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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길의 두 제자(누가복음 24 : 13~27)
세상의 많은 괴로움 중에 실망과 낙심이라고 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배고픔이나 헐벗음과 같은 육체적 혹은 동물적인 고통이 아니라 이성을 지닌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그러한 고통입니다.
이상과 사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기대 혹은 믿음이나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대와 소망은 우리 생활의 활력소가 되며 또한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망 없는 기쁨은 진정한 기쁨일 수가 없고, 부귀와 영화도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소망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큼 이 같은 아름다운 소망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때의 고통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을 실망이라고 하며 낙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필요 없는 실망을 하고, 당하지 않아도 될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을 믿지 못하여 실망하고 낙심한다면 이것은 고통이라기보다 가련한 일입니다. 기대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는 당연히 기대하고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지함으로 인하여 눈으로 보아도 모르고 귀로 들으면서도 몰라서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 속에 살면서도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지 못하여 계속 낙심 중에 있다면 이처럼 어리석고 가련한 일은 아마도 없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5리쯤 가면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가 석양에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낙심하면서 서로 무엇인가 역시 슬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 마을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희들과 동행하고 계셨으며 또한 성경 말씀을 해석해 주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고 낙심하며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절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가운데 있었으며, 오히려 큰 축복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해야 될 때 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있을 수 없는 난센스가 오늘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외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가운데 살면서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은혜없는 짜증스러운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와 같이 방황하며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엠마오로 가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슬퍼하는 두 제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실망 내용을 본문 말씀 중에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능한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믿고 기대했는데 그 메시야가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능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고 이스라엘을 구속할만한 권세도 없습니다. 그 많이 행하시던 기적은 어디로 가고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만이 있는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허무와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기대가 컸으리만큼 절망 또한 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 실망과 낙심에 사로잡혀서 더 큰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더욱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자신이 지혜롭고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마음의 눈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협소한 세계관과 강한 자기 욕망에 집착하여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한 길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가난한 가정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가게 해 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 놓았는데, 막상 떠나려고 할 때 어머니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자 이 여학생은 그만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가면서 하는 말이 언제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현재 바라고 있던 조그마한 소원인 수학 여행을 가정 형편상 가지 못했다고 해서 오늘날까지 자라면서 받은 그 모든 사랑을 일시에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같은 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잠시 잠깐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나의 조그마한 소원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게 주신 은혜, 이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근심과 걱정되는 문제들을 일시에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눈으로 보아도 귀로 들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깨닫지 못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에 집착되어 있는 동안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 권능에 의한 영광, 다윗의 왕국, 그 옛날 찬란했던 솔로몬의 왕국 시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정치적 영광이 이스라엘에 이르기를 바라는 그 다음, 그 눈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볼 때 그들은 실망과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몰랐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아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알고, 메시야가 오실 것도 알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망 사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눈이 가려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 본 것처럼 무엇엔가 마음이 가려져서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깨달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하시는 메시야만 생각하였지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야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영광의 메시야만 생각하고 고난의 메시야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은 보아야 될 줄 알아서 보긴 보는데 이상하게 성경책만 붙들면 잠이 온다고 하며 왜 그러냐고 질문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병 고침을 받고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고 하는 소위 복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복받겠다는 마음으로 성경도 봅니다. 여기저기 복받았다는 이야기만 눈에 들어오고 십자가를 졌다는 이야기는 안보입니다. 복받는 비결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눈에 뜨이는데 썩어지는 한알의 밀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셨기 때문에 이 길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리스도를 알아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귀중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또 한 가지 그들의 소극적인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몇 사람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만 듣고 돌아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무덤에 가 보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빈 무덤이라도 확인하고자 하는 그런 적극성마져도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비참한 예수님만 생각하고 슬퍼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빈 무덤 가에서 시체라도 찾으려고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차지한 여자들의 말을 듣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여자들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에는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혹은 선악과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얼마나 보았느냐고 반대로 질문해 보면 마태복음 조금 보다 말았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일생 처음 교회에 나오시면서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어떻게 새벽 기도까지 나오시느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지만 워낙 뒤진 것 같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믿어야 될 것 같아서 나온다고 하는 말을 들어봅니다. 잘 생각한 일입니다. 믿음에는 적극성이 있어야 믿음의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해 가지고 어떻게 되는 요행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헐값에 신앙을 구하고 너무 싸구려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면서 성경을 보아야 진리를 알 수 있고, 원수를 사랑하며 기도해야 기도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바쳐서 봉사하는 일없이 성경을 보면 그 뜻은 알 길이 없습니다.
짐작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두 사람은 대세가 틀린 것 같아서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피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는 그 예루살렘을 등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리와 반대의 길에 서서 진리를 알기 바라며 그리스도와 등지면서 그리스도를 알겠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알기를 바라는 마음은 요행을 기다리는 미신적인 마음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말씀이 아니라 다만 그 말씀을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십자가 중심적인 해석을 내려 주신 것뿐입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좀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눈을 밝히 뜬 다음에야 그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지나간 체험을 의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뜨거움의 체험은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머리에 전달되어져서 깨달음이 오기까지는 눈을 뜨는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체험하면서도 그 감사와 감격은 모릅니다. 주께서 우리의 눈을 띄워 주실 때,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욕망과 더러운 것과 게으른 것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바로 바라볼 수 있으며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안에서 능력과 지혜를 함께 얻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들은 저녁 노을에 그 노을과 같은 슬픈 빛을 띠고 내려갔으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벽길에 26리 길 되는 예루살렘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은 부활했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새벽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실망의 황혼 길에서 돌이켜서 새 소망 새 용기의 새벽길에 선 이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새벽길에 섰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도 같이 낙심할 필요가 없는데도 낙심하고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절망 중에 사는 우둔하고 어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사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뜻을 바로 깨달아서 슬픔의 황혼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소망의 새벽길에 세워 주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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