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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요한복음 1장 9절~14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식사할 때에 수저를 사용하는 식사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좋은 날에는 특히 은수저 사용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은수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어느 수필에서 은수저를 사용하게 된 유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궁전에서 왕들이 신하가 바친 음식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것을 검사하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이 바로 은수저를 사용하게 된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음식이든 일단 은수저로 저어 보면 독약이 든 것은 검게 변색이 되므로 검사용으로는 안성맞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얼마나 큰 불신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음식을 대할 때마다 의심을 하면서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큰 불행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철학자 쇼펜하워도 상당히 의심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행을 할 때에 항상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음식을 먼저 강아지에게 먹여 보고 나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득이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먹는 음식을 믿어야 하고, 신호등도 믿어야 하며, 타고 가는 자동차의 기사도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전부를 믿어야 오늘 이만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도 하지만 결국은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가장 불행한 형편은 꼭 믿어야 할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다 믿지 못해도 그 사람만은 믿어야 하는데, 바로 그를 믿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가장 비참함을 느끼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꼭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편안하게 믿는 마음으로 살고, 누구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서 불평하며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믿음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엡 2:8)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의지나 신념에서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경험도 아닙니다. 단지 믿어지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믿어지지 않는 사람을 믿어 보겠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어보고 대답하는 청문회까지도 동원해 봅니다만 갈수록 불신은 태산입니다. 과연 청문회를 열어서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믿는다는 문제는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하고 애써도 인간적인 노력의 결론으로는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는 비판을 해 보았자 믿어지지 않음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일찍이 믿음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이란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자기 지식에 기초한 확신이 아니라 영접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성화 중에 홀맨 헌트(Holman Hunt) 라는 화가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성화입니다.
그 그림에는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 문 주변에는 덩굴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서 그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문은 바깥에서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에 등불을 들고 들어가려 하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정말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자주 듣는 예화입니다만 태평양의 넓은 바다 위에 물병 하나가 떠 있다고 합시다.
이 물병의 병마개가 꼭 닫혀 있는 동안은 몇십 년을 떠 다녀도 병 속으로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지만 믿지 않으면 은혜와 상관이 없고, 많은 사랑 속에 묻혀 살지만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나와 사랑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는 마음, 영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라야 그 진리와 그 생명과 그 은혜가 나와 상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요한복음 3:18-19에 보면 그 이유는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 교만한 마음, 자기 우상, 자기 고집, 자기도 모르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말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고 악은 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선보다 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노출되고 붕괴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악의 교만과 허상이 노출될 것을 꺼려해서 계속 마음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라는 신분 때문에 가끔 중매를 하게 됩니다. 중매를 하다 보면, 때로는 정말 서로가 잘 될 것 같아 소개했는데 의외로 안 되는가하면, 별로 기대하지 않고 우연한 기회에 소개했던 것이 뜻밖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상대방의 말이 믿어지면 일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으면 도리가 없지요. 사랑과 행복이 바로 앞에 준비되어 있어도 마음 문을 닫고 의심하고 있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믿을 때에만 사랑이 성립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합니다.
어떤 노부부가 아이가 없어 고아원에서 한 명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함께 사는데, 아이에게는 고아원에서 하던 버릇대로 거친 행동 등 못마땅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일들은 세월이 지나면 고쳐지겠거니 위로하고 그 아이를 귀하게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시간이 왔습니다. 집안에서 먹다 남은 과자들이 한두 번씩 없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 아이를 의심하여 물어 보았지만 아이는 절대로 감추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 아이 말고는 다른 식구가 없었으므로 달래 보기도 하고 꾸짖어서 정직해 주기를 바랐지만 아이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계속 고집을 했습니다. 노부부는 이 아이의 거짓은 구제 불능이라고 판단되어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과자를 감추었더라도 뉘우치고 사과하면 용서하려고 했는데 끝끝내 거짓말을 고수한다고 믿었기에 정이 떨어진 것입니다. 아이가 떠난 뒤 얼마 후에 집안을 대청소하다가 옷장 뒤에 과자 부스러기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쥐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노부부는 너무 놀랐고 죄스러워서 당장 고아원으로 달려가 그 아이에게 사과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사정했습니다. 아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의심받았을 때 그 아이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남을 의심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접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으로 진리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의, 나의 의지, 나의 노력까지도 다 포기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고 주님을 영접하는 그런 마음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을 소유한 자, 즉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지식이나 수양이나 인격 등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서, 즉 일정한 자격이 있어서 그 자격에 합격해야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녀가 되고, 그리고 자녀가 양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 나라의 대기업의 회장님 한 분이 TV를 통해서 대학생들과 좌담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어느 학생이 "우리 나라가 일본에 비해서 약 50년이 뒤떨어졌다는데, 언제쯤이면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회장님의 대답은 "따라간다구요? 편승하는 것입니다"라고 매우 중요한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바로 하고 생각을 바로 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편승을 한다는 것입니다.
50년 떨어졌다고 50년 걸려야 하고 100년 떨어졌다고 100년 걸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바로 이 시간에도 편승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은 오랜 세월이나 일정한 기간이 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믿는 순간 등록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옛날의 생활, 즉 옛 가정, 옛 제도, 옛 풍습 등 옛날의 모든 관계와는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주위 분들의 고백을 자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에는 그렇게 좋아하고 소중하던 것들이 이제는 시시하고 더럽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180도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특권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삼는 새로운 관계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형제가 놀다가 동생이 잘못하니 형은 동생을 나무라면서 "너,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단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는 두 아들을 앞에 놓고 "나는 너희들이 말썽꾸러기이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고, 착하게 자라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한단다. 어떤 경우에도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너희를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절대로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됨으로 따르는 기업과 모든 축복의 약속들이 함께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영접함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녀 된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영접하고 믿어서 받아들일 때에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그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의 뜻이 같습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그 의미를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람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동시에 또한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심을 무능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둔한 자는 이 사랑을 어리석음으로 보고 선을 미련함으로, 진실을 나약하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십자가의 거룩한 역사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확증 받게 됩니다. 구유에서 영광을 보고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며 부활의 아침에서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중국 사람이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날 험한 세상을 살다가 실수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려다보고는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으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게나"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사람이 들여다보더니 "사람이란 아차하면 실수하는 법이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하면서 지나갔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들여다보던 사람은 "거 큰일났구나"고 놀라면서 급히 사다리를 구하여 직접 내려와서는 구해 주고 그리고 말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비유하기를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이고, 둘째 사람은 공자이며,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살 것이라고 소리만 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물론 왜 잘못되었느냐고 비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친히 사람의 몸으로 구유에 오셔서 섬기고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홀로 된 어머니가 자식 하나를 있는 정성을 다하여 성공을 시켜서 후에 고생담을 들려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불효자식인 그는 어머니에게 "누가 혼자서 살라고 했습니까?"라고 대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자식을 위해서 수고한 어머니의 수고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돌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의 그 수고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희생의 의미를 알아야만 그도 행복하고 모자간의 관계도 바로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불신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시끄럽고 불화한 것입니다. 이제 마음 문을 열고 조용히 하여 들어야겠습니다. 듣는 인내, 받아들이는 겸손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북경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고 합니다. 소련은 공산주의 70년에 완전히 망했고 중국은 공산주의 40년에 완전히 망했다는 것입니다. 왜 망했습니까?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결점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무신론에 기초하고 있기에 여기서 발생되는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비인간화될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 불신만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감시하는 세상으로 전락되어 누구든지 의심해서 감시자가 붙게 되고 그 감시자를 감시하는 또 다른 감시자, 또 다른 감시자가 계속 따라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청와대에 대통령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를 국민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됩니다. 그를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됩니다. 그 빛을 영접할 때에 영광에 이르며, 그 진리를 영접할 때에 생명에 이릅니다. 이 거룩한 축복이 이번 성탄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저 북한 땅에 조금씩 문이 열리는 것 같은 기운이 도는데 우리는 더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제네바에서 북한 교회 대표들과 만나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대화 중에 북한에서 온 대표들이 좋은 책들을 좀 보내 달라고 하면서 현재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집 두 권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친구 목사님은 제게 전화를 주면서 책을 많이 보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제 북한에도 굳게 닫혔던 문이 조금씩 열립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책을 보내어서 그들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도 저들의 마음도 그리스도를 향하여 활짝 열릴 때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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