔어요. 이 부분이 성경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었습니다만 여기에 조금 추가해본다면 아마도 비슷한말이란 말은 다 해봤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의 이름으로' 해보기도 하고,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해보기도 하고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기도 하고, 별것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안나갔어요. 뿐만 아니라 분명히 예수의 이름으로 명했는데도 귀신은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대꾸까지 합니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 그러고는 막 대들어 잡아뜯어요. 이에 저들이 얼마나 급했던지 상처를 입고, 옷도 홀랑 벗긴 채 도망을 갔습니다. 되게 센 귀신한테 걸렸던 것 같아요.

, 이렇게 혼이 나고,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퍼질 때에 그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결국은 유대사람과 헬라사람들, 에베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보던 것은 시원치 않은 마술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구나, 굉장하구나, 하며 놀랐습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모든 것이 나타나는구나,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를 믿게 되고,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었어요. 자기들의 잘못된 우상숭배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있었습니다. 마술사들의 비방을 적은 책주로 부적이나, 주술이나, 주문에 대한 것들인데 자기들 나름대로는 이렇게 하면 무슨 병이 낫고, 이렇게 하면 귀신이 나가고…… 등을 연구하여 적어놓은 책들이 당시에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또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책을 만들려면 인쇄기로 찍어내니까 다량으로 만들기 쉽지만 옛날에는 전부 사람 손으로 일일이 썼습니다. 그러니 책 한 권이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똑같은 또 한 권의 책을 만들려면 한 사람이 몇 년을 두고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죽이나 파피루스(papyrus)에 힘들여 쓴 것입니다. ,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이런 책을 많이 모아다놓고 불살랐다고 합니다. 불사른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합니다. 보십시오. 이렇듯 많은 값의 책을 불태워버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가짜다, 이것은 다시 믿을 것이 못된다, 다시는 이리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맹세이지요. 그 맹세와 함께 저들은 그 책들을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적을불 태운 것이지요. 우상과 불 신앙적인 과거 생활을 다 불태워버리고, 그리고 예수를 믿더라,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이적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예요. 특별히 바울 신앙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은 곧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능력으로 받아야 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말씀이든 설교말씀이든 우리는 말씀을 단순하게 감상적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내 심령에 와 부딪치면서 내가 중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고, 가치관이 변하고, 슬픔이 변해서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까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원수도 이기고,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중생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렇듯 중생하게 될 때, 영혼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에 여기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속 사람이 구원받는 상징으로, 속 사람이 구원받는 표징으로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귀신도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그 모습이 어떠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이나 그 얼굴 표정이 어떠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또 그것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예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분명히 빛이요, 능력이요, 권세이십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에, 그 분이 말씀하실 때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에는 환자가 누워있을 수가 없어요. 환자를 보면 다 고치셨으니까요. 장님은 다 눈을 떠야 했어요. 문둥병자는 깨끗해야 했어요.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나가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장난 삼아 이런 소리도 합니다. 예수님은 공동묘지를 지나가시면 안 된다나요. 왜요? 죽은 이들이 다 살아날 테니까. 저는 목사로서 때때로 장례식을 집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 못하지요. 그러나 한 가지, 우리는 해봤는데 예수님께서 못하신 것이 있어요. 장례식을 집례하지 못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살려내시고 말았으니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어둠이 있을 수가 없고, 악의 권세가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빛이 있다면 그대로 어둠은 물러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권세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 가운데 exorcism이 함께 따라갑니다. 그래서 이적은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에 대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러셀은 이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 힘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첫 번째로, 폭력이라든가, 탄압이라든가, 우리가 지금 물리적으로 느끼는 힘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경제적인 힘, 돈의 힘, 소득의 힘이 있습니다.

이에서 비롯되는 이해관계가 힘이 됩니다. 자연히 이에 끌리 수밖에 없지요. 세 번째로, 영향력 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적인 힘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식이 힘이요, 지혜가 힘이요, 좀더 나아가서 양심과 도덕이 힘이요, 궁극적으로 종교가 힘입니다. 믿음이라는 힘, 사랑이라는 힘…… 이런 것들이 다 영향력적인 힘이라고 범주를 구분한 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에 하나 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영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힘이라는 것이 뭔고 하니 power encounter힘의 대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에 힘이 아닌 것은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 앞에는 비 능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이 없어요. 이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힘의 논리라는 것은 하나가 살고 하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역사 하시는 그 왕국에는 악의 세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라는 그 큰 세력 속에 어둠의 권세가 머물러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이 말씀과 함께 역사 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말씀을 느끼십니까? 말씀을 믿습니까? 정말로 말씀의 능력을 바로 받아들이고, 내 속사람이 화끈하게 중생하는 그 시간에는 흔히들 '뜨거워진다'라고 말합니다. 뜨거워지는 그 순간에 병고 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 그 말씀 앞에, 그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 정신병자가 있을 수 없고, 귀신들린 사람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함께 하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혹시라도 주문이나 주술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술적 힘이 아니예요. 이것은 영적인 힘이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십니다. 제자들은 산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산밑에 있던 아홉 제자들은 며칠 전에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저마다 능력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기록해놓았으면 참 재미있을 뻔했어요. 어쨌든 아홉 제자가 무슨 일을 안 해봤겠습니까? 안드레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안나갔어요. 가만있다가 빌립이 '나사렛이란 말을 붙여서는 안되겠다' 싶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안나갔어요. 도마가 '이것, 잘못됐어'하고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라, 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별소리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끝내 안나갔어요. 결국 제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9:19)"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어서 귀신이 안나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주님께 여쭙니다. 왜 우리는 못 고쳤습니까?여기에 주()를 단다면, 며칠에는 고쳤는데 왜 오늘은 안됩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9:29)." 이것이 자기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어제는 그랬다 하더라도, 간밤에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너희는 산밑에서 잠이나 자고 잡담만 하고 있었지 않느냐, 그러다가 이제 와서 '나사렛 예수……'한다고 해서 그것이 될 일이냐 하심입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능력을 나타낼 수 없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시술자의 능력도 아니고, 주문의 능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시는 자를 통해서 친히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능력의 목적이 주의 말씀의 능력, 승리적인 능력을 증거하고 하시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대해야 됩니다. 온유 겸손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어느 유명한 화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젊은 화가가 미망인에게 와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붓을 다 제게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미망인은 어차피 남편은 죽었는데 붓을 두면 뭘 하나 싶어 선뜻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제자는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봐도 스승의 그림처럼 그려지지 않더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유명한 화가가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으로 내가 그린다고 해서 똑같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행하신 능력, 사도 바울이 행한 능력을 그 때에 하신 말씀 몇 마디, 의식 몇 가지를 그대로 한다고 해서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을 때에만 그 일이 가능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가 제대로 한마디합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결국 자기는 마귀요, 자기는 구원받지 못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저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천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귀는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가끔 보면 마귀가 제대로 전도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이런 경우가 한 번 있었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처녀 하나가 결혼을 하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중매를 안서 주시고 나는 부득불 시집을 가야겠고 하니 믿지 않는 사람한테라도 시집을 갈랍니다." 그 전에 나보고 중매 좀 서보라고 했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해주지 못했거든요. 그래 내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시집간다고 걱정을 했더니 "목사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몇 년 안에 남편을 꼭 예수 믿게 만들 거니까요. 작전을 잘 세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 어쨌든 그 처녀는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간 첫날부터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입니다. 신혼여행을 간 첫날에 신랑이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신부가 간데온데없습니다.

깜짝 놀라서 애태우고 있는데 신부가 들어옵니다. 어디 다녀오느냐고 물으니 교회에 갔다왔다고 합니다. 속이 상했지만 신랑은 딱히 뭐라고 나무랄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굉장히 무당을 섬기는 사람이었는데 시어머니 역시 이것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며느리를 내쫓을 수는 없었습니다. 며느리가 의사인데다가 말도 잘해요, 음식도 잘해요, 인물도 좋아요, 게다가 돈을 잘 버니 시부모한테 용돈도 잘 줘요. 그래서 며느리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요컨대 예수 믿는다니까 골치 아픈 것입니다. 홧병이 난 시어머니는 무당한테 가서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봤어요. 무당은 "당신네 집에 아주 큰 예수귀신이 들어왔소. 당신이나 내 힘으로는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면 내 병이 낫겠소?" "할 수 없어. 당신이 예수를 믿어야겠어." 그래서 시어머니가 예수 믿게 되고 결국에는 그 남편도 예수 믿어 집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초대교인들 사이에는 이런 얘기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만히 보면, 무당에 쫓기던 사람이 한번 예수를 믿었다 하면 화끈하게 믿어요. 다시 뒤로 갔다가는 혼쭐나니까요.

"No return."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새도 제가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교인 여러분이 결혼날짜를 정한 뒤에 저에게 주례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은 제가 시간이 없어서 "다른 날로 하면 안되겠습니까?"하면 주례자를 바꿀지언정 날짜는 바꾸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어디 가서 물어보아 정한 날짜이거든요. 또 우리 교회 결혼식은 1230분과 2시에 하게 되어 있는데 부득부득 시간을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반드시 어느 어느 시간에 해야 한다고 시간까지 정해놓은 것입니다. 또 신년사주팔자를 봅니다. 사주팔자라는 것이 별것입니까? 태어난 해, 태어난달, 태어난 날, 태어난 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미리 정해 가지고 그 시간에 갓난아이를 태어나게 합니다. 생일을 그 때로 맞추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주팔자 다 빗나가는 것이예요. 억지로 태어나게 한 것인데 그것이 맞겠습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별짓을 다합니다. 소위 과학이 발달한 이 세상에 살면서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한심합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제가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 프랑스에는 세금까지 내는 젊은 점성가가 4만 명이랍니다. 가톨릭 신부보다도 훨씬 많은 것입니다. 이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한쪽으로는 과학이 자꾸 발전하는 것 같지마는 미신놀음은 점점 더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믿음만이 이런 어두운 권세를 이길 수 있고, 말씀의 능력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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