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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실존적 고민(창세기 32장 1절~12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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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실존적 고민(창세기 32112)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종족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고민할 줄 모르는 동물보다는 고민할 줄 아는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고민이 있게 마련입니다. 고민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민을 하되 고민의 질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질이 문제입니다. 무엇을 고민하는가, 왜 고민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고민의 한계입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나는 결국 고민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두고 고민을 하더라도 이를테면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까지 고민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적어도 잠은 잠대로 잘 수 있을 만큼만 고민할 것이요, 입맛을 잃어버리지 않을 만큼만 고민을 할 것입니다. 고민의 한계는 이렇게 분명해야 합니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식음을 소홀히 할 정도로 고민을 하다가 심신이 쇠약해졌다면 그야말로 고민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고민은 합당치 못한 고민입니다. 또 있습니다. 고민 끝에 누군가를 저주한다든지 증오하게 된다면, 다시 말하여 증오의 노예가 된다면 이 또한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유의 사람이 되어서도 못씁니다. 어떤 사람은 분에 넘치도록 고민을 하던 끝에 결국은 자학(自虐)을 하고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입만 열면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봅니다. 고민 때문에 누구를 죽이고 싶어져도 안될 것이요, 스스로 죽고 싶어져도 안될 것입니다. 고민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민이 지나쳐서 내가 내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크나큰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존재가치 자체를 상실할 만큼 고민을 해서는 못씁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배가 고프면 슬퍼집니다. 배고프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고생한다는 것과 고민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고생하는 것은 몸이 아픈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은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마음이 아파져서는 안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이 아파질 정도로 고민을 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치를 떠난 것이 됩니다. 고생을 해도 고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는 것이 여유가 있고 넉넉해서 고생은 모르지만 늘 고민에 차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은 그 고민 자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고민의 결과가 문제입니다. 고민을 해서 결과적으로 자기존재를 찾고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민의 결과로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되고,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진실해지고, 나아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고민은 값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민할만합니다. 고민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실의(失意)에 빠지고, 고민 끝에 절망하고, 자학하고…… 이런 사람이라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사람은 왜 고민을 하는가?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서는 말합니다. 물질 때문에, 사람은 배고프기 때문에 고민한다, 경제 문제로 말미암아 고민을 하게 된다, 춥기 때문에 고민을 한다--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해결책을 경제에서 찾으려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근자에 와서 귀중하게 교훈 받고 있습니다. 한편, 불교라든가 동양철학, 동양적 사고방식에서는 번민의 원인이 '욕망'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 때문에 번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욕심을 제거해야만 한다----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참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나름대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갖가지의 학설을 들고 있습니다마는 쉽게 이해가 가는 대로 간단하게 요약해 본다면 고민의 원인은 '갈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부터 있어온 잠재의식이며 경험이며 세계관 같은 것과 현실과의 괴리(乖離)에서 오는 갈등, 나의 이상(理想)과 나의 욕망과의 마찰에서 오는 갈등에서 고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하나의 해답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고생은 하더라도 고민이 그에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함께 아파서는 안됩니다. 가난은 해도 마음의 평화는 한결같이 지켜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실로 고생과 고민을 별개의 차원에 둘 수 있는, 확실한 철학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이 사람 야곱은 평범한 인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쌍둥이 형제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형의 운명을 탐낸 사람이요, 끝내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사람입니다. 집요한 노력의 사람입니다. 수고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적당히 거짓말을 할 줄도 알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구하여 간사한 짓도 곧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하여 복받지 못할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턱없이 엄청난 댓가도 아낌없이 치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재물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온 사람입니다. 큰 가정을 이루고 재물이 넉넉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이런 생각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생()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7절도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말씀합니다. 답답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문은 '마음이 죄어든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지금 불안하고 초조하고 공포에 휩싸여 고민이 되는, 그런 순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지금, 가진 것이 많은데도 그는 불행한 것입니다.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번민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당면한 야곱의 실존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입니다. 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족장(族長)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이 고민을 합니다.

그 옛날 가난하고 처량할 때의 고민과는 질이 다른 고민이었습니다. 일찍이 형의 낯을 피해서 하란으로 도망갈 때, 돌 베개하고 노천(露天)에서 잠을 자야 했던 그 때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야곱은 몹시도 외로워합니다. 가정이 있는데 외로워합니다. 아내가 넷인데도 외로워합니다. 자식이 열둘인데도 외로워합니다.

노예들과 종들과 많은 사람들이 야곱 하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는데도 그는 외로워합니다. 재산이 넘쳐날 정도로 넉넉한데도 그는 외로워합니다. 정말 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외로울 때에는 흔히 외적인 것에서 그 해결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결에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에서 분명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과 더불어 있어보아도 외로운 것은 그대로 외로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결에 있었으면 외롭지 않을텐데……' 그래서 공연히 멀리 간 사람만 원망합니다. 재산이 넉넉해서 모자람이 없으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야곱이 지금 재산이 없어서 고민합니까?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해서 외로워합니까?

야곱은 한 여자 라헬을 사랑한 나머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14년 동안이나 머슴살이를 해주었습니다. 사랑치고는 너무나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시쳇말로 '화끈한' 사랑이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열애했던 그 여자가 지금 내 결에 있습니다. 그런데 외롭습니다. 그 여자가 이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습니다. 이토록 절실한 고민의 시간을 야곱은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습니다. '화목하지 못한 탓이다'----각성(覺醒)이 오는 것입니다. 화목(和睦)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화목해야 합니다. 내 양심과 화목해야 합니다. 이웃과 화목의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살롬' 입니다.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거늘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입니다. 멀리멀리 떠나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총총히 떠났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보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지내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지울 길 없는 그림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나의 자유를 더불어 누릴 수 있을 때에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남의 자유는 무시하거나 빼앗고 나 혼자서만 자유할 때에 불화(不和)가 있습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으면 그것은 억압입니다. 참된 자유는 남에게 자유를 주면서 내가 자유할 때에만 성립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화평이 있을 수 없고, 화평이 없음으로 평안치 못합니다. 야곱이 그래서 평안치 못한 것입니다. 무슨 방법으로도 화평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평이 없기에 그는 평안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해치고 왕위를 차지하여 세조(世祖)가 됩니다. 그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탐내던 왕권(王權)을 잡았습니다. 내 위에 사람 없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보좌에 앉아 갖은 영화(榮華)를 한 몸에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에 쫓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밤마다 진땅을 흘려야 했다고 합니다. 눈만 감으면 형수(선왕 문종의 비,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자기를 괴롭히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하도 괴로워서 잠자리를 이리 뒤채고 저리 돌아눕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형수가 자기를 보고 침을 탁 뱉는 꿈을 꿨는데, 그 뒤로 침 맞은 그 자리에 악창이 나서 필경은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화평을 깨뜨리고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피해가도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야곱의 문제는 형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형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하늘 아래 가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형과 화평을 이루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해결이 있을 수 없습니다. 화목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고민, 화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는 화목의 문제이기 전에 죄()의 문제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책임이 나 자신의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현실의 문제도, 상황의 문제도 아닙니다. 경제 문제도 아니요, 정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죄의 문제입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쳐야 합니다. 죄인은 부유할 수도 있고 번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죄인이 물질적으로 넉넉할 수도 있고 큰 가정을 이룰 수도 있으나 단잠을 잘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참평화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난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요, 죄의 문제는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술을 마신다고 죄책을 면할 수 있습니까? 발광을 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죄에 대한 고민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서 문제 해결을 얻는 길말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밖의 어떠한 대체행위(代替行爲)도 있을 수 없습니다. No substitute입니다.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얍복강변에 홀로 남아 밤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을 이에서 찾았습니다.

야곱이 고민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불확실성'에 있었습니다. 형님을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했더니 형님이 자기를 만나러 옵니다. 소식을 들어보니 4백 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긴장이 됩니다. 주눅이 듭니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란 기껏해야 자녀들이요, 오합지졸입니다. 목자나 종들뿐입니다. 그런데 형 에서는 들()의 사람이요, 전쟁의 사람입니다.

이런 지휘자 밑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또 4백 명입니다. 하나의 군대가 몰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 우리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죽이러 오는 것인지 살리러 오는 것인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심히 불안합니다.

지난 주간에 일본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뒤적여본 잡지 가운데서 정초에 사주팔자나 점을 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읽어보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 밖으로 많은 데 놀랐습니다. 점치는 사람들을 요새는 명칭도 고상하게 '역학자''도인(道人)'이니 하는 모양입니다. 다른 직업은 없이 이렇게 점치는 것으로만 생계를 삼고 있는 사람, 이른바 전문적인 점쟁이가 우리 나라에 줄잡아 10만 명은 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미래의 운명에 대하여 어지간히도 알고 싶어 안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들, 컴퓨터가 어떻고 자연과학이 어떻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비합리적이요 비논리적인 해답으로부터 합리적인 결론을 얻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소행인 것입니다. 가장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가장 논리적인 결론을 얻으려고 합니다. 무슨 해답이 있겠습니까? 물질도 논리적이요 자연과학도 논리적이요 합리적인데, 유독 인격만은 비논리적이더란 말입니다. 도대체 사람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은 제가 설교할 시간이 아닙니다. 예정대로 되었다면 북한의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하기로 약속되었던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시겠다고 하던 분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대결상태에 있습니다. 경제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북한 지도자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평생을 함께 하는 남편의 속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인데도 그 자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컴퓨터도 이런 점에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불확실합니다. 예측 불가능입니다. 인격의 비논리성을, 마음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한 배에서 태어났고, 더욱이 쌍둥이 형입니다. 그 형이 온다고 하는데 야곱은 반갑지가 않고 불안만 합니다. 형이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하는데 왜 기쁘지를 않고 이토록 불안해야 하는 것입니까?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은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했습니다. 오늘까지 살아온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이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33장에 보면 야곱은 과연 '은혜'라는 말을 다섯 차례나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5)"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10)"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11)"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15)"----야곱이 그 일생을 통하여 '은혜'라는 말을 이렇게 많이 한 때가 없습니다. 또한 그가 난생처음으로 해보는 말인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왔다면 미래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이젠 불안해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믿었다면, 정말로 은혜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제 와서라고 무엇을 불안해하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의 깊은 의미를 몰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틀림없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도 믿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이 못되지 않은가, 하나님께로서 힘입을만한 의()가 나에게 없지 않은가---이런 생각이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기 의()일랑 깨끗이 포기해야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믿을 수 있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심으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변덕을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야 천방지축 휘청거리고 쓰러질지언정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요지부동이십니다. 변함없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평양 다녀오신 분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흔히들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불안합디다. 평양에 발을 딛는 순간,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몰라서 몹시 불안해요. 불안 속에 일정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일단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그제야 어휴, 살았다 싶습디다." 그러고는 제게도 물어봅니다. "목사님은 어떠셨습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난 그렇지 않던데요. 평양에 딱 내리니까 내 고향에 왔다 싶은 게 마음이 편안하던걸요."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이야 어떻게 전개되었건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며, 오늘의 이 일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믿을 때에는 평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자식이 변덕을 부린다고 해서 그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변덕을 부릴 것입니까? 부모의 자식 사랑이 절대적이듯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절대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알고부터 비로소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고 나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며, 내 원수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을 두고 고민하십니까? 이제는 잠깐만 그리하시고 인간 실존에 대하여 고민하십시다. 세상에 대하여 고민하십니까? 잠깐 멈추시고 나 자신에 대하여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상황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이제는 그만하시고 나의 죄로 인하여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바른 방향에서 바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십시다. 참으로 고민할 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고민할 필요 없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할 줄 모릅니다. '멍청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야곱의 마음에 고민이 많았습니다마는 마침내 바른 궤도에서 바르게 고민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절대적인 은혜를 발견하고 비로소 형과 화목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뵙는 체험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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