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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결심(누가복음 18장 31절~34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오늘은 결심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이 결심의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 또한 주님 뒤를 따르는 자로서 결심을 새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의 결론이요, 당신의 생을 집약적으로 끝맺음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 첫 말씀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제딴에는 안다고 생각한 자들입니다. 저희들이 더 잘 알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까닭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많습니다. 그 모든 죄의 원인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무지(無知)입니다. 지금 저지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모르기 때문이요, 이 죄가 어떠한 운명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젊은 사람들이 그 좋은 나이에, 그 맑은 정신, 그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도 빈둥거리며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저러다가 훗날에는 얼마나 후회를 할까, 얼마나 가슴을 칠까 하고 벌써부터 마음이 아픕니다. 그 때가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울어도, 노력해도, 헛되이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또 젊은 사람들, 실연했다고 죽느니 사느니 울고불고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늘 찬송을 부르겠다고 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면 어떻고 부하면 어떻습니까? 일류 대학이면 어떻고 삼류 대학이면 어떻습니까? 젊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칩니다. 그런데 울기는 왜 웁니까? 이것도 생각해 보면 역시 무지 탓입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처한 이 시간과 이 젊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차이는 참으로 큽니다. 예수님은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모르는 까닭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모를 때에 용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좀 우직하고 단순한 사람이 고집도 있고 용기도 있습니다. 생각 많고 아는 것 많은 사람은 대체로 그 생각 때문에 망설이다가 아무 것도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아는 사람보다더 용감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알면 나약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알면 강해집니다. 온전한 지식은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안다 해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약한 것입니다. 좀더 확실하게 안다면 좀더 강한 힘을 보일 수 있는 법입니다. 모르고 내는 힘은 만용(蠻勇)이지 용기가 아닙니다. 알기 때문에 용기가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인내하고, 알기 때문에 일을 자신 있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에 힘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아셨습니다. 아시고 선택하고 결심하셨습니다. 알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며 어떠한 결과를 이루는지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아무 말씀 없이 온유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그곳에 십자가가 있음을 아시고 올라갈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아도 그렇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예언하실 때마다 꼭 한 가지 더 추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을 받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통도 여러 가지입니다. 몸이 아픈 것, 매를 맞는 것, 목숨이 끊어지는 것 등……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고통은 치욕입니다. 부끄러움입니다.
저주받는 것입니다. 희롱과 능욕과 침뱉음 --- 이것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마음의 아픔입니다. 이러한 아픔이 있을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아시면서도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한 것은 더 큰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숨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 막 8:36)."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부자로 편안하게 사는 것---이것들도 모두 중요합니다마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명예가 그렇습니다. 불명예스럽게 사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잘사는 것, 오래 사는 것보다 명예가 더 중요합니다. 불의하게 살기보다 의롭게 죽는 것이, 악하게 오래 살기보다 선하게 짧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일입니다. 참된 기쁨으로 죽는 것이 무의미한 긴 삶보다 영광스럽습니다. 미워하고 미움받으면서 굳이 오래 살기보다 참 자랑을 느끼며 생을 끝내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결론지으면 '산다고 하는 그 자체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생을 보람되게 살 수 있다'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이는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다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고 살았습니다.
B.C.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이제 바벨론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며 더러운 생을 연장하기보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린 후에 죽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우상을 섬기며 사느니 사자굴속에 들어가 죽는 것이 낫겠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쯤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에스더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동족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그녀는 목숨을 걸고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때에 한 말이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 16)." 에스더한테는 목숨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이지 바둥바둥 오래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병 낫겠다고, 병 고쳐 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 인간이 너무 교만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위암으로 몹시 고생하셨는데, 세상 떠나실 때가 가까워오자 자주 혼수 상태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목사님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켜 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마침내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수혈이 한창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가 없어서 죽어 가는 젊은이들도 많은데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 왜 이 아까운 피를 낭비합니까!" 그리고는 목사님 스스로 주사 바늘을 뽑아 버리시고 기도하면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얼마나 우러러 보입니까? 그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다 "내가 왜 죽어" 하고 죽는 사람들---참으로 비참한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죽어야 할 때에 고이 죽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또 한 분 목사님은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저를 만나기만 하면 늘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것인데 죽지 못했다고 탄식합니다. 당시 목사님은 부인을 잃고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한테 신의 위협이 들어왔습니다. 당장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전처에게서 태어난 세 아이와 젊은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고생할 저들을 생각하니 차마 모진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그만 신사 앞에 꾸벅 절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와서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아파합니다. 이 치사하고 더러운 생을 연기한 결과가 무엇이냐고, 자식들 다 망치고 내 일생 슬픔이 있을 뿐이라고……그렇습니다. 살려고 하면 거기에 죽음이 따릅니다. 저를 살리고자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고자 내가 또 죽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새는 알에서 나옵니다. 알은 곧 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이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택하신 것은 불가피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저것 다 애써 보아도 안되니까 포기하는 마당에 할 수없이 죽음을 택하는 그런 유가 아닙니다. 불가피한 결단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계속적으로, 알고 결심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는 언제나 덧붙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예고하실 때마다 꼭 연이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살아나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예고하실 때에 반드시 부활을 함께 예고하십니다. 부활을 알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고, 영광을 알기에 그 부끄러움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썩어지는 밀알을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 24)."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가을의 추수를 알기에 씨앗을 땅에 묻고 발로 밟습니다. 씨앗이 땅속에 묻혀야 추수 때에 거둘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죽어야 삽니다. 아니, 살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 혹은 누가복음 9장24절을 보십시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살고자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기 위하여 죽는다---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포기합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순간적인 향락을 버립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예고하실 때마다 또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경 말씀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성경적 신앙, 성경적 생애, 성경적 결단, 성경적 죽음, 성경적 부활---모든 것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취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성경적 죽음과 성경적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홀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예수님께 성경이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이야기도 아니고 논리적인 지식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성경은 그대로가 생명이었습니다. 이 성경 말씀에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죽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당신에게서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그 누구들처럼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한 입장이 아니셨습니다. 예언된 말씀을 당신의 생애 안에서 성취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서 응답된다, 내게서 성취된다, 내게 응하게 하겠다---응답을, 성취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게 하십니다. 응하게 하신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응하게 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간교한 대제사장 가야바, 비겁한 로마 총독 빌라도,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 당신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배은망덕한 수제자 베드로---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지실 수 없습니다. 저들 때문에 십자가를 지다니,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아버지께서 주신 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잔으로 믿으시기에 기꺼이 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하신 예언된 선지자의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 절박한 순간에도 예언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당신한테서 성취시키려 하십니다. 그뿐입니까? 십자가 위의 그 참혹한 고통 중에도 성경 말씀을 기억하십니다.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고 사도 요한은 증거 합니다(요 19 : 28).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성경대로, 성경적 신앙 안에서, 그 말씀을 당신의 생활 속에 성취시키려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45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에 그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도리를, 이소중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요. 아직 헛된 꿈만 꾸고 있는 저들입니다.
예수님이 왕 되시면 저희들은 그분의 제자로서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고, 내가 크냐 네가 크냐 하며 윗자리를 놓고 다투는 형편입니다. 허황한 정치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저들의 마음은 질투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이 질투하는 마음입니다. 질투하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습니다. 오뉴월에 내리는 서리도 '저리 가라'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질투가 마음을 가리고 있으니 예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감추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아직도 내 생각, 내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까? 이 인간적인 것들---자기 중심적인 정욕과 헛된 꿈, 교만한 마음들이 깨어지기 전에는 십자가의 신비도, 부활의 능력도 알 리가 없습니다. 백 번을 들어도 모릅니다. 아마 일생 동안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3년 동안 좇아 다니고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저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저들의 마음도 열렸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지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볼 때에 저들도 앞을 다투어 순교하게 됩니다. 그 순교의 절정으로 스데반을 들 수 있습니다. 순교할 때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며, 천사의 얼굴로 죽어 가는 스데반---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안 사람의 결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승리했고, 그래서 능력에 살았고, 그래서 거침없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의 시를 읽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세고 계실 때에 나는 돈을 세었고, 하나님께서 잃은 것 세고 계실 때에 나는 얻은 것을 세었다.
내가 곳간에 쌓아둔 물건들의 값어치를 세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상처를 감싸 주셨고, 내가 주의를 구하고 명예에 눈이 어두웠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릎 위에 놓인 시간들을 세며 눈물지으셨다.
어느 날 무덤가에 서기까지 그토록 얻으려 했던 것들이 모두 헛된 것임을 알지 못하였고, 내 모든 사랑하는 것들이 날아가 버릴 때까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이 가장 부유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여러분, 십자가 안에 우리 생명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저 부활의 언덕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부활 신앙 안에서 오늘을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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