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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기다리는 자(눅2:22~3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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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기다리는 자(2:2233)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유명한 강철의 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가운데 벽에는 낡은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카네기에게 어째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 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썩 인상적이었고, 특히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동안 소중하게 보관했고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라는 말을 그의 생활 신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Man's Search For Meaning)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아주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바벨론의 포로 생활과 로마의 침략 등으로 2천 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디아스포라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 비참한 역사를 가졌지만, 그 속에서 언제나 선민으로서의 특권 의식을 누렸고 끈질기게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국의 처어칠 경이 노년에 자기 모교인 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후배들은 2차 대전의 영웅인 선배를 자랑스럽게 맞이하고자 부산을 떨었고 그의 명 강의를 들으려고 노트를 준비하여 전교생이 강당에 모였습니다. 처어칠은 옛날 자기가 공부하던 자리를 둘러보고, 그리고 강단으로 올라가더니 잔뜩 긴장하고 모인 후배들에게 단 세 마디를 남기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 포기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고 원망하여 스스로 절망에 빠지고 있단 말입니다. 남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자는 살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전부터 우리 주변에서는 미래학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종말론과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미래학이란 과거와 현재를 잘 연구하고 분석해서 역사의 맥락과 흐름의 원리를 찾아내어 그 원리로써 미래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역사관도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또다시 과거와 같은 맥락의 미래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게 되는 것이 미래학으로, 여기서는 아무리 연구하고 분석해 보아도 역사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에서는 과거나 현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과 그 수직적인 계시, 그리고 약속된 미래에 근거를 두고 여기서부터 오늘로 되돌아와서 오늘을 해석하고 과거를 해석하여 다시 미래를 전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이 그의 신앙이요 초대 교회의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신앙도 그의 서신에 의하면 앞에 있는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앞에 있는 약속이 너무 완전하고 분명하여 황홀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은 자연적으로 소화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의 신앙도 복음서나 그의 편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된 미래가 있고 그것이 현재로 영접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과 초점은 미래 지향적이요, 약속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것으로, 예수의 재림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보증은 십자가요, 주관적인 확증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다림의 동기를 세상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역사 의식이라고도 하고 이데올로기라고도 합니다. 또 하나는 기다림의 동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욕망, 자신의 꿈과 환상을 근거로 해서 막연하게나마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왕 포드가 자동차를 만든 동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여 급하게 말을 타고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갔습니다.

말을 최대한으로 몰았지만 그의 마음이 급한 만큼 말의 속도는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서둘러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집에 오니 어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습니다. 그 때 이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좀더 빨리 달리는 방법은 없을까? '더 빠르게 더 빠르게'하는 생각과 환상이 늘 그의 뇌리에서 맴돌다가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이런 꿈이 있고 환상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꿈들을 멀리 내다보면 종말에 가서는 실망으로 끝나고, 또는 자기 경건과 자기 성장에 동기를 두려고 했기에 무산으로 끝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는 진정한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계시와 객관적인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 그의 기다림은 가장 성서적이요 가장 기독교적인 대망 사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건에 근거하거나 정치적 상황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때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이었고, 의롭고 경건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욕망의 성취나 꿈을 실현하려는 그런 의미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야곱과 요한 같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대망은 더욱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메시야의 세대(the Messianic age)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의 세대에 있을 은총들입니다. 이사야 11:6-9에는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세대가 빨리 왔으면 하는 그런 대망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메시야 세대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대망 사상을 보면 메시야 세대는 믿어도, 메시야 바로 그 분(Messiah the person)은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90%가 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은 메시야 세대에 대한 정치적인 꿈과 같은 흔적은 전혀 없고 구체적이며 인격적인 메시야 그 한 분만을 기다리며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성령께서 "네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리라"는 계시를 하셨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의하면 시므온이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이제 머리가 하얗게 되어 죽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저 아이가 메시야다"라는 계시를 받고 예수를 품안에 안게 됩니다.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시므온이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는 아기를 안고 찬송하기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29)라고 행복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왔다고 이제 그가 회춘해서 출세할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 와서 무슨 영광과 부귀를 누릴 것입니까? 그는 아기 예수 메시야를 만났다는 그 기쁨과 감격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를 쉬운 말로 풀이하면 "하나님,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더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내가 생전에 메시야를 만났으니 만족합니다."---이것입니다.

시므온은 주님을 만난 바로 그 체험 속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고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 30-32).--그는 만민에게 비취는 메시야의 역사를 보았고 이역사를 통하여 이루실 우주적인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명확하게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입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하고 있습니까? 예수 바로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내가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비록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오늘 이대로 만족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그 체험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관을 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역사관이요 종말론적 사관입니다.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렸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안함과 구원을 누렸고 저 앞에 있는 종말론적 구원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망이 없고 어두운 그림자나 나약함이 없습니다. 물론 시기와 불평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근본적 의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대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어떤 자세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까? 개인적인 욕망의 성취나 정치적인 상황에 근거한 기다림이 아니라 시므온과 같이 예수 바로 그분의 인격과 만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통한 새 땅과 새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믿음과 소망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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