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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어떤 감사로 보답할까(데살로니가전서 3장 7절~1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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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사로 보답할까(데살로니가전서 3713)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어느 사업가가 어려운 중에 열심히 일하여 얼마간의 돈을 벌었습니다.

여유가 좀 생기게 되자 그는 전에 없던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들이 낡아 보이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바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살고 있던 집을 팔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집 건물이 우중충하고 정원도 짜임새가 없어 보여 도저히 더는 살고 싶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광고 문안을 작성하여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을 사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업가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삼 자기 집을 잘 살펴보니 살기 좋은 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곧 광고를 취소하고 집을 팔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증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만과 원망입니다. 불만과 원망의 깊은 뿌리에는 불 신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만을 품고 원망을 하 사람들에게는 그 불만과 원망을 갖지 않게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첫째, 불만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대적 가치 인식과 만족할 줄 모르는 병리적 욕망 내지는 허무주의로 기울어지는 잘못될 세속적 욕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소유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보다 더 잘살지 못해서 생기는 불만이고 불평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 개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간증 삼아 하겠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처음 목회지로 간 곳이 신당동에 있는 중앙교회입니다. 전도사로 취임해서 이사를 가는데 집사람과 함께 가방 하나 들고 갔더니 장로님께서 짐을 실은 트럭은 언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가방 하나가 이삿짐 모두인데 트럭은 무슨 트럭입니까? 이렇게 어렵게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심방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라디오가 무척 듣고 싶었습니다.

궁리하다가 청계천에 가서 라디오 부속들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재주를 다해서 밤새 끼워 맞추어 소리를 내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뚜껑도 없는 라디오였지만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좋은 전축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때 그 라디오만큼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아무 것도 없을 때에는 라디오 하나만 있어도 만족할 것 같으나, 그것을 가지게 되면 흑백 텔레비전을 가지고 싶고, 이것이 해결되면 컬러 텔레비전을 가지고 싶고, 이것이 해결되면 비디오를, 이렇게 점점 발전하여 자가용 비행기까지 소원해 봅니다만 도무지 끝이 없습니다. 어차피 끝이 없을 바에야 중간에 끝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상대적이기에 불만을 채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만족할 줄 모르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감사하게 여길 줄 모르는 이 병리적인 욕망은 밑빠진 시루 같아서 채워도채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한 언론인이 프랑크 총독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총독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행복해지는 비결은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해지는 비결은 알고 있지요"하고 말하며 다음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웃사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보이는 그 이웃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으니 이웃의 처지를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이를 먹은 뒤에, 지나간 청년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때처럼 행복했으면 하고 원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볼상사나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울어도 힘써도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일생동안 한탄하는 여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구제 불능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늘 불만이 들끓고 있는 자에게 무엇으로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병리적인 욕망이기에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행복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자족할 줄 아는 바울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목마른 자에게는 반드시 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마른 자에게 빵을 주면 무엇하며 기름진 음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생수만이 그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권세, 부귀영화, 명예입니까?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찾고 추구하며, 이것을 얻지 못하여 불만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것들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헛된 것입니다. 목마른 영혼에는 말씀의 생수만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둘째, 원망입니다. 원망이란 책임전가적(責任轉嫁的)인 심리 작용입니다.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스스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꼭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못사는 것도 다른 사람이 잘살기 때문이요, 내가 실패한 것도 다른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타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 해도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여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선 겸손해져서 내가 지은 죄, 행동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 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어느 누구도 원망할 자격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기는 것으로, 이 겸손만이 원망의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 지향적인 소망입니다. 오늘 잠깐 어두움이 있다 하더라도 저 앞에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음을 믿으면 원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잠깐 당하는 이 어려움이 앞날의 영원한 축복의 과정이라고 믿는다면 이 고난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고난과 시련들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믿기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만과 원망을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여건에도 행복할 수 없고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어 그들에게서 원하셨던 소원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신 뜻이 무엇이었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최고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 큰 능력으로 구원하셨으니 광야를 지나갈 때에 저 앞에 있는 가나안---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있음을 믿고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견디며 감사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불평하고 원망하여 결국은 광야에 엎드려 죽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망죄가 얼마나 불신앙적이고 무서운 소행인지 모릅니다. 원망죄는 가장 큰 죄라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할 자가 감사하지 않으면 자연히 불평과 원망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감사란 깨달음과 겸손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사의 차원을 셋으로 나누면,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 감사는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며 풍년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일반적인 감사입니다. 둘째 감사는 철학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은혜요 전에는 축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축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제일 행복한 자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셋째는 신학적 감사가 있습니다. 이 감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어 내 죄를 속량하심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대한 감사로, 모두가 은혜요 기쁨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입니다. 그러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내일이 염려된다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해도 내일이 불확실하다면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는 그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감사란 전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은, 첫째 믿음의 역사요, 둘째는 사랑의 수고이며, 셋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지금 바울의 형편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그들의 믿음, 그들의 소망, 그들의 사랑이 생각나서 감사하며, 특히 환난 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받되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바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신 모든 은혜와 은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다 신령한 것에 대해, 보다 영원한 가치에 대해 깊이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자주 북한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생각합니다. 특히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나왔기에 더더욱 북쪽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피난을 나온 다음에, 다니던 교회는 창고로 사용되었는데 교인들이 밤중에 몰래 모여 교회 추녀 밑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공산당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교회를 다 헐어버렸고, 그래도 교인들은 교회 빈터에 꿇어앉아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눈이 온 날이면 이른 아침에 군데군데에서 눈이 들썩들썩합니다.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밤새 기도하던 사람들이 눈을 털고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예배당을 사모하고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싶지만 장소와 시간은 물론 자유가 없어서 마음놓고 예배할 수 없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금년에도 감사절 예배를 기쁘게 드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가난하고 부하고가 무슨 문제입니까? 길게 짧게 산다는 것이 무슨 큰 문제입니까?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으며 원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만 일관된 생을 살아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일 죽임을 당해도 감사할 것이라고 진정한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특별히 환난 중에 복음을 받는 그 복음의 진행과 그 복음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깨달았으면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니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둘째, 기뻐하는 것이 보답입니다. 우리 인간사에서도 보면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참으로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식들이 부모를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자녀들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 부모님들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께 늘 고맙게 생각하고 기뻐할 때에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보답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니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의 합당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기뻐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자를 용서하는 그 봉사와 섬김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풀며, 용서에 감격한 사람이 용서를 할 줄 압니다. 저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 가운데 다소 불만스러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개를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개를 사람과 똑같이 목욕과 이발을 시키고 먹이도 별도로 만들어 먹이는가 하면, 심한 사람은 보험도 들고 유산까지 남겨 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개에 대한 그들의 지나친 애정을 물었더니 어느 나이 많은 할머니가 대답하기를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뼈아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주인을 물어뜯는 경우가 있지만 개는 주인을 무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사람이 개만도 못하다는 소릴 듣는 것 아닙니까? 은혜를 모르고 인간 관계에서 배신을 하는 사람은 실재적으로 개보다 못한 인간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배반당하고 오죽 답답하면 개를 사랑하며 살고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타락된 인간을 어떻게 변명해야 합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어디서나 무슨 일이든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아가서 자기를 원망하여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만과 원망에서 비롯됩니다. 불만과 원망의 뿌리는 불 신앙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믿음을 새롭게 하여 겸손해져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은혜를 깨닫고 현재에 주신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 주실 축복의 약속을 멀리 바라보며 다시 감사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격언 중에 "피해는 모래 위에 써넣되, 은혜는 대리석에 써 넣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피해를 입었습니까, 혹은 섭섭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것은 곧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글처럼 영원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등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별빛을 주실 것입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밝은 햇빛을 주실 것입니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의의 대왕이신 그리스도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께 온 정성을 다하여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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