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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에 따른 일꾼(에베소서 3 : 1~9)
학의 새끼 한 마리가 오리 새끼들 틈에서 자라났다고 하는 동화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리 새끼들은 연못에서 마음대로 헤엄을 치고 다니는데 학의 새끼는 헤엄을 치지 못했습니다. 많은 오리 새끼들이 헤엄도 칠 줄 모르고 못 생긴(자기들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학의 새끼를 말할 수 없이 구박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의 새끼는 늘 슬픔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둑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큰 학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학의 새끼는 나도 저렇게 날아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계속 오리 새끼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가 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날아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또한 오리 새끼들처럼 헤엄도 치지 못하는 것을 슬프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나의 나 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알고 자기가 알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되기만 한다면 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설자리에 바로 서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나는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며, 해야 할 일을 하며 그리고 앞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참으로 행복하며 효과적인 생을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으며, 또한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불행입니다.
저에게 건강의 비결을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건강의 비결이란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가까운 분들이나 혹은 후배들에게 대답하기를 하고 싶은 일만 하게 되면 건강할 수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하고 싶지 않은 일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안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같으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한 게 아니라 그 일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의 자기 됨의 그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마는 외국의 백화점 같은 곳에서는 흔히 쓰는 말로서 What can I do for you?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또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것만 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이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고민하게 되고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려 가지 모양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사무엘이나 모세나 사울을 부르신 것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귀에 들려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지금도 그렇지는 못하지만 가끔 꿈으로나 환상으로 들려지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현재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부르시든지 혹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게 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에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게 되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추상적, 감정적,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우주적이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요 역사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발적이거나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섭리적인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80세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섭리하신 것입니다. 나일 강변에서 갈대 상자에 실려 떠내려 가다가 바로의 공주의 손에 의하여 그의 아들로서 궁에서 자라며 교육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며,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비참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며 필요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여러 삶을 통과한 후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오묘한 섭리 중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그 때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형통하고 어떤 때는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병들기도 하며 건강할 때도 있으며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절망에 쌓일 때도 있었습니다. 문이 닫히기도 하고 또 다른 문이 열리기도 하는 이 모든 경로가 우연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섭리적 부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 중에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씀하셨고, 골래서 1:25에서는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내가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태어남도 하나님의 섭리이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교육과 모든 경험을 종합해서 이 모든 일들이 있어야 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을 어떻게 보며, 내가 처한 현 시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큰 실수의 결과인지, 아니면 우연하게 되어진 일인지 아니면 지은 죄로 말이암아 저주를 받아서 이런 고난을 치러야 하는지, 나는 지금 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시점이 하나님이 오랫동안 내게 향한 경륜을 따라 준비하신 그 뜻에 의하여 이 시간 나에게 주어 졌다는 귀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은총이며 이런 은총적 세계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뜻대로 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름에서 살았습니다. 분명한 부름을 듣고 확실한 소명에 의하여 그 일생을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말할 때마다 언제나 은혜라는 말을 함께 썼습니다.
갈라디아 1:15에서는 "은혜로 부르신 이가..."라고 했으며, 고린도전서 15:10에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의 자기가 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가 말한 경륜(sensation)은 기계론적이나 숙명론적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이며 은혜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학이 있습니다.
그는 은혜라는 말을 통해서 항상 무자격한 자기를 생각합니다.
자기는 이만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 즉 자기의 자기됨에 비하여 받은 것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는 처지를 생각해 보아도 나의 나됨에 비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너무도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오늘이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깊이 감사할 줄 아는 그 마음이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의 괴수요 만물의 때만도 못하다고 했고, 오늘 본문에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자기를 평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것은 은혜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성공만이 은혜가 아니라 실패도 은혜였고, 건강한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을 가졌어도 은혜였습니다. 자유로이 전도한 것 도 은혜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히고 핍박을 받고 어려운 역경 속에 처해 있는 그것도 그에게는 소중한 은혜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감옥에서의 생활도 은혜라고 말을 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까지도 자기를 완전히 은혜의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그처럼 자녀들을 사랑하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잘못한 일이 있어도 책망 한번 하지 못하고 정성껏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그 장로님은 젊었을 때 너무 방탕하여 많은 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결혼한 후 1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중생 하는 가운데 다시 회생하여 자녀를 낳기 시작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은 후 많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 되는 사람이 이 장로님뿐이 아니었지만 옛날의 자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녀들이 더욱 소중하여 감히 나무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장로님에게는 무엇하나 은총 아닌 것이 없었고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저 받은 선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선물, 어쩌면 내게만 주신 선물을 바울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도 아랑곳없이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 해도 그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할 만한 것은 예수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을 죽이던 완악한 사람으로서 벌을 받아 마땅할 죄인이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으므로 이제 핍박을 받아 순교자가 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그였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많은 매를 맞고도 밤중에 기도와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같은 기도와 찬송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바울과 같은 기쁨이 없는 원인은 오직 하나,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교만이 꺾어지기까지는 은혜가 은혜 됨을 모를 것입니다. 나의 나됨이 은혜의 열매임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는 것은 더 큰 선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봉사한다 혹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말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다만 사랑을 받았다는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 차서 그것이 행위로 나타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 건강, 재물, 지혜, 지식, 재능, 직장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무엇인가 부족하여 더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기도의 내용을 바꾸어서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닫고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 나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리스도 외에 달라고 하는 것이 너무 많고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피곤한 이유는 나의 나됨, 현재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선물을 봉사로 직결합니다.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노라고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재물이 생기든지 지위가 높아지든지 출세를 하게 되면 큰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일거리가 있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보면 건강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너무 바빠서 못 견디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평이 될 수 없습니다. 바쁜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고 할 일이 없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습니다.
바울은 일꾼이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참 행복은 봉사에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봉사이며 왜 봉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의 일꾼이란 말은 밑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꾼,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minister 라고 하며 봉사자라는 말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며, 위에 있는 자가 아니라 아래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섬기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헤 보았다면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최대의 기쁨이란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한 봉사 이것이 기쁨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축복으로서 일할 기회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꾼 됨을 은혜로 알고 특권으로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열을 기울여 일을 했습니다. 이 일을 그가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주신 달란트였기 때문이었으며 항상 영광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즐거움과 능률이 없다면 무엇인가 내게 주신 소명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을 저주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불행한 우리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 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저주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다만 은혜로 주어질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고통을 시련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통하여 나를 강하게 하시고 또 성장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훈련과 시련으로 받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은혜와 선물로 생각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모든 것을 은혜의 기회로 생각하고 특권으로 생각하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할 기회를 주실 때 즐거움으로 합니다. 이 기회는 바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이북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옵니다. 그 날도 눈이 많이 내린 굉장히 추운 날씨였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그 많은 학생 가운데서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집에다 무얼 놓고 왔는데 그것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추운 줄도 모르고 단숨에 달려갔고, 다른 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부러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하필이면 왜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느냐고 짜증을 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의 천진난만한 마음으로서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택하여 주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때의 그 마음으로 일생을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그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오늘 일꾼이 되었노라, 이것이 바로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바울은 이 섬기는 자가 되고 봉사자가 된 것을 특권으로 또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의 축복과 능력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 :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항상 불평과 원망과 피곤에 지친 저희들에게 오늘도 말씀으로 은혜 주셔서 나의 나됨을 알게 해 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귀하신 뜻을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주신 많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환경과 처지가 감사의 조건이 되어 온 생을 다 바쳐 그 은혜에 응답하는 일꾼으로써 봉사하게 하여 주시며 이, 봉사를 통하여 생의 의미를 창조하여 그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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