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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야고보(사도행전 15:12~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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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야고보(사도행전 15:1221)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오늘의 본문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모습이 마치 그림같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 사도행전 15장은 전 장에 걸쳐서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실상 세계 제 1차 교회 공의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공의회에 모이게 된 주제는 선교 신학적 문제와 특별히 실제적 문제, 교회가 선교에 나아감에 있어서 부딪히는 문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믿는 사람 모두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그의 풍속과 관계되고, 문화와 관계되고, 생활 습관에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답을 얻고 살아가야 하느냐----이에 대한 해결을 주는, 매우 중요한 공의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그들 나름대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저들이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문화,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무엇을 버리며 무엇을 그대로 취해야 하느냐, 어떤 것이 바뀌어야 하며 어떤 것을 보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문제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로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는 믿는다 하는 신앙적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믿고 살아가는 생활의 문제입니다. 산다는 것은 실질적인 문제인고로 필연적으로 생활 양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이것이 과제가 됩니다. 이를테면 내일이 추석이라 합시다. 우리네 문화로는 이 명절에 여러 가지 풍속이 있습니다.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이것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 대이동'을 한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귀성(歸省) 러시가 빚어지고 큰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하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와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떻게 관련지어져야 하나--문제가 안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15장 처음 부분에서 고소하는 몇 사람들을 보았고, 또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일장 연설을 합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는 야고보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모이게 되면 두 의견이 대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당수는 이렇다하게 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중의 일부는 반드시 의견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게 됩니다. 흔히들 보수파니 진보파니, 우파니 좌파니 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그렇습니다. . 좌가 있고, 더 보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진보적인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서로 정면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런 경우의 수습 방도에 대하여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을 복습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보수파 사람들이라고 하면 할례 문화를 보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보수파가 아닙니다. 사실은 신앙과 문화와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사람, 그 중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옛날에 가지고 있던 생활 의식, 특별히 특권 의식, 혹은 머리 속에 있는 frame of reference, 이런 것들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는 믿지마는 그들의 생활 철학은 여전히 바리새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해서 고집을 부립니다. 할례 문화는 꼭 지켜져야 한다,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은 다음이라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 쪽은 저들의 보수에 대하여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보니 할례가 중요하지 않아요. 할례 받기 전에 벌써 성령 받았어요. 성령 받고, 방언하고…… 예수 믿는 사람 다 되었는데 여기다 대고 새삼스럽게 할례 받아라, 세례 받아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들 진보파 입장에서 볼 때에는 신앙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요 생활 양식보다는 질적인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선교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이루셨어요.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뭘 뒤따라가면서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하는 것이냐, 그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가지고 된다 안 된다 하는 공염불이 아닙니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진보와 저러한 보수가 팽팽히 맞서 논쟁을 하고 있을 때에 야고보가 중간에 나타납니다. 그가 중용을 취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수긍할 수 있는 중도 안에 내놓습니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옳게 여깁니다. 보수파도 아, 그거 좋다, 진보파도 아, 그거 좋다--이렇게 해서 합의된 바로부터 이제 새로운 교회 질서를 찾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합의가 이루어지는 데는 첫째, 지도자가 있어야 됩니다. 지도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신임할 수 있는 지도자, 모두가 다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 특별히 아무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높이 존경을 받을 위상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때때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지러운 것도 확실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문제가 생길 때에 누가 확고부동한 자세로 나서고 그 앞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순종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말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지도자에게 권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도를 받는 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만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될 때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아무튼 여기 예루살렘교회에는 야고보라고 하는 중요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권세를 가졌고, 지도력을 가졌고, 신앙적 인격도 가진 것 같습니다. 그이 사람됨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몇 가지를 보면 첫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굳이 야고보가 예수의 친동생임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마리아를 철저하게 동정녀로 못박아둠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다음에 다시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숫제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라든가 혹은 성경을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읽어보면 확실히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무난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니 외모부터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 예수님의 사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있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과 30년을 같이 있었다--이렇게 됩니다.

당연히 야고보는 예수님께 대해서 가장 많이,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그래서 야고보는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야고보를 가리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7절에 보면 더욱 의미 깊은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성경상으로 미루어보면 열한 번 나타나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오백 문도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특별히 야고보에게는 단독적으로 나타나십니다. 일대 일로 나타나셔서 교훈 하시고, 그리고 주의 종으로 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야고보는 중요한 지도자가 됩니다. 이 사람은 실질적으로 실천의 사람이었고, 전설대로는 무릎이 약대 무릎과 같이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서 무릎에 굳살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도왔습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모든 생활을 바친 일꾼이었고 마지막에는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를 이해함에 있어서 꼭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사람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겸손하고 기도하고 실천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유대 율법에 의한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 율법에 의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검소했고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것이 야고보의 모습이었습니다. 철저한 초대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시간시간 그 생활 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입는 것, 먹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아주 검소하게 실천하고, 늘 기도하고 명상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30년 동안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을 지냈고, 전설대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생각하면 야고보는 신앙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성경과 성서신학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화해의 사람입니다. 합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야고보서를 읽어 나가느라면 야고보는 경건한 사람인 동시에 특별히 인내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참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적이고 사람을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잡지에 난 기록을 보면, 미국 주요 기업이 요구하는 소위 지도자가 갖출 여건 열다섯 가지를 말하는 중에 아홉 가지가 인간 이해입니다. Understanding mind----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야 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가장 훌륭한 자질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본문 12, 13절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라고 합니다. "듣더니 말을 마치매"-----결코 서두르지 않았어요. 바나바와 바울이 얘기하고, 베드로가 얘기하고, 그 하는 얘기를 조용히 들었어요. 끝까지 들었어요,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도 할말이 있고 저도 할말이 있어요. 대답할 말도 있어요. 그러나 끝까지 듣고, 말을 마친 다음에 얘기했습니다. 때로 우리네 지도자는 실수하는 경우가 있어요. 좀 위에 있다고 해서 남의 말을 중간에 막는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데 다 듣지 않고 "말도 안돼. 그만둬." 그러면서 "나 좀 얘기하자." 이래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야고보는 그러지 않았어요.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다 경청했어요. 그리고 말을 마친 다음에 얘기를 했어요. 잠언에도 남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했어요. 다 들어봐야지요. 아무리 내게 할말이 있어도 다 듣고 나서 말을 해야 됩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야고보의 그런 인격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매"--그 때에 입을 열어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취하시려고"--이 주어, 동사를 연결해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의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통찰력이 있었어요. 바나바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 베드로의 이야기, 누구의 이야기든 간에 그가 이야기 속에서 들은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고 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어요. 그가 생각하고 그가 관심 있게 들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역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그는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지를 받으려고 한다면 지도자가 아닙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그의 글에서 진정한 지도자는 2년 후에 지지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장에 지지 받으려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장은 지지 받지 못해요. 어쩌면 강한 배척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게 지도자입니다. 지금 당장 백성에게 듣기 좋은 말로만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약속하고 해서는 지도자가 못되는 것이예요. 사실상 며칠 가지도 못해요. 적어도 지금은 백성들을 괴롭힐 수도 있고, 요새 하는 우리말로 '고통 분담'을 시킬 수도 있어요. 혹은 경제가 내려갈 수도 있어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2년 후에 가서 ', 구분의 말씀이 옳았다'하는 평가를 받아야 지도자라는 것이지요. , 적어도 2년은 앞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잘 하고, 사람을 위하고…… 이게 아닙니다.

오늘 야고보라고 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시는지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또한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가만있자, 성경의 어느 대목에 합한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모스 911, 12절을 인용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에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적어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바울의 말씀을 들으면서 야고보는 아모스 911, 12절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구약에 주신 그 말씀이 오늘 여기에 응했든 확증을 얻었던 것입니다. 성경적인, 다시 말하면 객관적 진리가 확증해주지 않으면 나의 주관적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면 안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요새 보면 종종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요. 저마다 덮어놓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합니다. 객관적 진리가 없어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성경을 참고하세요. 성경의 맥락에 따라서 '이것은 맞는 이야기다, 바로 그것이 여기에 이루어졌다'하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이라고 말씀합니다(19).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 성경과 합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역, 그것을 보는 통찰력과 성경의 증거, 그 다음에야 나의 의견입니다. 하나님의 뜻 먼저, 성경 다음, 그 다음이 내 생각입니다. "내 의견에는" '에고크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조금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는"이라는 말입니다. "내 판단대로는"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적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내를 맞이하게 되는데 직접 가지를 못하고, 아브라함의 몸종이 갑니다. 이 몸종이 라반의 집에 가서 리브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만나게 될 때에, 요새같이 어디 전화를 하였겠습니까? 사진을 보았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 이삭에게 이런 아들이 있습니다, 그가 장가를 가야 되겠으므로 지금 규수를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와서 보니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어떻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말이 재미있어요. 하나님의 뜻인 고로 나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이렇게 말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때에 키가 큰지 작은지, 코가 둘인지 셋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예스, 노를 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갈 따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신앙--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증거로써 확증을 받고, 그 다음에는 겸손하게 "나의 의견에는"하고 결론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판단의 내용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내용이 아주 지혜롭습니다. 신앙 문제와 식사 문화 문제를 구분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 혼동하면 안됩니다. 신앙은 절대적입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 문제,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양보 안 합니다. 야고보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언제든지 확고한 보수적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 문제에는 불변입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 문제와 대해서는, 특별히 생활 양식에 대해서는, 혹은 식사 문화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바울의 입장에서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런 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식사,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지 이것은 먹어라, 저것은 먹지 말아라 할 것이 무엇이냐--그렇게 말하고 싶지마는 아마도 야고보가 이 문제를 내놓은 것은 그 강력한 보수주의자들, 그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좀 풀어주려고 해서인 것 같아요.

"바울은 옳고 바리새인들은 틀렸어"라고 딱 자르면 하나될 수가 없거든요. 그쪽도 체면을 세워주어야지요. 그래서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 편이요, 문화에 대해서는 유대사람들 편을 많이 들어주었습니다. 곧 중용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러면 무엇을 금했나요? 식사 문제, 한마디로 말하면 처음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 먹지 말아라 했습니다. 당시 우상에게는 제물을 많이 바쳤습니다. 그러나 우상이 제물을 먹습니까? 한 점도 못 먹어요.

우리네의 제사 지내는 사람들도 그렇지요. 제사지낼 때에 조상에게 드린다는 밥에다 숟가락 꽂아놓았다가 문 열고 나갔다가 들어오지만 한 숟가락도 '잡수신' 것 없어요. 괜히 차려놓고 마는 겁니다. 제물은 사람이 먹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상에게 많은 제물을 바쳐놓고 그걸 도로 갖다 팔기도 하고 먹기도 해요. 그러니까 시장바닥에는 온통 우상의 제물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물인 줄 알면서 꺼림칙한 기분으로 먹는 거예요. 먹으면 우상의 제사에 동참하는 게 되니 소화도 잘 안될 뿐더러 안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예수 믿으면서 우상 섬긴다는 손가락질 받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은 그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주 지혜롭게 말씀해요. "묻지 말고 먹어라." 음식 놓고 마주 앉아서 제물이요 아니요 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먹으면 되겠고, 제물인 줄 알았을 때에는 먹지 말아라, 그러나 묻지 말고 먹어라---이렇게까지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이래저래 피곤하고 시끄러우니 숫제 우상의 제물은 삼가라 합니다.

두 번째로, 음행을 삼가라 합니다. 여기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문제이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의 얘기가 있는데 재미있어서 열거해보겠습니다. 베자라고 하는 학자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영적 간음이기 때문이 그것을 삼가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라이트후드는 근친 결혼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뱅은 축첩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펠러라고 하는 사람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하이니크라고 하는 사람은 꽤 뜻이 깊은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 하는 사람의 의식 중에 간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이아나 신전 같은 데는 3천 명이나 되는 창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가지고 제사지내는 사람들이 종교의식이라고 행하는 것이 그 창녀들과 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음행'은 바로 이런 짓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이니크는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음행'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우상숭배와 직결된 말이다, 창녀나 포주 행위를 말한다고 달마시우스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세 번째는, 목매어 죽인 짐승은 먹지 말아라--이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터부입니다. 레위기 1713절로 14절이라든가 신명기 121623절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왜 목매어 죽인 짐승은 안 된다고 했는가--다른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을 매어 죽였으니 피가 빠지지 않았어요. 피가 안 빠진 짐승을 먹는 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금기입니다. 그들의 완고한 풍속입니다. 율법입니다. 피라고 하는 것을 생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에서는 양이나 소를 죽일 때에 흐르는 피를 하나의 제사 의식으로 받아서 거기에는 있는 사람들이 먹었어요. 이방사람들은 제사 의식 중에서 이렇게 피를 마시거든요.

그런고로 이런 것도 역시 종교 문화와 관계가 되기 때문에 먹지 말아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피를 멀리하라 말씀하고 나서, 그 이유로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합니다. 여기에 암시된 것인즉 이방사람들도 벌써 모세의 율법을 배워서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 중 상당한 부분을 배워 가지고 '이러한 것은 나쁜 것이다'하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나쁜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의식이 더 중요합니다. 벌써 머리 속에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건 속된 것이다, 이건 우상이다, 분명히 우상에 속한 것이다'---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의식 속에서, 그 개념 속에서 벌써 우상적인 것이라고 종교문화화된 행위를 그대로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풍속에 관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종교적 관념을 가진 풍속이라면 버려야 돼요. 부적(符籍)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어떤 식당에 가보면 물 수()자 거꾸로 쓴 것을 벽에 붙여놓았어요. 그거 남의 집 것이니 내가 뗄 수는 없지만 나는 볼 때에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아버님이 가르쳐준 것이 있거든요. "원래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모르느니라." 부적 아무리 있어봤자 귀신이 글자 읽나요? 그래서 상관없는데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 집에는 그런 것 없어야 되겠지요.

금할 수밖에요.

이런저런 것들은 금하자 한 다음에 본문에서는 마지막 말이 아주 은혜스럽게 맺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야고보다운 말씀입니다. 탕자가 돌아옵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겠어요? ,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맞아 주실까, 형이 나를 어떻게 대해줄까?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얼마나 걱정을 했으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대해달라 했겠습니까?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돌아오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이제 아들이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와요. 그런데 돌아온 이 사람을 아버지는 그대로 가슴을 열어서 영접합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다른 말은 없어요. 그래,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목욕을 시켜라, 신발을 신겨라 하지 않아요? 그런데 형은 그렇지 않아요. 조금 까다로워요.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동생을"--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재산 문제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절반이라도 가지고 돌아와야지 몽땅 날리고 돌아온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돌아온다고 하는 것만 극대화하고 기뻐하게 되면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무슨 과거를 묻는다는 것입니까? 여기에 특별히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돼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기는 다니는데 좀 시원치 않았던가 봐요. 자기네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때마침 예배 시간인지라 그 교회에 들어갔어요. 술이 잔뜩 취해 있었어요. 술 냄새를 피우면서 뒤쪽에 앉아서 코까지 골아요. 예배가 끝나자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를 자기네 교회 목사님한테 데리고 갔어요. "이 사람 이거, 술 냄새도 나고, 아주 못쓰겠어요" 했더니 그 목사님이 술을 마시면 쓰나, 하고 책망을 주었고, 그는 알았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는 자기를 끌고 갔던 그 교회 청년을 끌고서 이번에는 자기네 교회로 왔어요. 자기네 목사님한테 가서 앉아 입을 엽니다. "목사님,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할께요. 술을 마시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게 좋습니까?" "물론이지요"라고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보아란듯이 끌고 간 청년보고 말합니다. "거 봐라, 우리 목사님은 다르지 않니?"

여러분, 교회에 나오면서 술 먹는 것은 나빠요.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도 교회에 나가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좌우간 나와야 언제든 고칠 것이 아닙니까? 담배를 피우든 술을 먹든 교회에는 나와야 돼요. 취해 가지고 나오는 것은 좀 곤란하지만 어쨌든 나와야 돼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이방사람들 교회에 나오는 것 얼마나 고마우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나오니 얼마나 반가우냐, 그런고로 이런 제약, 저런 간섭으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 장애물을 놓지 말라, 문턱을 높이지 말라--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쓸데없는 얘기 해 가지고 남의 마음 상하게 하지 마세요.

내가 무엇이 그렇게 깨끗하다고 남을 비판합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들 마음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문턱을 낮추세요. 아주 낮추어야 합니다. 절대로 문턱을 높이던가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이치는 간단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하다, 생활은 차차 고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 괴롭게 하지 말아라--얼마나 덕스럽습니까? 그런고로 신앙 문제와 문화 문제는 구별해야 되고,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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